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백범이 후세에 남긴 교훈

[손호철의 발자국] 53. 서울 효창공원 : '최고의 국가비전'을 제시한 김구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휴관합니다.'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코로나19 방역단계가 높지 않으면 문을 여는 반면, 해방 후 김구가 머물렀고 1949년 6월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경교장은 코로나19 이후 계속 휴관중이다. 위치가 바로 병원(강북삼성병원) 한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구를 만나려면 효창공원으로 가야한다. 그곳에는 그의 기념관과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 병원 한 가운데 위치해 코로나19로 계속 휴관중인 경교장 ⓒ손호철

'역사바로세우기.' 백범김구기념관에 들어서 우리를 압도하는 김구의 거대한 동상 앞에 서자,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생각났다. 임기 초기 정치군인들의 모임인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으로 고공 행진하던 김영삼 정부는 1993년 말 우루과이 라운드를 계기로 개혁보다 국제경쟁력을 중요시하다가 내리막길을 걸어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이 같은 위기 타파를 위해 김영삼이 빼어든 카드가 전두환·노태우 구속과 '역사바로세우기'(완전히 바로 세우지는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이야기해 '역사 비스듬히 세우기')다. 이에 따라 이승만을 대신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김구다.

냉전적 보수세력이 이승만을 숭상한다면, 김영삼 정부를 시작으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등 흔히 민주화운동 세력이라고 부르는 '자유주의개혁 세력'이 해방정국에서 주목하는 이는 김구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김구는 줄곧 임시정부와 함께 했고 일제 말기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헌법에 명시된 임정의 법통을 대변한다. 둘째, 우파라는 것이다. 사실 김구는 여러 면에서 이승만과 같이 했다. 김구는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이고 우파다. 즉 '극우파' 이승만, '우파' 김구, '중도우파' 김규식, '중도좌파' 여운형, '좌파' 박헌영이 기본적인 해방정국의 흐름이다. 따라서 우리의 반공주의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박헌영, 여운형 등과 달리 별로 부담이 없다.

▲ 기념관에 들어서면 거대한 김구의 동상이 우리를 맞는다. ⓒ손호철

주목할 것은 김구가 우파임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우파'들은 그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보기에, 그는 충분히 '우파적'이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남한만의 선거는 분단을 영속화한다며 그가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치룬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한민국을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김구기념관에는 해주감옥으로부터 그가 암살당할 때까지 파란만장했던 김구의 생애를 잘 전시해 놓아 김구의 체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승만보다 1년 뒤인 1876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구는 동학운동에 뛰어들어 아기접주로 용맹을 떨쳤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동학 토벌대장이었고 안중근도 토벌대였는데, 안중근 아버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방황을 하다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투옥됐다. 이후 탈옥해 머리를 깎고 마곡사 등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환속했고 1911년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황해도 부자들의 돈을 털다가 체포되어 형을 살았다.

석방되자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그해 4월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20년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이 상하이에 오자 그를 처음 만나 경호 업무를 맡았다. 1931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이봉창 열사와 윤봉길 의사의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

▲ 일본장교를 죽인 죄로 김구가 갇혀 있었던 해주감옥의 사진이 백범김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백범김구기념관에는 임시정부 시절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이 속했던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 사진이 전시돼 있다. ⓒ손호철

1935년 김구는 이동녕 등과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일부가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를 해체하자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항했다. 1940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해 임정의 여당인 한국독립당(한독당)을 만들자, 김구는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1940년 김구와 임시정부는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으로 이주했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조직했고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됐다. 1945년 봄 광복군의 미국 정보부대인 OSS(CIA의 전신)와의 합동훈련을 승인했고 미국과 광복군 국내 진입 작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귀국을 추진했지만, 미군정은 미군정 이외에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물론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는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임시정부의 위상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지만, 임시정부와 운명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해온 '독립운동가로서의 김구'에 대해서는 별 시빗거리가 없다. 하지만 해방정국 '정치인으로 김구'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해방정국의 '정치인 김구'에 대한 평가는 1948년 5.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승만과 대비시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우리는 5.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상반된 태도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90%는 노선과 행동을 같이 해 온 '동지'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것은 못해"라고 정치인으로서 김구의 자질을 폄하했다. 김구 역시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라고 말하는 등, 서로를 비판적으로 봤고 경쟁적 관계였다.

하지만 둘 다 우파적 입장을 견지했고, 특히 해방정국의 가장 논쟁적인 쟁점인 신탁통치 문제에 있어서 둘은 함께 반탁 노선을 걸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앞의 '미군정' 편에서 이야기했듯이(<프레시안>, 2021년 7월 5일자 참조), 19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이 만난 카이로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처음 제시해 합의했다.

미·소가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한반도 문제를 놓고 1945년 12월 미국과 소련, 영국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들이 만난 3상회의를 열었다. 미국은 이전부터 주장해온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소련의 주장으로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합의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이다. 미군의 공식신문 <성조지(Stars and Stripes)>의 기사에 기초한 이 기사는 대표적인 '가짜 뉴스'로 해방정국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알려지고 <동아일보> 기사가 나오자,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국민총동원령을 내렸다. 일찍이 조선을 위임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임시정부 내에 강한 반발을 야기했고 다른 여러 문제까지 겹쳐 결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승만도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에서 연설하는 김구 사진이 백범김구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손호철

일제 36년만의 해방에 다시 신탁통치를 한다는 이야기에 분노하여 반탁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이 같은 분위기에 임정이 반탁운동을 통해 미군정을 접수하려는 '황당한' 계획을 세우자 합리적인 우파정치인인 송진우 한민당 수석총무는 미군정과 마찰을 피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이로 인해 그는 김구 지지자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도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반탁에 나섰다가 뒤늦게 그 내용을 전해 듣고 소련의 지령을 받은 뒤 찬탁으로 돌아서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좌파들이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소련 주도 신탁통치 반대=민족주의', '좌파=소련주도 신탁통치 찬성=매국적 소련의 주구'라는 공식이 생겨나고 말았다.

