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없는 비석' 아래 잠든 진보정치 선구자

[손호철의 발자국] 56. 서울 망우공원묘지 : '비운의 진보정치인' 조봉암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자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애국시인 한용운, 33명 중 또 다른 한 명인 오세창, 흥사단을 만든 독립운동가 안창호, 현대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인 이중섭, 1960년대에 혜성같이 나타났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매력적인 저음의 가수 차중락,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 아동문학가 방정환.

전혀 공통점이 없는 이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은 엉뚱하게도 망우리다. 그렇다. 서울 중랑구 끝자락에 위치한 망우(忘憂)공원묘지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 그대로 사람들이 평생의 근심을 놓고 이 세상을 떠나는 묘지로, 이들은 모두 이곳에 묻혀있다.

▲ 망우공원묘지에 묻혀 있는 주요 인물들의 안내판. 하단 중앙에는 조봉암 사진과 이름이 보이고 이중섭(왼쪽 두번째), 차중락(오른쪽 세번째)도 보인다. ⓒ손호철

망우공원묘지는 1935년 일제가 개발하여 1970~80년대까지 서울을 대표했던 공동묘지로 이처럼 많은 유명인사들이 묻혀있는 만큼, 그 자체가 중요한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다. 그런 만큼 묘역 입구에는 이곳에 묻혀있는 유명인사들의 사진과 약력을 써놓았고 서울시는 이곳에 역사문화공원을 짓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들과 달리 한 때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지만, 그 때문에 불행한 길을 가야했던, 그리고 많은 국민들에게서 잊힌 비운의 정치인을 찾아가고 있다. 그는 조봉암이다.

한국은 해방 후 좌우의 대립과 한국전쟁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정권의 승리로 끝난 뒤 극우적인 정치체제가 자리 잡고 진보정당과 진보적 정치세력은 사라져 버렸다. 진보의 불모지에서 진보정당을 건설하려 했던 선구자, 특히 소련 동구와는 다른 '사회민주주의체제'를 건설하려했던 사람이 바로 조봉암이다.

원래 그는 박헌영보다 두 살 많은 1898년 생으로, 1919년 3‧1운동 참여로 투옥되어 나온 뒤 공산주의 활동에 적극 나서 소련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한국공산주의자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상하이에서 잡혀와 긴 감옥살이를 한 뒤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해방 후 다시 공산당 활동을 재개했으나 박헌영 등에게 비판을 받고 이들과 결별해 전향했다.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지만 남북협상이 실패하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5.10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승만의 제의로 농림부 장관이 돼서 농지개혁을 주도한 바 있다.

▲ 농림부 장관 취임 후 여러 각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승만(앞줄 중앙) 뒤편 왼쪽으로 세번째에 조봉암이 보인다.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자료

그는 1950년대에 들어 이승만과 결별하고 '피해 대중을 위한 경제'와 '평화통일'이라는, 극우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자유당에 대립하는 민주당이라는 보수야당과 달리 진보당이라는 '진보정당'도 만들었다. 이 점에서, 그는 4‧19 이후 나타났다가 5‧16쿠데타로 된서리를 맞고 사라진 사회대중당과 같은 진보정당들, 1987년 민주화이후 등장한 민주노동당에서 정의당으로 이어진 '진보정당' 움직임의 선구자다.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활동했으면서도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의 진보정치인'으로 가장 득표를 많이 한, 가장 대중적인 정치인이다(일상적으로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등에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진보'로 부르지만, 이들은 유렵의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의 진보정치인'이 아니라 '보수야당', 정확히 이야기해 미국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의 자유주의적' 정치인, 즉 '리버럴'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진보정당 운동의 1세대 지도자인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대통령선거에서 3%대의 지지를 받았다. 2세대 지도자인 심상정 의원은 2017년 대선에서 3%의 벽을 단숨에 깨고 6.17%를 기록해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서 무려 30%를 득표했고 대구 지역에서는 이승만을 압도하고 7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이를 보고 조봉암의 고향이 대구인가 찾아보니 강화도였다. 강화도 읍사무소에 가면 주차장 구석에 그의 생가를 표시한 표시석이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의 엄청난 관권선거,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는 것이다.

▲ 강화읍사무소 주차장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조봉암 생가터 표시석 ⓒ손호철

물론 조봉암이 이처럼 많은 득표를 한 것은 보수야당 후보인 신익희 후보가 유세 도중 갑자기 사망한 것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사실 신익희와 조봉암은 각자 선거운동을 하되 투표 직전에 후보단일화를 해서 신익희를 지지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따라서 신익희가 사망했으니 민주당이 조봉암을 지지하는 것이 맞지만, 그러지 않았다. 민주당은 당원과 유권자들에게 신익희후보에 대한 추모투표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산주의자를 찍지 말라고 촉구하는 등 지지자들에게 조봉암을 찍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이 투표에 대해 통계를 이용해 정밀 분석을 한 한 연구는 조봉암에 대한 지지가 신익희 지지자들의 표가 옮겨와서라기보다는 그가 주장한 '대중경제론'과 '평화통일론'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조봉암은 한국전쟁 중에 치러진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이승만에 맞서 심상정 득표율의 두 배에 가까운 11.4%를 득표했다.

