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공화국연합제'를 다시 생각한다

[북한경제 '전환기' 읽기]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향하여...북한경제와 남한의 대북정책 (5)

에피소드 5. 북한의 '경제전환'과 대북정책

김대중 대통령은 1991년 9월 자신의 통일방안을 담은 <공화국연합제>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그의 보좌관이던 최성 박사(국회의원, 고양시 시장 역임)가 이 책의 초고를 필자에게 가져와 읽고 평가해달라고 했다. 최 박사가 단독으로 그런 행동을 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필자는 1988년 평화민주당(평민당)의 초청을 받아 현역 의원‧당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홍명 교수(당시 서강대학교 정치학과)와 함께 특강을 한 일이 있다. 당시 필자는 한양대학교 중소(中蘇)연구소 연구원이었다. 필자가 맡은 주제는 '한반도 주변정세'에 관한 것이었다. 김대중 총재는 특강에 참석해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다.

한반도 주변정세에 훤하던 그가 젊은 연구자의 강의를 경청하던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김 총재가 이때 필자를 기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기억 때문에 <공화국연합제> 초고를 필자에게 보냈을 수 있다. 다른 전문가들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했을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치밀함은 널리 알려져 온 바 있다. 어쩌면 최 박사와 필자의 친분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공화국연합제> 초고를 보았던 당시 필자는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편집국 기자 겸직)로 직장을 옮긴 뒤였다. 필자는 최 박사에게 이 책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다. 한반도평화와 통일에 관한 한 김 대통령의 식견은 정평이 나 있었는데 필자가 천지분간을 못한 채 건방지게 행동했던 것이다. 겸손을 몸에 익히지 못한 때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로부터 10년 만인 2000년에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평화통일의 이정표인 6.15공동선언에 서명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선언에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구절이 포함됐다.

남북의 정상이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중앙일보 북한문제 전문기자로서 해설기사를 쓰던 필자는 마음 속 깊숙이 감격과 부끄러움이 밀려옴을 주체할 수 없었다.

6.15공동선언에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였다"는 합의도 있었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은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계승한 것이었다. 필자에게 6.15공동선언은 '마음의 등불'이 되었다.

남북한은 1972년 7.4공동성명에서 "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명시했다.

1992년 2월 19일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 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내부교류로서의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합의는 표현은 좀 달라도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지향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남북정상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에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이로써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향한 '희망의 촛불'은 꺼지지 않을 수 있었다.

10.4선언에는 경제공동체를 향한 여러 합의가 담겨 있었다. △경제협력을 위한 투자 장려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의 적극 추진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의 우선적 부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개성공업지구 1단계 건설의 신속한 완공 및 2단계 개발 착수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수송 시작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조치들의 조속한 완비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의 공동 이용을 위한 개보수 문제의 협의‧추진 △안변‧남포의 조선협력단지 건설 등이 합의한 과제들이다. 이것을 실천하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계단을 하나씩 오를 터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서명한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나갈 것을 합의했다.

두 지도자는 9.19 평양선언에서 "상호호혜와 공리공영의 바탕위에서 교류와 협력을 더욱 증대시키고,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들을 강구해나가기로 하였다." 이처럼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일-김정은 위원장 간에는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관한 합의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 감동의 기억과 실낱같은 희망을 살려나가야 한다.

▲ 지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북한경제의 '전환기'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필요로 한다. 북한은 5개년계획에서 국가적‧계획적‧과학적 자력갱생을 내걸고 정비전략‧보강전략과 정리정돈‧재편성에 의한 자력으로 경제성장과 인민생활 향상으로 나아가겠다고 천명했다.

남북경협이 재개되면 사안별로 북한경제에 힘이 될 수 있다. 북한은 북미관계 개선의 큰 그림, 즉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을 포기시키는 근본과업을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남한이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의 틀을 넘지 못하는 것을 체험했다. 한미동맹의 틀과 국제사회의 합의에 묶여 있는 남한에게서 자율적 선택의 한계를 보았던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대북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자국이 '사회주의강국'으로 발전하는 터닝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는 듯하다.

북한경제의 '전환기'가 대북정책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2035년까지의 장기 대응책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5년은 남한의 대통령이 여러 차례 바뀌는 긴 기간이다.

