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앞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더듬다

[손호철의 발자국] 49. 경기도 마석 : "한국 민주화운동을 보려면 이곳에 오라"

한국 민주화운동을 보기 위해 딱 한 군데만 방문한다면, 어디를 가야할까?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장 처절한 민주화 투쟁이었던, '한국 민주화운동의 최고봉' 5‧18 광주민중항쟁의 묘역이다. 그러나 이는 5‧18이라는 한 사건에 국한된다는 한계가 있다. 수유리에 있는 4‧19 혁명 묘역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이 역시 종전 후 민주화운동의 첫 단추라는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4‧19라는 한 사건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어디인가? 나는 남양주에 있는 마석 모란공원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시기적으로는 1960년대로부터 현재까지, 분야별로는 정치인들로부터 노동운동가, 빈민운동가, 농민운동가, 통일운동가, 여성운동가, 장애인 등 모든 분야의 투사, 열사 150여 명이 모여 있다. 게다가 4‧19 묘역 등처럼 정부가 위로부터 만든 국립묘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열사들이 피로써 싸워 만든 민중들의 민주민족열사 희생자 묘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유별나다.

▲ 모란공원 민주묘역 입구에 있는 민주열사 추모비 ⓒ손호철

한국 민주화운동은 그 지속성이나 강도 등에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하다. 해방 8년사가 마무리된 1953년 종전 이후를 보더라도, 4‧19 혁명을 시작으로 1960~1970년대의 민주화 투쟁을 거쳐 1980년 광주 민중항쟁, 그리고 1980년대의 진보운동의 부활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후에도 촛불항쟁 등으로 박근혜를 몰아내는 등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민주화운동이 투쟁 방식이라는 면에서 갖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비폭력성, 나아가 분신과 같은 '자기폭력'이다. 즉 다른 제3세계 민주화운동의 경우 테러나 무장투쟁 같은 폭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 분단이란 극단적 조건 하에서 우리 운동이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의존한 것이 바로 분신과 같은 자기폭력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민주화를 위해 분신, 투신 등 자기 자신의 생명을 던진 열사들이 많은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 모란공원 민주묘역의 모습 ⓒ손호철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3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살인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렀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분신투쟁이 시작됐다.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이로부터 18년이 지난 1988년 6월, 숭실대 학생 박래전은 1987년 6‧29선언이라는 노태우의 사기극과 정치적 욕심에 사로잡힌 양김(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87년 대선에서 군부가 승리하자 87년 6월 항쟁이 물거품으로 끝나는 것을 우려해 학우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분신을 했다.

"한미FTA 중단하라!" 노동자 허세욱은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한미 FTA, 이에 따른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심화에 반대해 분신했다. 이 세 명은 모두 모란공원에 묻혀있다.

▲ 초기에 이곳에 묻힌 전태일 열사의 묘 ⓒ손호철

1966년 국내 최초로 조성된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이 민주공원이 된 것은 1969년 경제학자로 육사교관까지 했던 권재혁 씨가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조작 간첩사건(2014년 무죄판결을 받았다)으로 사형을 당한 뒤 1969년 이곳에 묻히고, 1년 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묻히면서부터다. 이후에도 1971년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사대에 폭행당해 사망한 김진수, 1973년 서울법대 교수로 간첩단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를 당한 최종길 씨가 묻혔다.

그러나 이는 개별적 매장이었다면, 모란공원이 민족민주공원으로 부상한 것은 1986년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한 박영진 열사를 평소 존경했던 전태일 열사 옆에 묻으려는 것을 전두환정부가 저지하면서부터다. 노동자 등은 한 달간 30여 명이 구속되면서도 끝까지 투쟁해 박영진 열사 매장을 관철시켰다. 이 사건 후 다양한 민주투사들이 자발적으로 이리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 모란을 민족민주공원으로 만든 박영진 열사의 묘 ⓒ손호철

'민족민주 열사·희생자 묘역'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는 분신 등 적극적인 투쟁으로 스스로를 던진 열사로부터 공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희생당한 희생자, 병환 등으로 타계한 민주투사 등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묻혀있다. 구체적으로, 분신(전태일, 허세욱, 박래전), 고문사(최종길), 구사대 폭행사(김진수), 옥사(이재문), 사형(권재혁, 신향식), 산재(김용균), 병사 등 다양하다.

분야별로도 다양하다. 제도 정치권의 경우 1970~1980년대 청년들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후 민주당이란 자유주의적 개혁정당에서 활약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1987년 민주화 이후 부활한 진보정당 운동의 핵심으로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유명한 노회찬 정의당 전 의원 등이 우리를 맞는다.

▲ 한 방문객이 진보정당 운동의 상징이었던 노회찬 의원의 묘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손호철

비합법 투쟁의 경우 더 많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1969년 사형당한 권재혁으로부터 박정희의 인혁당 재건위 사형에 분노해 만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핵심 3총사가 모두 여기 묻혀있다. 김근태의 고문으로 잘 알려진 이근안에 의한 지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1981년 옥사한 이재문,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 형을 살고나와 2005년까지 장수했던 김병권 씨가 그들이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시작하여 1960~1970년대 민주화투쟁을 주도했던 1세대 민주투사 계훈제 씨를 비롯하여, 민청학련 사건 당시 사형구형을 받고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답해 두고두고 회자됐던 김병곤, 전태일의 어머니로 노동운동의 대모 역할을 했던 이소선, 탁월한 인권변호사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의 롤모델이었던 조영래 변호사, 동아투위의 명장으로 언론민주화운동의 큰 어른이었던 성유보,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의 거목인 문동환 목사와 홍근수 목사 등 모란공원에 잠든 이들의 명단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 그 자체다.

