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장악해 집권한 전두환, 학생들 징집해 '첩보' 강요했다

[손호철의 발자국] 64. 서울 삼청동 :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의 비극을 찾아서

'한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파워 엘리트가 누구인지 찾고 그 이유를 밝혀라.' 미국 유학시절 정치권력론 시간에 교수가 내준 학기 과제였다.

"한국의 파워 엘리트를 어떻게 찾지?" 고민을 하고 여러 문헌을 찾아 알게 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소위 '지위법'이다. 정계는 국회의원 이상, 관료는 차관급 이상, 경제는 10대기업 이사 이상, 문화교육계는 종합대학 학장 이상 등 특정 지위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언론 등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중 영남 출신이 얼마나 되는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출신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하곤 한다. 문제는 이 경우 숨겨진 실세였던 김영삼 정권의 김현철, 박근혜 정권의 최순실은 빠진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이 '명성법'이다. 누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명성을 여론지도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정보의 흐름을 추적하는 '네트워크 분석'이다. 중요 정보가 누구에게 흘러가느냐는 분석하는 것이다. 그렇다. '정보가 권력이다'. 아니 정보가 '최고의 권력'이다.

10‧26에서 12‧12, 이어 5‧18로 이어졌던 1979년 말과 1980년 봄, 형식적인 최고권력자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었지만 중요 정보는 그가 아니라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이후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었다)의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게 흘러갔다.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나아가 육사 출신의 '정치군인'들의 모임인 '하나회'의 우두머리로서 정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그리워서 울던 그 사람'.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은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안가에서 박정희,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박정희의 시중을 드는 22살의 미모의 여자대학생 심재순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들이 나누던 이야기는 얼마 전 터진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해 박정희, 차지철이 강경론을 토하자, 잠깐 자리를 비운 김재규는 권총을 챙겨 올라와 이들을 사살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로 가려다가 다른 건물에 초대해 놓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제안에 의해 육군본부로 이동했다.

▲ 박정희 사살 장면을 재현하는 김재규

문제는 김재규가 박정희의 시신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김재규가 허겁지겁 떠난 뒤 김계원 비서실장은 박정희의 시신을 챙겨 가까운 삼청동 입구의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이송해 당직 군의관에게 사망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 병원은 보안사령부 영내에 위치해 있었고 전두환은 당직사관을 통해 박정희의 사망 사실을 알게 돼, 육군본부로 이동한 김재규를 체포할 수 있었다. 10‧26 당시 박정희 암살이라는 정보를 쥔 사람이 전두환이었고, 1980년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시 김재규가 박정희의 시신을 챙겨 이동했더라면, 김재규가 육군본부가 아니라 중앙정보부로 이동했더라면, 80년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무궁화동산. 이제는 단골 시위 장소가 된 청와대 앞 광장 왼쪽에는 무궁화가 만발한 무궁화동산이 있다. 그곳에 서자 김재규의 상황 판단 잘못으로 비극으로 끝난 10‧26 거사가 생각나 가슴이 찡했다. 이곳이 바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알을 맞고 심재순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 곳이기 때문이다.

▲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궁정동 안가는 이제 무궁화동산으로 변했다. ⓒ손호철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청와대로 들어가자마자 박정희가 여성들을 데려다 놓고 술을 마시고 놀았던 "안가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역사적인 10‧26의 현장을 철거해 무궁화동산으로 만든 것이다. 겨울이라 꽃은 피어 있지 않았지만, 무궁화 꽃을 보고 있자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와 그의 지시를 따랐던 수행비서 박홍주 대령, 박정희의 술시중을 들 여인들을 간택하는 채홍사 역을 해야 했던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 등 10‧26으로 사형당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고 광주학살을 일으키게 만들어준 보안사는 국군기무사로 이름이 바뀌고 이전을 해 이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변했다. 바로 이곳에서 전두환은 보안사의 정보력에 기초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을 장악했고 이어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경임해 행정부를 장악하고, 5월 18일 광주학살 작전을 통해 시민사회를 굴복시킴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의 출동 현장 사진이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전두환의 권력이 탄생한 보안사령부는 이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바뀌었다. ⓒ손호철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정보력, 그리고 박정희가 키운 육사 출신의 정치군인 모임인 하나회의 인적 네트워크였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계엄사령관에 오른 정승화 장군이 주도한 군 지휘관회의에서 다수 지휘관들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에 따른 폐해를 실감한 만큼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로 결의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의 정치적 야심을 아는 만큼, 그를 한직인 동해경비사령관으로 귀양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촉수인 하나회 출신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고, 이들은 전두환이 지방으로 쫓겨 가기 전에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대통령권한대행이었던 최규하였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현장에 있었지만 김재규를 육군본부로 유인해 사태를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이미 수사결과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해 관련조사를 위해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최규하가 체포명령을 수차례 거부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군을 동원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상관인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참군인이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이 쿠데타에 저항했지만 하나회 소속 부하들에게 무력화되었다. 정병주 사령관 체포에 저항하던 참군인 김오랑 소령은 쿠데타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 보안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는 전두환 노태우 등 12.12 반란 주역들(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자료)

"12‧12를 사람들이 지금의 시각으로 보는데, 당시 북괴가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1996년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노태우의 12‧12를 군사쿠데타로 규정하고 이들을 구속시켜 세상이 충격에 빠졌을 때, 서강대에 특강을 온 한 원로 정치학자가 전두환·노태우를 옹호했다. 그는 노태우 밑에서 고위직을 지낸 '노태우맨'이었다.