북한은 1민족 1국가 2제도(체제)의 연방제 통일론을 지켜왔다. 남북합의에서 유추해보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남측의 '연합제'안의 공통성에 기초한 통일에 관심을 보였지만 북한은 1국가론에서 변화를 보인 적이 없었다. 남한에서는 '국가연합'(2국가론)이 대세는 이루는 가운데 '남북연합'(1국가론)이 혼용되어 왔다. 남한에서 통일에 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제 하나의 가설(假說)을 생각해볼 수 있다. 북한이 '국가연합'을 반대해온 기존의 입장(1민족 1연방국가 2제도에 의한 통일)에서 현실적인 입장(1민족 2국가연합 2제도에 의한 통일)으로 유연해질 수 있다는 가설이다.

'자본주의경제강국'인 대한민국과 '사회주의강국'을 추구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기 국가와 제도를 포기하지 않을 태세라는 점이 이 가설의 기본전제다.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에게 사상‧제도뿐 아니라 국가영역의 이해(利害)를 강제할 수 없는 국면이라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의 민족 안에 두개의 국가‧제도가 공존하면서 '느슨한 연합연방의 통일'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는 날이 올 수 있다. '1민족 1국가 2제도'의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로 '1민족 2국가 2제도'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가설은 김 위원장이 제10차 청년동맹에 보낸 서한의 '숨은 그림'에서 연유한다. 사회주의강국에 이르는 기간을 15년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2007년의 전국지식인대회에서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설정한 것에서는 조급증과 함께 이상주의가 느껴졌던데 비해 2035년의 '사회주의강국 일떠세우기'는 시간적 여유로움과 함께 현실주의가 묻어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에 65세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1년에 39세(1982년생 기준)이다. '미래의 시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만하다.

남한의 대북정책은 이 '숨은 그림'을 고려해야 한다. 김 위원장의 꿈대로 '전체 인민이 행복을 누리는 융성 번영하는 사회주의강국의 일떠세우기'가 2035년까지 실현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우리는 이 기간에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나설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경제공동체의 길은 멀어질 수 있다. 북한이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강국 일떠세우기'에 성공한다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가제일주의'가 심화될 수 있다.

1민족 1국가 1체제(제도)를 지향하는 통일 주장은 2035년 이후 남한 내에서 기세가 꺾일 전망이다. '흡수통일' 등의 제도 통일에 미련을 가지는 정치세력이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될 가능성이 크다.

남한은 세계 6위의 군사대국이다. 북한은 핵억지력과 핵보복타격능력을 갖고 있고 장거리미사일과 초대형방사포 같은 다양한 첨단병기를 갖추고 있다. 남북 쌍방은 무력 등에 의한 제도 통일이 불가능한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길을 가야 한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의 시대정신에 따라 경제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실효성 있는' 통일의 길이다. 정치‧문화공동체는 경제‧평화공동체에 뒤따라 올 것이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향한 노력은 정치적 갈등과 군사적 적대행위를 줄여줄 것이다. 이것은 평화의 길, 통일의 길을 촉진할 것이다.

짐 로저스는 <대전환의 시대>에서 세계적인 '쇄국' 경향성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쇄국 경향성은 수십 년간 계속될 수 있다. 한반도의 경제적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온 로저스는 "38선을 열어 사람‧물건‧돈을 자유로이 이동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의 충고는 흥미롭지만 남북의 현실은 그와 거리가 있다.

남북한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과정을 통해 하나의 경제공동체로서 '새로운 개국'을 준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남북 경제협력과 교류에 관한 합의는 이미 풍성하다. 한 계단씩 올라가는 실행이 중요하다. 경제공동체는 평화공동체의 안정적 토대를 구축해줄 것이다. 북한경제의 '전환기'는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다. 진실을 외면하면 종착점은 점점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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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구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해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중소(中蘇)연구소 연구원, 중앙일보 북한문제 전문기자, 월간 <민족21> 편집기획위원, 사단법인 현대사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저서로 <김정은의 경제발전전략>,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 남의 조직사건과 북의 대남사업>, <박병엽 증언록 1- 조선민주주의인미공화국의 탄생>(공저), <박병엽 증언록2-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스즈키 마사유키 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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