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기억하기'를 넘어서려면…

[손호철의 발자국] 60. 서울 평화시장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반경,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 젊은이가 불길에 휩싸여 단말마처럼 고함을 지르고는 쓰러졌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슬프고 아름다운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대구 명덕역 근처에 명덕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옆에는 다 찌그러진 작은 집이 하나 있다. 전태일(1948~1970)이 살던 곳으로, 이재동 변호사, 송필경 치과의사 등 대구지역 사회운동가들은 최근 시민모금운동을 통해 이 집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만들고 있다(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의 생가는 도시 개발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 대구에 있는 전태일 생가. 대구지역 양심세력이 이를 구입해 기념관으로 만들고 있다. ⓒ손호철

전태일은 태어나서부터 짧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싸워야했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가족들이 부산으로 내려갔고 전태일은 어머니(이소선 여사)와 함께 판잣집을 지어 살아야 했다. 7살 때 다시 서울로 올라가 천막촌에 살았다. 아버지가 다시 사업에 망해 술로 지새고 어머니는 몸져누우면서, 전태일은 12살에 가장이 되어서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가족들이 다시 대구로 내려오면서, 그도 이제는 명덕초등학교로 바뀐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전태일은 일기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직장을 다니는 청소년들을 위한 야간이었던 청옥에서 전태일은 늦게 입학했음에도 지도력과 뛰어난 학습으로 실장이 됐다.

행복한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야 했고 17살의 전태일도 어머니를 찾아 막내를 업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공부에 목말랐지만 생계를 위해 서울역 등에서 노숙을 하며, 구두닦이로부터 껌팔이, 리어카 밀기 등 갖가지 일을 해 1년 뒤인 1965년 판잣집에 전세방을 마련하고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로 첫발을 내딛었다.

▲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한 뒤 어린 여공들을 위해 재단보조가 된 전태일의 사진이 청계천 전태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희망에 차 시작한 노동자의 현실은 곧 환멸로 다가왔다. 특히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여동생 같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시다)들에 대한 살인적인 착취였다. 그는 업주와 재단사가 유착해 시다들을 착취하는 것을 보고 재단사가 되어 이를 고치기로 마음먹고 재봉사를 그만두고 월급이 훨씬 적은 재단사보조가 됐다. 그는 이후 재단사로 승진했다.

전태일은 거의 매일 경찰서에 잡혀간 '상습 범법자'였다. 그는 일상적인 '범법자'가 아니라 너무나 '아름다운 범법자'였다.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이 불쌍해 자신의 버스 값으로 점심을 사주고 청계천에서 도봉산까지 걸어서 퇴근하다가 통행금지(밤 12시 이후 통행을 금한 것으로,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됐다)에 걸려 경찰서로 매일 잡혀간 것이다.

전태일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본가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딴 '태일피복'이란 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장을 꿈꾸는 많은 사람의 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가 자기 회사를 갖고 싶은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금을 제대로 내고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임금과 복지혜택을 제대로 주면서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증명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구 기증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전태일의 삶을 바꾼 것은 1968년 우연히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설서를 구입해 밤새워 공부하며 이 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그는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근로기준법도 모르고 바보처럼 착취당해 살아 왔지만 바보처럼 살다가 죽지는 않겠다는 의미에서 '바보회'를 조직했다. 그는 청계천 피복노동자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시다들은 평균 15살의 소녀들로 일어나기도 힘든 좁고 먼지가 가득하지만 환기 시설 하나 없는 봉제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요일도 없이 일하면서도 기본 생활도 어려운 살인적인 저임금(시간당 70원)에 시달리고 있었고 대부분 직업병을 앓고 있었다.

▲ 평화시장 봉제공장과 이에 대한 전태일의 실태 조사. 전태일기념관 전시자료

그는 이 같은 현실이 근로기준법을 어긴 것이기에 관계부처에 계속 진정, 고발을 했지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게다가 기업주들은 전태일과 바보회를 빨갱이로 몰았다. 그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했다. 그는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햇볕을"이라는 구호들로부터 "우리도 인간임을 인정해주십시오"라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준비했다.

전태일은 그날 오전 화형식을 위해 피켓을 들고 평화시장 앞에서 피켓시위를 시작했지만 경찰에 의해 피켓을 빼앗기고 화형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화형식의 무산에 절망한 그는 이 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극단적인 선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날 오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

▲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쓴 고발장. 전태일 기념관 전시자료

전태일의 분신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형 산업화에 의한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장기간 저임금 노동착취의 현실에 대한 처절한 고발이다. 그의 조사결과가 잘 보여주듯이, 평화시장의 시다들은 평균 15살의 소녀들로 살인적인 노동조건에서 하루 14시간씩 일요일도 없이 일하면서도 기본 생활도 어려운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한강의 기적은 이 같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눈물이 있었기에, 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완만한 학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둘째, 그가 분신한 이유, 분신을 하며 외친 요구사항이다. 그것은 '노동해방'도 '사회주의혁명'도 아니다. 그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 이미 있는 법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현행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데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창피하지만 우리의 현실이었다. 아니 그의 분신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글. 전태일 기념관 전시자료

