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하면 대부분 박정희를 떠올린다. 나는 박정희가 아니라 구로공단의 여공들과 그들이 살았던 '벌집'이 생각난다. 그렇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진짜 주역들은 남들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어린 나이에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꿈을 찾아, 서울로 올라와 '공순이'라는 비하를 받으며 벌집이라고 부르는 좁은 골방에 살면서 구로공단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일한 여공들('여성노동자'가 올바른 표현이지만 이 글에서는 당시의 표현대로 '여공'이라고 쓰겠다)이다.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공단이 되겠느냐고 의심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1967년 초 박정희는 구로공단 내 한국수출공단본부 광장에서 열린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식에서 말했다(구로공단의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단'이지만 그 공단이 구로동에 위치했기 때문에 모두들 '구로공단'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디지털 벨리로 변했지만 이후 구로공단은 서울을, 아니 한국을 대표하는 공단으로 발전했다.
구로공단은 뛰어난 입지조건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제1공단이 완성되자 입주 희망업체가 줄을 이어 인접지역인 가리봉동 일대에 제2공단을, 다시 제3공단을 건설했다. 구로공단의 주요 업종은 섬유, 봉제, 전자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여공들의 싼 노동력을 통해 1971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고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가운데 11%인 11억 달러를 이곳에서 수출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수출의 다리'다. 구로공단에서 영등포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는 고가도로 밑에는 대부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아직도 '수출의 다리'라는 표시판이 달려 있다. 구로공단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이 다리를 거쳐 외국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이 같은 수출의 성과 뒤에는 어린 여공들의 땀과 눈물이 숨겨져 있다. 당시 공단 표어에는 '노동력 70%, 기계 30%'라는 표어가 있을 정도로 경쟁력의 핵심은 싼 노동력이었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 공단 입주 초기인 1967년 2460명에 불과했던 노동자수는 1978년 말에는 11만 4000명으로 무려 43배나 늘어났다. 불을 찾아 모이는 불나비처럼 농촌의 어린 노동력들은 꿈을 찾아 구로공단으로 모여들었다.
특히 70년대 초반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대부분은 여공이었고 여공의 50%가 10대였다. 중학교를 다녀야 할 10대 초반의 소녀들도 많았다. 그리고 20%가 20대였다. 이들의 학력은 충격적이다. 문맹률이 20%, 초등학교 중퇴율이 15%, 초등학교 졸업률이 51%로, 중학교 문도 못 밟아본 어린 저학력 노동자들이 86%나 됐다. 중졸이 8%, 고졸 이상은 3%에 불과했다.
정부와 공단은 노사관계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산업체부설학교를 세워 이들의 학구열을 충족시켜 주려고 했다. 이들은 대부분 힘든 노동에도 불구하고 저녁에는 가난해서 포기해야 했던 학구열을 채우기 위해 정부의 지원 아래 공장에서 운영하는 산업체 특별야학에 참여했다.
당시 여공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일을 한 뒤 저녁을 먹고 야간학교로 달려가 파김치가 된 몸으로 6시부터 11시까지 5시간 수업을 하고 집에 들어와 다시 숙제를 했다. 그 결과 평균 취침시간은 하루 6시간에 불과했다.
"저는 미싱사를 했는데요. 먼지가 너무 많으니 여름에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틀지 못했습니다. 2시간만 일하면 온 몸이 젖고 실먼지로 뒤덮였습니다. (…) 12, 13살 난 시다들이 많았는데 대형 다리미를 다뤘습니다. 어리광부릴 나이에 산업체 특별학교가 끝나면 쉬지도 못하고 기숙사에서 옷 갈아입고 프레스로 카라를 고열에 넣고 빼내는 일을 했습니다. 잠깐만 졸면 손을 넣었다가 빼지 못해 손이 오징어처럼 눌리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노동운동을 위해 미싱사 자격을 따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해 일했던 심상정 의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은 당시 여공들의 현실을 증언한 생생한 기록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공장 밖에서도 이들의 삶이 비참하긴 매 한가지였다. 공단 측은 미혼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기숙사나 생활관을 짓도록 독려했지만 많은 여공들을 다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벌집이다. 이들의 숙소를 '벌집'이라고, 숙소 동네를 '벌집촌'이라고 부른 것은 기가 막히다.