▲ 19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조봉암의 포스터와 선전물.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자료

조봉암이 보여준 높은 지지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승만 정부가 그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 살인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현대사에서 또 다른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독재정권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정적이 나타나면 빨갱이로 몰고, 대중의 저항 등 정통성의 위기에 처하면 간첩단 사건을 터트려 정권을 유지하는, 한국판 매카시즘의 첫 희생자다.

1956년 대선에 드러난 그의 인기에 놀란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대북 밀교역을 해온 이중간첩 양명산을 내세워 조봉암이 북한의 돈을 받고 북한의 주장에 따라 평화통일을 주장했다고 몰고 가 사형을 선고했고, 조봉암은 4‧19 혁명을 불과 9개월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진보당의 재판 장면이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2011년 대법원이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52년 만에 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기념물이 세워지고 복권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3‧1운동으로 투옥된 바 있고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7년형을 살았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서훈을 신청했지만, 정부는 그가 일제에 국방헌금을 냈다는 신문기사를 이유로 심사를 유보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1968년 러시아 고위관리에게 '조봉암의 진보당 설립과 대통령선거를 북한이 도왔다'고 말한 구소련 문서가 러시아에서 발견됐다. 이 같은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조봉암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북한 등 공산주의를 '또 다른 형태의 독재'라고 비판해왔다. 이 같은 그의 행태와 관련해, 북한은 조봉암이 사법살인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배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해왔다(조봉암이 처형당한 뒤 북한은 갑자기 그를 혁명열사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김일성이 남한사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장해 보여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거나, 이중첩자였던 양명산이 조봉암에게는 자기가 돈을 주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김일성에게는 조봉암이 잘 받았다고 하더라는 식으로 이중플레이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를 찾아가는 길은 그의 삶만큼 고난의 길이었다. 묘역 앞의 안내지도를 보고 그의 묘지를 찾아 나섰지만 표시판이 엉망이라 묘역 전체를 헤매야 했다. 길도 없는 묘역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큰 길로 나오기를 여러 번, 간신히 한용운 선생님 옆에 누워있는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 있어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아니하고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그의 어록을 쓴 돌을 지나 위로 올라가자, 그의 묘지와 비석이 나를 맞는다. 그에게 씌워진 누명에 대한 침묵의 항의로 세운 '비문 없는 비석'이다. 이 비석을 보고 있자 진보의 불모지에서 진보정당의 새로운 싹을 뿌리기 위해 외롭게 싸우다가 사형장으로 끌려가야 했던 그의 고독에 가슴이 메어졌다.

▲ ▲ 망우공원묘지에 있는 조봉암의 묘. 비석 뒷면에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비(白碑)다. ⓒ손호철

사실 그가 '진보정당'의 길을 간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1950년대 초 반(反)이승만 정치인들이 이승만이 만든 자유당에 대항해 통합야당을 만들 때 조봉암은 이에 참가하려 했지만, '자유민주파'라는 보수야당 세력이 그의 참여에 반대해 그는 할 수 없이 독자노선을 가야만 했다(북한과 남로당은 그를 '변절자'라고 비판한 반면 보수야당 세력들은 그를 끝까지 '빨갱이'라고 불신했다). 1956년 대선에서도 보수야당은 그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고 정치적 재판과 사법살인 때에도 이들은 침묵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이승만 정권만이 아니라 보수야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목할 것이 있다. 조봉암이 공산주의에서 전향을 한 뒤에도 끝까지 진보적 이상을 버리지 않았던 '진보적 이상주의자'였지만, 많은 우파 정치인들보다 현실적인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조봉암보다 우파라고 할 수 있는 김구는 미국과 이승만이 추구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분단의 영속화라며 반대해 1948년 5.10 선거를 거부했고, 김규식도 불참했다. 제주의 좌파들 역시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4‧3항쟁이 생겨났다.

그러나 조봉암은 5.10 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즉, 그는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 '분단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5.10 선거와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 하에서 농림부 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현실주의'는 별로 '현실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여운형과 같이 해방공간에서 추진했던 '중도좌파적 길', 소위 '좌우 극단주의'를 넘어선 '제3의 길'은 미소 양국이 남북한을 분할점령하고 좌우가 대립했던 당시 상황에서, 그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하고 승리할 수 없었던 '낭만적 이상주의'였다.

그의 죽음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의 죽음은 이승만의 극우 반공체제의 야만성과 보수야당의 보수성을 과소평가한 그의 낭만적 이상주의가 가져온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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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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