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 포고한 미군정에 아직도 고마워해야 하나?

[손호철의 발자국] 52. 서울 조선호텔 : 미군정은 '좋은 제국주의'였나?

"아니 우리나라에 미군정이 있었어?" 미군정 관사였던 조선호텔 앞에 서자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이 된 뒤에야 우리가 해방 후 미군정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충격을 받았던 생각이 나고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논쟁적인 현대사는 학교에서 아예 가르치지 않았고 나 자신은 고등학교 때까지 사회문제에 별 관심이 없어 이 같은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 해방 후 미군정 장교숙소가 있었던 조선호텔 ⓒ손호철

제 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 3조: 모든 사람은 즉시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아래 발표하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에 방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며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 1호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해방군'으로 행세했던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남한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이 포고령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군정법령집 ⓒ손호철

전후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은 신탁통치와 분단이라는 두 문제를 모두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1943년 3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앤서니 이든 영국 외상과의 만남에서 한국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고 카이로회담 준비모임에서도 신탁통치안을 강조했다.

그는 이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은 '적절한 시간에' 독립시킨다는 안, 따라서 '적절한 시간 이전'까지는 신탁통치를 한다는 신탁통치안을 제시했다. 처칠이 '적절한 시간'을 '적합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로 고쳐 신탁통치안을 의결했다(사실 위임통치를 제일 먼저 제안한 이는 이승만으로, 그는 1919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탄원했다가 신채호가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매국역적'이라고 비판하는 등 임시정부에서 강한 반발을 야기했고 결국 다른 문제들까지 겹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 DMZ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카이로회담 사진.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가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처음 제안했다. ⓒ손호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정국에서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가짜뉴스를 미군의 공식기관지인 '성조지', 그리고 미국의 통신사를 통해 퍼트렸고 이를 '동아일보'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이승만이 좌파들을 '소련의 주구'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한 중립적 연구가 보여주듯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구속자의 90%가 좌파일 정도로 좌파들이 민족주의운동을 주도했으나, 신탁통치 논쟁을 통해 우파=민족주의, 좌파=소련의 주구라는 엉뚱한 공식이 생겨났다.

▲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탁시위 사진 ⓒ손호철

분단도 미국이 제안한 것이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했고, 이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군정의 정치 자문이었던 베닝 호프가 잘 지적했듯이, 일제의 악랄한 수탈로 인해 해방 당시 "남한은 스파크만 일으키면 폭발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니 일본의 패망이 알려지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했고 미군정 도착 전인 1945년 9월 6일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성립을 선포했다.

한국 정치의 세계적 대가인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국혁명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국군의 점령이 없었으면, 인공이 수개월 내에 한반도를 지배했을 것이다."

소련의 목표가 북한에 친소 좌파정부를 세우는 것이듯이, 미국의 목표는 남한에 친미적인 우파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문제는 소련과 달리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 구체적으로 남한의 상황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1년 뒤인 1946년 8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중 자본주의를 지지한 사람은 14%에 불과한 반면에 70%는 사회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작해 있었던 '한국혁명'을 분쇄하고 자신들이 바라는 친미 우파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77%에 달하는 좌파지향적인 민중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친일 관료들, 특히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민중들을 수탈하던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미군정 고위 관료의 회고다.

"너희들이 기계를 이길 수는 없다. 기계란 마을 순사와 지주로부터 도지사에 이르는 권력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기계는 우리가 여기(남한-인용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발견한 그대로이다.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볼 때, 이는 이상적인 셋업이다. 그것은 군대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단추만 누르는 것이다. 그러면 경찰들이 대갈통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본 지배 하에서 35년간 이를 배웠다. 왜 우리가 이들이 아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미국은 단추만 눌렀고, 친일 경찰들은 일제하에서 배웠듯이 '민중들의 대갈통'을 부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인 미군정사는 이 문제를 정확히 서술하고 있다. "질서 있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이 한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했다."

▲ 1946년 10월 2일 미군정 하에서 대구 시민들이 시위(대구10월항쟁)를 벌이고 있다. 미국립문서기록청 자료

미국은 친일파 중용 이외에도 일제 소유이던 농지를 모두 자신들이 소유하고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으며 식량 정책에서도 실패했다. 그 결과, 1946년 미군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민중항쟁인 대구 10월항쟁을 시작으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추수봉기'가 일어났다. 미군정은 이를 친일 경찰 등을 동원해 진압하고 극우 세력이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주목할 것은 해방 후 맥아더가 이끈 두 개의 미군정 간의 차이이다. 즉 남한의 미군정과 일본 미군정의 차이다. 두 나라에서 친미적인 우익정권을 세운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내용적으로 기이한 역설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 전범국가인 일본에선 민중친화적인 '개혁'을 주도했다면, 정작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에는 민중억압적인 극우체제로 몰고 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군정은 일본에서는 일본이 다시 파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농지개혁, 재벌 해체, 노동조합 설치 등을 실시했다. 맥아더가 한국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 중에 하나가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일본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은 노동조합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 결과, 3만5000개의 노동조합이 생겨나 650만 명이 가입했고, 첫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해 첫 내각으로 사회당-민주당 연정이 출범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보통선거권을 주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을 제공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조선공산당과 같은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건준 같은 중도좌파 온건진보 세력도 공산주의 등으로 몰아 탄압하고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을 만들었다.

