국민의힘, '당명의 역설'과 '바다동물 왕국'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나침반도 없이 산으로 가는 배, '피플파워당'

야당인 국민의힘 영문 이름은 People Power Party(PPP)인데, 똑같은 이름의 정당이 다른 나라들에도 있다. 2007년 총선에서 233석을 얻어 연립정권에 참여했으나 뒤에 헌법재판소의 해산명령을 받은 타이의 People's Power Party가 대표적이다.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등에도 같은 이름의 정당이 있다. 지난 4월 페이스북은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싱가포르 야당 대표의 계정을 폐쇄했는데, 그 주인공이 고멍셍 싱가포르 PPP 대표다.

이들 외국 정당의 이름은 '인민의힘'으로 번역된다. 간혹 '인민권력당'이라는 번역도 눈에 띄는데 중국에서는 타이와 싱가포르의 PPP를 '인민역량당'(人民力量黨)이라고 부른다. '피플파워'는 민중의 힘, 아래로부터의 혁명, 민중혁명, 시민혁명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용어이고, '국민'은 국가적 질서를 전제로 한 법적 개념으로 국가의 통치권에 복종할 의무를 지닌 개개인의 집합을 뜻하는 용어이므로 서로 개념이 어긋난다. 그래서 국민의힘 영문 당명 People Power Party를 다시 한국어로 옮기면 '인민의힘' 또는 '민중의힘'이라고 해야 옳다. 지금의 야당은 4월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에서 줄곧 피플파워의 대척점에 서 있던 정치 세력과 뿌리를 함께 한다. "위대한 피플파워"(촛불혁명에 대한 국제엠네스티 조사관의 표현)로 무너진 정권의 적통을 잇는 정당이 피플파워를 당명으로 내건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외국의 '피플파워당'은 이념적으로는 대체로 좌파, 진보 계열에 속한다. 싱가포르 PPP는 '중도 좌파에서 좌파', 타이 PPP는 '중도, 포퓰리즘적 사회 복지 정책 추구', 오스트레일리아의 People Power는 '진보주의'로 위키피디아는 분류해놓았다. 우리나라 국민의힘이 우파 정당이면서도 피플파워를 내세운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어색하다. PPP는 포퓰리즘적 경향도 보이는데 그 점에서는 국민의힘도 비슷하다. 대중의 인기를 끌기 위해 논리보다 감정에 의존하고, 자극적인 언사를 동원한 대중선동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현상은 최근 새로운 대선주자들이 당에 입당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정책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책적 백치 상태'라고 표현해야 옳다. 사안에 대한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일단 말부터 앞세운다는 인상이 짙다. 잘못된 정치 현상에 대한 냉소적인 경구로 "정치는 조직화된 증오다" "보수는 오직 무엇에 대한 반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등의 말이 있는데, 윤석열· 최재형 두 사람이 딱 그렇다. '증오의 조직화'가 유일한 정치전략이고, '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정책의 모든 것이다.

