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아픔' 실향민, 이제 반공주의가 놓아주어야 할 때

[손호철의 발자국] 47. 임진각 : 대한민국은 실향민이 세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 의지 할 곳 없는 이 몸 /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 못다 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근 40년 전 설운도를 국민가수로 만들어주고 KBS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르게 만들어준 '잃어버린 삼십년'이란 노래다. 구체적으로, 이 노래는 1983년 6월 30일부터 생방송으로 방영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주제곡으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서울에서 북으로 60킬로미터를 달려 비무장지대와 북한 땅이 코앞인 임진각에 도착하면 '망향의 노래비'가 나타난다. 그 앞에 서면 노래비에 새겨진 이 노래 가사가 우리를 맞는다. 노래비에 부착해 놓은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 사진 등 기록물들을 보고 조금 걸어가면 '망배단(望拜壇)'이란 커다란 제단이 나타난다.

▲ 실향민을 상징하는 임진각 ⓒ손호철
▲ 실향민들이 북한의 고향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망배단 ⓒ손호철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은 설날이나 추석, 부모님 제삿날 등에 북한에서 가깝고 북한을 볼 수 있는 이곳에 임시제단을 만들어 경모행사를 했다. 이들을 위해 1985년 전두환 정부가 웅장한 상설제단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후 명절날에는 언제나 이곳에서 차례를 지내는 실향민들의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는 등 이곳은 분단과 실향민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고향을 떠나온 지 70년 이상이 되는 실향민들은 이후 고향에 돌아가보지 못 하고 부모님, 형제, 부부, 자녀, 친지 등을 만나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향민은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도 분단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의 하나다(1945년 분단과 함께 5살 때 넘어온 사람은 76년이 흘러 이미 80대이며, 1951년 1‧4 후퇴 때 내려왔어도 70년이 흘러 70대 후반이다).

이산가족 문제는 1971년 대한적십자사가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했고 이후 전두환 정권이 1983년 KBS를 통해 대대적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한 뒤 1985년 처음으로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속에서 2000년 광복절을 맞아 처음으로 월남실향민들이 북한을 방문해 이산가족과 상봉했으며 이후 마지막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2018년 8월까지 모두 21차례의 이산가족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이루어졌다.

▲ 1983년 최장시간(138일) 생방송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

"민중은 발로 투표한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 10월 혁명의 아버지인 레닌은 차르의 지시에 의해 1차 대전에 참전한 농민과 노동자 병사들이 대규모로 탈영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처럼 주장했다. 이후 인구의 이동은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지표로 사용되어 왔다. 민초들은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체제를 찾아가, 발로 투표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벽을 세워 쟁점이 됐지만, 목숨을 걸고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는 반면, 미국에서 멕시코로 밀입국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월남민이라는 실향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순히 고향을 떠나 낯선 남쪽 땅에 내려와 분단 때문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넘어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증거로, 나아가 우리 반공주의의 확실한 기반으로 작동해 왔다. 월남실향민 문제의 핵심에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몇 명이나 되는가, 그리고 반대로 북한체제를 선호해 월북한 월북자들은 얼마나 되는가하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이 언제, 왜 월남했는가도 쟁점이 되고 있다.

"500만 명 대 1만 명." 첫 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2000년, 전 이북5도민연합회 회장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월남자 수와 월북자 수에 대해 한 이야기이다. 즉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은 500만 명인 반면 북으로 넘어간 월북자는 1만 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민초들은 발로써 압도적으로 남쪽을 택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통계에 기초해 정부는 남으로 내려와 태어난 2, 3세대를 포함해 월남실향민을 800만으로 보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북한의 인구가 1000만 명이 안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북한인구의 2명 중 한 명 이상이 월남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추적해온 인구학자인 권태환 교수는 분단 후 한국전쟁 전에 74만, 전쟁 중 65만 등 139만 명이 내려왔고, 29만 명이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강정구 교수는 이 같은 평가는 남한 출신으로 북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포함한 것으로, 이들을 제외한 순수한 월남민은 85만 명, 월북민은 30-4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언제 월남했는가'도 쟁점이다. 이 문제는 '왜 월남했느냐'는 월남의 동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945년 분단 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전 사이에 내려온 사람들은 거의 친일파, 지주 등 지배계급이거나 기독교도로 북한체제의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북한체제가 싫어 월남한 '자발적 이주'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월남한 사람들은 미국의 원폭 투하설이나 미국의 폭격을 피해 내려오거나, 군에 징발되거나, 군의 소개 작전에 의해 내려오는 등 비자발적 월남도 많고 동기가 훨씬 복합적이다. 계급적으로도 1차 월남과 달리 지배계급보다는 기층민중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유엔군이 북진해 압록강까지 전진한 뒤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중국군에 밀려 1950년 12월 14~24일까지 실시한 흥남철수작전이다. 이때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들이 미군 상륙선을 타고 월남해 부산으로 도착한 바, 그 중 한명이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들이었다. 서해에 가까운 임진각에서 250킬로미터를 달려 한반도의 반대쪽인 동해에 도착하면 속초의 바닷가에 '아바이 마을'이라는 실향촌이 있다. 이곳에 정착한 이들 역시 1951년 1‧4 후퇴 때 함경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 2차 실향민들을 만들어낸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에 대한 자료가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실향민들의 정착촌인 속초의 아바이 마을 ⓒ손호철