이밖에도 한국 교수민주화운동의 역사인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만들고 주도해온 한국 민주화운동의 최고의 덕장 김진균 교수,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북한을 정부의 허가 없이 방문하는 등 통일운동을 이끌었던 문익환 목사 부부도 이곳에 누워있다.

이곳에는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어봤어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민주의 꽃'들이 많이 누워있다. 전국여성노조 인천지부 사무국장으로 비정규직 여성들을 위해 싸우다 간 '영원한 여성노동자의 벗' 김미영(39). 진보신당과 노동당의 대변인을 지낸 박은지(35), 코엑스노조위원장으로 구조조정에 싸우다 2017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아름다운 노동자' 서명식(45), 공무원 노조운동을 하다 쓰러진 '민중의 공무원' 김원근(45), 노무현 정부 때 레미콘 노동자 등 특수고용직의 노동자성을 인정해 달라고 투쟁하다가 파업 대체 차량에 치어 죽은, '온몸으로 비정규직을 감싸 안은 노동열사' 김태환(39), 태안발전소에서 산재로 갈갈이 찢겨 목숨을 잃은 '청년노동자' 김용균(24) 등이다.

가슴 아픈 것은 이곳에 묻힌 사람들 가운데에는 장수한 사람도 있지만 30~40대가 대부분이고 전태일(22)이나 김용균(24)처럼 20대도 있다는 사실이다. 태극기부대 등이 "문재인은 북한 간첩이다", "빨갱이 때려잡으라"고 외치는 표현의 자유까지를 포함하여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바로 민주화운동이 앗아간 이들의 젊음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많은 묘비 중 유독 눈에 띄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코뮤니스트 혁명가 남궁원(1967~2013)'의 묘비다.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반공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감히 '코뮤니스트'라는 묘비명을 걸 수 있는 그의 용기와 삶에 존경을 보냈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 등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 이곳에 누어있는 민주투사들 덕분에 이 같은 묘비를 공개적으로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는 민주화가 됐구나 하는 뿌듯함이 들었다.

▲ 당당히 코뮤니스트 혁명가라고 써놓은 남궁원 씨의 묘비 ⓒ손호철

다른 하나는, 묘역 바로 입구에 있는 것으로, 중증장애인으로 장애인의 자립정책을 요구하며 2010년 12월 한겨울에 국가인권위 점거농성 중 인권위의 난방을 끊는 반인권적 조치로 폐렴에 걸려 사망한 우동근 열사의 유언이다.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 맞다. 민주화운동은 혼자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좀 늦더라도 함께 가야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대로, '더불어 숲'이 되어야 한다.

모란공원의 나지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민주묘역을 내려다보자 문득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 생각났다. 잘 모르는 분들이 많겠지만,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이천 인터체인지 근처를 지나가면 커다란 문이 눈에 뜨인다.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문이다. '사설 공원묘지'이지만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긴 투쟁을 통해 그 권위를 획득한 모란공원 민주묘역과 달리, 이 공원은 정부가 조성한 '국립 민주묘역'이다. 정부는 2008년 논의를 시작해 566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2016년 이 공원을 완성했다.

▲ 이천에 세워진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손호철

민주화기념관에 들어가면 민주화에 대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고 묘역에 가면 서도원 등 박정희 정권의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로부터, 1980년대 반미운동 초기 '양키용병 군사훈련 반대'를 외치고 분신한 서울대 김세진 열사, 1991년 공안정국에서 시위 중 백골대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명지대 학생 강경대 등 '민주화유공자'(정부에 의해 인정된)들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공원은 사실상 민주화운동 진영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그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고 황량하게 버려져 있는 기분이다. 정부가 이곳에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세운 것은 경쟁 입찰에 이천시와 광주가 응모하면서 이중 이천이 선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 5‧18 묘역을 역사성을 가진 구묘역을 놔두고 새로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묘역은 역사성을 갖지 못해 최소한 지금까지는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민주화기념관은 제한된 공간에 우리의 민주화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사진으로 잘 정리해 보여준 탁월한 전시라는 점에서, 이 같이 뛰어난 전시가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차라리 역사성을 가진 모란공원을 살려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모란공원을 떠나려고 묘역 입구로 나가자 1997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가 쓴 글이 눈에 띄었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 이루고자 했던 청춘들 누웠나니 /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후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모란공원 답사를 끝내고 초고를 마감하고 난 뒤인 올해 2월 '민주운동의 애국가'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인 '영원한 재야' 백기완 선생이 안타깝게도 모란공원에 합류했다. 마지막까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복직과 중대재해법 제정 등을 위해 애쓴 이 '민중운동의 총사령관'은 이제 전태일 열사 바로 옆에 누워 '노나메기 세상("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 전태일 열사 바로 옆에 영원한 재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올해 초 묻히고 말았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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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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