한 정치학자는 "일본민주주의는 미군정의 산물"이라고 썼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일본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일본민주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준 선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미국은 전범국인 일본에는 민주주의를, 전범국가의 피해자인 우리에게는 극우독재를 선물했다.

그 결과 우리는 미군정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극우정치에 의해 고통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 여파로 고통을 받고 있다. 나아가 미군정의 종식과 함께 떠났던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 날아와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받아 우리 군을 지배하고 우리 땅에 항구적으로 주둔하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 이승만, 김구를 만나고 있는 하지 미군정사령관 사진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아, 일본이 망하다니, 흑흑흑." 젊은 장준하는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친일파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다가 도주해 광복군에 합류한 민족투사로, 1945년 8월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국내에 진입해 한반도를 해방하는 군사작전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하지 못해 한반도의 미래가 걱정되어 일본 패망소식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일제는 지금은 복원된 광화문 자리에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었다. 1945년 9월 이곳에서 미군정과 일본 조선총독부 간의 항복조인식이 있었고 미군은 이를 중앙청(Capital Hall)이라고 부르며 청사로 사용했다. 정부수립 후 중앙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김영삼 정부가 일제의 유산을 없앤다며 폭파해 이제는 그 잔해들만 독립기념관 야외공원에 남아있다. 첨탑 등 그 잔해들을 보고 있자 문득 장준하가 생각났다. 맞다. 미소에 의한 분단과 미소군정 등 해방 후의 비극은 모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해방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미군정 사무실이 있었던 중앙청은 철거되어 일부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나는 충분히 제국주의자이다 (…) 나는 우리의 영향을 이 나라까지 확장함으로써 이 나라에 혜택을 줬다고 확신한다. (…) 우리의 제국주의는 나쁜 제국주의가 아니었다."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 장군이 미군정에 대해 한 자평이다. 제국주의이되 '나쁜 제국주의'는 아니었다? 그럼 '좋은 제국주의'란 말인가? 묘한 주장이다.

미군정이 좌파세력을 분쇄하지 않아 남한 민중의 의사대로 좌파정권이 들어섰다면 남한도 북한과 같이 한심한 길을 갔을 것인데, 자신과 미국이라는 '좋은 제국주의' 덕분에 한국이 자유와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한 마디로, 뉴라이트 극우파들이 주장이다. 이는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회적 현상을 과정의 정당성 등은 무시하고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결과론'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물론 현재의 우리 사회는 '헬조선' 등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비교하면 '천국'에 가깝다. 하지만 남한 민중이 자기의 길을 갔다면 북한식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우리에게 세습 등 봉건적인 왕정에 가까운 북한이냐, 아니면 황금만능과 헬조선의 남한사회냐는 양자택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중간의 선택치'가 있었다.

순수 가정으로,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현존 사회주의 비슷한 길을 갔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자주적 결정'이라는 문제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선택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진로를 대신 결정해 줄 수는 없다.

늙은 해적, 그래, 그놈들이 나를 훔쳤다 / 그놈들이 나를 끝없는 심연에서 꺼내자마자 / 나를 상선에 팔아넘겼다 / (중략) / 내가 가진 것은 자유의 노래뿐 / 이 자유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 내가 가진 것은 구원의 노래뿐이기에.

▲ '구원의 노래'가 실려있는 밥 말리의 앨범

백인 노예선에 의해 신대륙으로 잡혀온 조상들의 운명을 노래한 전설적인 아프리카계 레게 가수인 밥 말리의 '구원의 노래(Redemption Song)'다. 신대륙 아프리카계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1980년 짐바브웨 독립 1주년에 초청되어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천국'이 아니라 '또 다른 지옥'이었다. 아프리카의 민중들은 미국에서처럼 인종차별은 받지 않는지 모르지만 미국의 아프리카계보다 더 가난했고 자유도 더 없었다. 특히 표를 사지 못한 가난한 민중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밀려들면서 좌파정권이 폭력을 행사해 유혈사태로 연주회가 중단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화가 잘 보여주듯이 평균적으로 볼 때, 미국으로 잡혀간 노예들의 후손들은 잡혀가지 않은 아프리카인 후손들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의 아프리카계들이 결과론의 시각에서, 자신들을 노예로 잡아온 백인 노예상에게 '좋은 제국주의자'로 고마워해야 하는가? 미군정 덕분에 북한같이 되지 않았고 지금 같은 풍요와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의 아프리카계들이 백인 노예상 덕분에 아프리카인들처럼 살지 않고 그나마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세기 미국과 유럽이 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고 노예화할 때, 이들은 '미개한 원주민'들에게 기독교와 민주주의 등 서구의 문명을 전파하고 이들을 '문명화'하기 위해 백인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며 '백인의 책무(White Man’s Burden)'라는 인종주의적 주장을 폈다. 하지의 '좋은 제국주의론'은 정확히 이를 계승한 것이다.

하지 주한미군정사령관의 사무실이 있었던 반도호텔은 이제 롯데호텔로 변해 서슬 퍼렇던 자칭 '좋은 제국주의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앞에 서서 하지에게 물었다. "흔히들 영국은 스페인, 이후에는 일본 등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좋은 제국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왜 '좋은 제국주의'에서 독립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리며 독립전쟁을 했는가? 그리고 당신의 주장처럼, 미군정은 제국주의였지만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좋은 제국주의였는가?"

▲ 하지 사령관이 머물렀던 반도호텔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그 자리에 들어선 롯데호텔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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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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