실향민단체 등은 이에 대해 한국전쟁 전에 내려온 인원이 350만 명, 한국전쟁 후, 즉 중국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할 때 같이 내려온 월남민이 160만 명 정도로 7대 3 비율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한 김귀옥 교수 등은 그 비율이 4대 6 내지 3대 7로 한국전쟁 중에 전쟁을 피해 내려온 사람이 훨씬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월북한 사람보다 월남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안 정부와 실향민단체 등이 주장해 온 월남자 수는 굉장히 과장되어 있다. 월남 동기도 단순히 반공주의 때문이거나, 북한보다 대한민국 체제를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월남민들은 우리 사회가 '병적인 반공주의'로 나가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고, 그리고 극우 정권들이 월남민들의 존재를 반공주의 강화에 이용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좌파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월남한 지주계급들과 기독교도 등 1차 월남민은 월남 후 공산주의에 대한 복수심에서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청년조직을 만들어 제주도의 4‧3항쟁과 관련해,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등 우리 사회에 극우 반공체제가 자리 잡는데 앞장섰다.

1952년 5월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겁박해 개헌을 추진했던 부산 정치파동 때도 이들은 부산 피난민 총궐기대회를 열어 국회를 공격하고 이승만을 지원하는 관제데모를 열었다. 다음과 같은 한 뉴라이트 잡지 편집장의 글이 이를 잘 요약해보여주고 있다.

"월남민들 중 일부는 서북청년단을 결성하여 좌익의 준동을 막아냈고, 여수순천 반란사건 당시 군내의 좌익 군인들이 숙청된 빈자리를 젊은 월남민들이 들어가 메워주었다. (…)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대한민국은 사실상 탈북민(월남자)이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6.25 남침 때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국군의 지휘부는 거의가 북한 출신 월남자들이었다. (…) 공산당이 싫어 월남한 북한 출신 기독교인들은 남한에 정착하여 기독교를 더욱 확산시켰다. 때문에 남한의 기독교화는 남한의 반공민주화와 궤를 같이 한다. (…)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다섯 개 중 네 개가 한국에 있는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나 창설자들이 다 월남자들이다."

▲ 부산 정치파동 당시 북한 피난민들이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총궐기대회를 열고 있는 사진이 부산임시정부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다만 '월남민=반공주의'라는 스테레오타입을 갖는 것은 잘못이다. 치열한 민주투사이자 민중운동의 큰 어른인 백기완 선생, 한국 진보신학의 대부인 김재준 목사로부터 김관석, 안병무, 가톨릭민주화운동의 대부인 지학순 대주교 등이 다 월남 실향민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월남민 2세다.

최근 들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1차 월남(한국전쟁 전), 2차 월남(한국전쟁 중)에 이은 '3차 월남'이다. 이는 소련 동구 몰락 이후 생겨난 북한의 경제위기 등과 관련된 '탈북자들'이다. 2017년 말 현재 3만1000 명 수준이다. 2009년 2914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으나 연평균 10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 2차 월남민들이 이미 80대에 들어 사라져가고 있고 그 2, 3세에 가족적 전통이 전해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이미 '통합되어' 있다면, 3차 월남인 탈북자들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중요한 문제다.

망배단을 지나 임진강으로 걸어가면, 파괴된 임진강 철교와 녹슨 경의선 기차가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해안초소 뒤로 멀리 20여 년 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1000마리를 실고 건너갔고 개성공단의 통행로였던 통일의 다리가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남북 간의 차가운 관계를 상징하는 듯 아무런 왕래 없이 적막 속에 싸여 있다. '통일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수명이 다해가는 탈북자 1세 등이 인도주의적 관점에 고향을 방문하고 이산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은 빨리 와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임진각을 떠났다.

▲ 임진각 옆에는 부서진 경의선 철교가 눈길을 끈다. ⓒ손호철
▲ 임진각에서 바라본 통일대교. 북한과 이어지는 다리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소떼를 몰고 이 다리를 건너 북한으로 넘어갔고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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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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