일만 하는 수 만 마리의 일벌들이 자기 몸만 들어가는 좁은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수 만 개의 구멍이 벌집이다. 마찬가지로 구로동의 벌집촌은 '조국 근대화의 어린 일벌'들이 2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살던 곳이다. 특히 이들은 받는 저임금으로는 방값을 감당할 수가 없어 대개 세 명이 단칸방에 동거했는데, 옷을 넣기 위해 쇠로 만든 틀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을 놓고 나면 세 명이 모로 누워 칼잠을 지야 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에요. 구로초등학교 3학년이고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한 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벽에 1,2,3,4… 번호가 써있어요. 화장실은 동네화장실을 쓰는데요. 아침에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2번 방에 사는 순희가 부끄러워 못 본 척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을 가요."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가까운 주택가에는 구로공단 여공들의 벌집을 재현해 놓은 구로공단 노동자체험관이 있다. 이곳에 전시해 놓은 한 벌집 거주 소년의 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일기를 보고 1층 밑으로 내려가니, 재현해 놓은 벌집들이 나를 맞았다. 좁은 방의 벽에 붙어 있는 '별들의 고향' 같은 영화 포스터들이 소녀들의 꿈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 여공들이 단순히 순응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여공에 대한 김원의 기념비적인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 여공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전면화된 남성 노동운동과의 대비를 통하여 여성노동을 단기고용 여성노동자의 한계에 기인한 '낮은 의식', '경제주의', '높은 차원의 연대에 장애물' 등으로 해석돼왔다. 이는 '남성중심적'인 오류다.
사실 1987년 이후 만개한 노동운동은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투쟁, 박정희 정권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YH(여성) 노동자 투쟁, 나아가 구로공단 여자노동자들의 투쟁에 기초해 있다. 어용노조에 대항한 구로공단의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대 들어 서서히 타올랐다. 1984년 6월 구로공단에 있던 대우어패럴과 선일섬유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 같은 민주노조운동을 물리공권력으로 억압했고, 1985년 6월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사무국장, 여성부장을 구속했다. 선일섬유 노조, 효성물산, 가리봉 전자 등 1983년부터 생겨난 민주노조들이 이 같은 전두환 정권의 각개격파에 당하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구속된 대우어패럴 노조지도부 석방, 노동운동 블랙리스트 철폐, 노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이 동맹파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당시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활동했던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다. 이 파업은 결국 대우어패럴의 구사대 투입 등으로 패배로 끝났고 40여 명이 구속됐고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심상정은 이후 10년간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 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이루어진 최초의 동맹파업으로 이후 노동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심상정은 일찍이 환경관리기사, 안전관리기사, 열관리 기능사 등 각종 자격증을 획득하고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해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는 등 활동해온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학출)의 대선배로, 심상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설이자 운동권의 황태자'였던 김문수와 함께 서울노동운동연합을 설립했다(이후 김문수가 소련 동구 몰락 후 보수정당에 들어가 점점 우경화하기 시작해 극우적 노선으로 변하면서 심상정은 김문수를 이제는 "잊혀진 계절"이라고 평했다).
이는 전두환이 1980년 국보위를 통해 법제화한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중요한 조직적 노력으로서, 이후 노동운동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발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1987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6. 울산 : 87년 노동자대투쟁, <프레시안> 2021년 4월 12일 자 참조).
1988년 40억 달러를 넘었던 구로공단의 수출은 우리나라의 노동집약적 경공업의 경쟁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1999년 40% 이하인 15억 달러로 떨어졌다. 그 결과 노동자 수도 4만2000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구로공단을 새로운 디지털산업단지로 만들기로 하고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이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꿨다. 1970~1980년대의 노동력중심의 생산공장도 도시형 첨단 IT산업인 디지털콘텐츠, 소프트웨어, 게임, 애니메이션 등 지식기반산업의 아파트형 공장들로 변화했다.
이제는 고층빌딩의 숲으로 변한 디지털산업단지 속에 옛 구로공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아주 적다. 그 중 하나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바로 옆에 있는 '신영와코루'라는 섬유기업이다. 엣 모습을 간직한 이 단층짜리 건물을 보고 있자,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여공들의 피와 눈물이 떠오르며 김민기가 부른 '강변에서'라는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 집으로 돌아온다 / 늘어진 어깨마다 / 휑한 두 눈마다 / 붉은 노을이 물들면 / 왠지 가슴이 설레인다 /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 순이네 뎅그런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피어오른다 / 바람은 어두워지고 /별들은 춤추는데 /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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