전태일이 분신을 통해 근로기준법을 전혀 지키지 않고 인간을 돈벌이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자본가가 고발했지만, 진짜 고발한 것은 자본가들이 아니다. 그가 진짜 고발하고 있는 것은 근로기준법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것이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이 근로기준법을 어기고 있다는 전태일의 호소를 묵살하고 이들의 이익을 지키는데 급급했던 노동감시기관과 박정희 정권,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다. 전태일은 동대문구청, 서울시 근로감독관실, 노동청, 나아가 대통령에게 탄원서 등을 써서 호소했지만 모두 외면당했다. 2017년 촛불항쟁의 구호처럼, '이게 나라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980년대 전태일 추모행사 안내문

셋째, 그의 분신은 일제와 함께 생겨나 해방정국에서 만개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사라진, 아니 4‧19혁명 이후 피어오르는가 싶다가 5‧16에 의해 다시 짓밟힌, 자주적 노동운동의 부활을 의미한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과 정부의 대변인이었던 관제노동운동, 어용 노동운동이었다. 전태일에 의해 다시 타오른 자주적 노동운동은 이후 아들의 유지를 따라 '노동자의 어머니'가 된 이소선 여사와 함께 투쟁한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YH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1980년 사북을 거쳐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발전하고 이제 민주노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넷째,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특징인 분신, 투신과 같은 자기희생, '자기폭력'의 첫 단추이다. 많은 나라의 민주화 투쟁들은 군부 독재와 같은 극한적 상황에서 대부분 테러와 같은 폭력적 대응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과 극단적인 반공주의 아래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테러와 같은 폭력이 아니라 분신과 같은 최고의 자기희생에 의존하게 됐다(비슷한 예는 베트남으로 극우 월남정부의 친프랑스·친가톨릭 정책에 저항해 1960년대 승려들이 연이어 분신했다. 전태일은 아마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전통의 첫 문을 연 것이 바로 전태일이다.

"태일아, 잘 있었지?"

"예, 어서 오십시오."

모란공원 민주묘역에 가면, 오래 전 이곳에 묻힌 전태일이 머리에 '노동해방'이라고 쓴 붉은 띠를 두르고 연배로는 대선배이지만 최근 묘역의 '새까만 후배'로 바로 옆에 입주한 백기완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백기완 선생님을 이웃으로 맞이한 전태일 묘소. ⓒ손호철

대구 거주지 이외에, 전태일을 만날 수 있는 다른 두 곳은 청계천이다. 청계천 2가에 가면 4층 건물 전면에 빼곡하게 글씨가 쓰인 건물이 있다. 전태일의 일대기를 써 놓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이다. 2019년 문을 연 이곳에 가면 전태일의 성장과정으로부터 노동운동 등 여러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이미지 세탁을 위한 박근혜 후보의 전태일동상과 전태일재단 방문을 재단 측이 허용했다가 현장에서 쌍용자동차 등 해고노동자 등의 저지로 무산된 것이 떠올라 기분이 착잡하기만 했다.

기념관에서 동대문 쪽으로 걸어가면 평화시장이 나온다. 아름다운 청년은 이제는 복개된 청계천의 다리 위에서 동상으로 우리를 맞는다. 동상 쪽으로 향하자 보도블럭에 '박거용', '박상환' 등에 이어 내 이름 '손호철'이 나타났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의장단이 전태일 기념사업에 꽤 많은 돈을 기부해 기념판을 만들어 준 것이다. 김진균, 송기숙 같은 원로 민교협 의장단으로부터 김세균, 최갑수 등 선후배 의장들, 그리고 여러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의 이름도 눈에 뜨였다. 동상을 올려다보자, 전태일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 전태일이 일했던 청계천 평화시장 ⓒ손호철
▲ 전태일 기념거리 조성을 위한 기금을 낸 민교협의장단을 기념하는 거리 동판. 손호철의 이름도 보인다. ⓒ손호철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전태일의 마지막 부탁처럼, 나는 '그 순간의 전태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청년의 자기헌신의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우려되는 것은 '전태일 기억'이라는 이름 하의 전태일의 제도화, 의례화, 화석화, 상업화이다. 전태일을 잊지 않는 것은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분신하게 만든 비인간적인 현실을 발본적으로 혁신하는 것이다(전태일 때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OECD 최고의 산재국이며 1997년 IMF 위기 이후 전면화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다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고통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청계천 시다'들인 비정규직을 위해 '새로운 바보회'를 만들고 전태일 정신으로 함께 싸워주는 것이다.

아니다. 이를 넘어서야 한다. 한 노동운동가가 잘 지적했듯이, 비정규직들이 도움의 대상을 넘어서 스스로 주체화되고 전태일을 넘어서, '21세기의 전태일'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전태일'이, 아니 '새로운 전태일들'이 필요하다.

후기

▲ 11월 개봉 예정인 애니메이션 '태일이'

일찍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로 만들어졌던 전태일의 삶이 올 가을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작년 미국 투기자본의 '먹튀' 사건인 론스타 사건을 '블랙머니'라는 영화로 만들어 화제가 됐던 영화제작사 질라라비가 명필름, 전태일재단과 손을 잡고 전태일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태일이'를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직접 투자하는 '시민참여제작' 방식으로 만들어 올 11월 개봉할 예정이다.

문제는 코로나19로 영화계가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고 대기업들이 투자한 국내 영화들이 코로나19로 개봉을 미루고 있어 올 11월 '태일이'가 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주요 영화관에 얼마나 많은 개봉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냐다. 제작팀은 이에 대비해 노동조합 등을 중심으로 대안적인 영화관람운동을 조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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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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