"그러니까 노태우 같은 X새끼는 총살시켜야지요!" "아니 손 교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하얗게 질려 물었다. "그동안 그놈들이 항상 북괴의 위협 운운하며 시위하는 학생들 잡아가고 국민들 억압했잖아요. 그런데 노태우 X새끼는 자신들 권력 잡겠다고 북한이 쳐들어 내려오라고 최전방 비우고 9사단 병력을 끌고 나왔으니 총살시켜야지요. 이런 반역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대한민국 지키겠다고 군에 왔다가 이들의 사병으로 끌려가 같은 우리 군에게 총을 쏴야 했던 사병들은 뭐예요? 박정희는 최소한 5‧16 때 이 같은 짓은 안 했어요." 그는 뭐 씹은 표정으로 "전방에 미군이 있었으니 북한이 못 내려왔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다. 이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최전방의 군대를 끌고 내려와 '국민의 군대'를 자신들의 '사병'으로 만들었다. 이 점에서 부드러운 이미지로 전두환보다 '덜 악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노태우는 전두환 못지않은, 어느 면에서는 전두환 이상의 '반역자'다. 이 같은 슬픈 역사는 모른 채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변한 이곳으로 그림을 감상하러온 미술 애호가들을 보고 있자, 그들의 얼굴이 갑자기 장태완, 정병주, 김오랑으로 보였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우리 역사에 남긴 악행이 5‧18 학살 등 한둘이 아니지만 그 중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다.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이다.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은 이를 관장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와 사회정화위원회가 삼청동에 있어 생긴 것으로, 신군부는 권력을 잡자 5‧16 쿠데타의 국토건설단을 모델로 사회악을 일소한다며 폭력배 등 2만 명을 잡아다가 군부대에서 4주간 순화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각 경찰서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니 초과달성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도 마구잡이로 잡아 보내 계획의 두 배인 4만 명이 끌려갔다. 정작 조폭 등은 뒷돈주고 빠지고 힘없는 사람들이 주로 잡혀갔다. 여성들도 동네에서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다가 적발되면 붙잡혀 갔다. "이제 민주주의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예비역 장군, 노동조합 간부들이 잡아갔다. 하다못해 고등학교별로 2~3명의 할당량을 배정해 담임선생들이 제자 중 대상자를 골라 "새마을교육을 받고 오라"고 보내, 잡혀온 사람 중 4분의 1이 미성년자였다!

▲ 삼청교육대의 지옥훈련 장면(오른 쪽 아래)과 보상을 요구하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천민주화운동 기념관 전시물)

이들은 군부대로 보내져 목봉체조 등 살인적인 훈련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고, 상당수는 1~5년까지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사회주의국가에서나 있는 것으로 배워온 강제노동수용소가 1980년대까지 '자유대한'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마음대로 뛰어놀 어린 나이에 이곳에 끌려온 고등학생들은 살인적 훈련과 구타에 시달리며 새마을운동과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같은 위헌적이고 반인류적인 조치로 500명이 죽었고, 2300명이 부상이나 상해를 입었다. 2004년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이 뒤늦게 제정됐고 2018년 대법원도 삼청교육대는 위헌이고 무효라고 판결했다. 삼청교육대를 기획한 국보위가 있었던 옛 중앙교육연수원 빌딩은 이들의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삼청교육대를 기획하고 만든 사회정화위가 있었던 삼청동 옛 중앙교육연수원 건물 ⓒ손호철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자 우리를 협박하고 우리를 고문했던 당신들, 우리에게 밀고자가 되기를 강요했던 당신들로부터 우리는 살아남았다. (…)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2019년 12월 연희동 전두환 집 앞에 머리가 희끗한 나이 든 사람들이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녹화사업 희생자들의 진상규명 요구였다. 녹화사업하면 대부분 식목일과 나무심기가 떠오르겠지만, 전혀 그것이 아니다. 세운상가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 퇴계로를 만나는 곳에 진양프라자라는 낡은 빌딩이 있다. 이곳은 보안사의 또 다른 슬픈 역사인 녹화사업의 현장이다.

▲ 보안사 분실이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운동 프락치 만들기를 주도했던 진양프라자빌딩 ⓒ손호철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 참여자 등 정권에 비판적인 학생들을 강제징집했다. 이는 박정희 때도 있었던 일이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녹화사업이었다. 녹화사업은 회유, 협박, 고문을 통해 이들을 전향시키는 한편, 이들에게 친구들을 만나 학생운동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오도록 요구하는 등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1984년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폐지됐지만, 선도공작이란 이름으로 명칭만 바꾸어 1989년까지 계속됐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조사에 따르면, 선도공작을 제외한 녹화사업 피해자만 1192명이다. 이 같은 프락치 강요 과정에서 연세대생 정성희 등 9명이 의문사를 했다. 의문사 피해자 이외에도 제대 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트라우마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전두환이 우리 역사에 남긴 비극은 이처럼 너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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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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