사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즉각적 독립을 원하는 국민적 정서에 반하고 '신탁통치'라는 용어가 주는 거부감 등이 있기는 하지만, 해방이 자력이 아니라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졌고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나름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즉각적인 '통일정부' 수립과 독립이 가능하겠는가? 사실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고 미소와 남북한이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 각각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하는데도 3년이 걸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당위적인 정의론에 기초한 김구의 감정적인 반탁운동과 노회한 이승만의 정치적 반탁운동, 그리고 <동아일보>의 가짜 뉴스와 결합해 해방정국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가고 말았다(물론 <동아일보>의 오보 사건이 없고 김구 등이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지 않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수용했다고 하더라도, 미·소가 각각 남북한에 우호적 정부를 세워 남북한을 지배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해방정국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주목할 것은 김구는 가장 치열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했지만, 그 운동의 열매는 결국 이승만이 따먹고 말았다는 점이다.

신탁통치 논쟁과 미군정의 친우파 정책으로,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됐지만, 이후 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나 5.10선거와 단독정부 문제도 '이승만=찬성', '김구=반대'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김구가 결과적으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단독정부 수립에 계속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이라고 반대했지만, 일주일 뒤인 11월 30일 이승만과 회동한 뒤에는 "독립정부 수립에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발표했고, 오후에는 제주 4.3 등 민간인 학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창립 1주년 행사에 이승만과 같이 참석했다.

다음날에는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초 그는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총선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1948년 2월 10일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주장했고, 그해 4월 북한으로 넘어가 남북연석회의(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구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김 회담'에 참석하는 등 분단 고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북한 주도의 회의에 실망해서 돌아왔다.

▲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려고 38선 앞에 선 김구. 백범김구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단독정부 수립과 5.10선거에 긍정적이었던 김구가 갑자기 반대로 입장을 바꾼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당시 한독당 관계자들의 장덕수 암살과 관련해 김구가 미군정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문제 해결에 이승만이 소극적인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추정에 불과하다. 사실 김구는 장덕수 이외에도 합리적인 우파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 긍정적이었던 송진우의 암살 등 해방정국의 여러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미군정 등에 의해 받아왔다. 이는 그가 독립운동 기간 동안 여러 테러 운동을 주도한 경력을 갖고 있었고 신탁통치 지지자들을 매국노로 비판하는 등 강력한 반탁운동을 이끌었으며 암살범들이 한독당원 등 그의 부하들이었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물증은 없다.

주목할 또 다른 사실은 1948년 5월 남한만의 선거가 치러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김구는 이승만과 협력을 도모했다는 점이다. 1949년 5월 19일 김구는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회동하는 등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재결합 움직임을 보였고, 다음 날에는 "본래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김(규식) 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이 없었던 것이므로 (…) 과거 우리들의 노력 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고 밝혔다.

▲ 1946년 민주의원 회의 후 손잡은 김구와 이승만. 백범김구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선생님, 안두희 소위가 찾아왔는데요."

"들어오라고 해라."

5분 뒤 서재에서 총소리가 났고 김구는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즉 김구가 이승만과의 화해 움직임을 보인 지 한 달 뒤인 1949년 6월 26일의 일이다. 이 역시 김구가 이승만과 화해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극우파의 손에 쓰려졌다는 점에서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일각에서는 미군정 정보참모부 실리 소령이 작성한 실리보고서를 토대로, 김구가 군부 내 반(反)이승만 세력과 손잡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며 김구의 암살이 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 역시 추정에 불과하다.

참고로, 안두희는 김구 암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을 받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군에 복귀해 장교로 근무하다 예편했다. 그를 보호하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김구 추종 세력에 의해 수차례 테러를 당하다가 1996년 김구를 존경하던 한 버스기사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국제정치의 현실을 무시한 당위론적이고 감정적인 반탁운동, 이승만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모호한 태도, 당연히 임시정부가 새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임정 법통론' 내지 지나친 '임정 중심주의', 송진우 등의 암살 개입 의혹 등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을 김구의 두 측면이다. 특히 이 두 측면이 모두 우리의 미래비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우선 '통일한국'이라는 비전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일관되게 반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단독정부=분단'이라는 생각에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파들은 김구가 이처럼 분단의 영속화를 이유로 5.10선거에 불참한 것은 공허한 이상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해 끝까지 분단에 저항했던 정치인으로서 '통일한국의 상징'으로 우뚝 서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김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국가 비전'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 구체적으로 '민주대통령'이라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도 김구와 같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20~30년 전도 아니고 무려 70여 년 전에 한 이야기지만, 백범의 '나의 소원'은 이후의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학자들, 그것도 '진보적 부국강병론'을 주장하는 '진보연' 하는 학자들보다도 더 뛰어나다. 백범김구기념관 뒤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라는 묘비가 세워진 김구의 묘지가 있다. 그 앞에서 긴 묵념을 드리며 속으로 '나의 소원'을 읊조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무력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니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가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인해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 효창공원 백범김구기념관 뒤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묘지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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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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