이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구애' 대상은 청년층, 그중에서도 '이대남'으로 불리는 20대 남성들로 보인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의 72.5%가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 등 청년층의 여당 이탈 현상이 심각하다는 분석에 고무된 전략일 것이다. "일하고 싶은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최저임금 인상은 범죄와 다름없다"는 최 전 원장의 말이나, 윤 전 총장이 '저출산 문제의 원인'과 관련해 "페미니즘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서 남녀 간 건전한 교제도 정서적으로 막는 역할을 많이 한다"고 말한 것 등은 대표적이다. 청년층의 환심을 사려고 안간힘을 쓰다 헛발질을 한 경우다. 청년 문제는 일자리, 주거, 교육 등 모든 문제가 얽혀 있어 국가 정책을 종합적, 획기적으로 변환시키지 않고는 해법을 찾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다. 그런데 지금 윤·최 두 사람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구애 공세에만 몰두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고 말한 것도 탈원전 반대자들의 환심을 사려다 일으킨 대형 사고다. 윤 전 총장 말대로라면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방사능 검사도 필요 없게 된다. 후쿠시마현 부근 등에서 잡히는 '세슘 범벅 수산물'을 싼값에 많이 수입하는 것은 "부정식품이라도 없는 사람들은 싸게 먹을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는 그의 철학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탈원전 정책 전환에 대한 감사 뒤 "위법하거나 절차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항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던 감사원의 수장을 지낸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가 연일 "탈원전 정책 전환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공격하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대목이 있다. '탈원전' 문제는 이 두 사람의 현직 시절 '정치적 야심과 일탈 행보'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는 점이다. 감사원 감사든 검찰 수사든 탈원전 정책 전환에 대한 중립적 사고를 갖고 출발해야 한다. 탈원전 정책이 옳다 그르다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탈원전 정책은 잘못됐다'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가 무리와 억지, 짜맞추기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탈원전 정책이 잘못이라는 개인적 믿음→무리한 감사·수사→현 정권과의 마찰→정권과의 갈등을 명분으로 한 대선 출마'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검찰 수사 당시 대검과 대전지검 청사 앞에 '권력을 남용하는 기생충 박멸해 달라'는 등의 글귀가 적힌 화환이 즐비하게 놓였던 것을 상기해보라. 검찰 수사는 그들의 응원에 호응하기 위한 윤 전 총장의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고, 화환을 보낸 사람들은 지금 강력한 윤석열 지지자들이다.

국민의힘은 요즘 '돌고래·멸치·고등어'가 헤엄치는 '바다동물 왕국'이 됐다. 윤 전 총장의 측근인 정진석 의원이 "멸치, 고등어, 돌고래는 생장 조건이 다른데 한 데 모을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한 것이 단초다. 정치의 바다에서 당의 강령과 정강정책은 올바른 목적지로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이런 나침반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어느 쪽 고기가 더 크냐'는 데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새로 입당한 대선주자들의 정책적 지향점이나 콘텐츠와는 상관없이 의원들이 이쪽저쪽으로 몰려가 '묻지마 지지'를 하는 풍경이 이를 웅변한다. 이 과정에서 '토종 어류'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다. 맛도 영양가도 따지지 않고 크기만을 따지는 '큰 고기 선호증'이 대세를 점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지난해 9월초 새 당명으로 재출범할 때는 나름 '새로운 보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피플파워'라는 당명 자체는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으로 어색했지만, 기존 보수 정당 이미지와는 다른 신선한 모습을 보였다. 당 강령 제1조 1항에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선언을 명기했고, 사회적 약자 배려, 노동 존중 등 기존 정책과는 다른 내용을 정강정책에 많이 담았다. 이는 김종인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의 강력한 드라이브 결과지만 보수가 새롭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대적 당위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의 혁신은커녕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 형국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나 최재형 전 원장은 국민의힘에 입당하면서 당 강령과 정강정책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았을까.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전 총장의 힘겨루기는 그런 점에서 단순한 감정싸움이나 주도권 경쟁 차원을 넘어 더 본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한국 보수의 혁신'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 등 엉뚱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한국 역사상 첫 30대 당수'가 지니는 역사적 무게와 임무를 자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윤석열 전 총장과 최재형 전 원장 등의 등장은 이런 판 자체를 완전히 흩트려 버렸다. '멸치'나 '고등어' 중에는 보수 혁신의 열망을 가진 후보도 있겠으나 자칭 돌고래들은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영국 보수당이 살아남은 것은 포용적, 개방적이며, 시대 변화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 덕분"이라는 교훈과는 정반대로 적대와 균열, 대립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들에 대한 당내 추종 세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건전한 보수, 새로운 보수, 보수의 혁신은 영영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나침반도 없이 바다를 표류하다 산으로 가고 있는 배 '피플파워당', 이것은 제1야당의 비극을 넘어 보수 전체의 비극, 나아가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21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SBS 방송센터에서 진행된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당대표 토론배틀 출연에 앞서 분장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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