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군사적 대치와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군사적 긴장완화가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의 군수산업을 다루는 일은 조심스럽다. 군수산업이 민수경제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더욱 조심스럽다. 북한의 군수산업과 민수경제의 협력에 대한 '분석'이 '합리화'로 비쳐지면 곤란하다. 그 취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어려움이 있지만 '전환기' 북한경제를 다루면서 이 상황을 비켜갈 수는 없다.
북한 군수산업의 구조조정이 예견된다고 해서 북한이 군사력을 약화시킨다고 오해하지는 않으면 좋을 것 같다. '첨단 전략무기 생산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재래식 병기 생산체계'에 대한 구조 조정의 가능성은 있다.
북한의 군수산업과 민수산업이 결합되는 여러 동향은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남북의 군사적 대결이 완화되는 국면이 되면 이 경향은 강화될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있어 아직 그 결과물이 많지 않고 북한의 보도에서도 상세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범위에서 그 동향과 향방을 여러 각도에서 4회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북한의 군수산업은 베일에 싸여 있다.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4차 회의에서 발표된 <국가예산보고>에 따르면, 2020년 '국방건설사업'에 국가예산지출의 15.9%가 투입됐다. 2021년에도 '국가방위력의 지속적 강화'에 국가예산지출의 15.9%를 배정하고 있다. 북한이 예전에 국가예산지출의 12~15%를 군사비로 지출한 데 비하면 늘어난 것이다.
북한의 실제 군사비는 이보다 클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군사비 지출에 관한 오랜 가설은 국가예산의 25~30% 정도라는 것이었다. 12~15%를 초과하는 군사비 지출은 다른 예산에 은닉되어 있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것은 추정이다.
북한 경제는 내각이 관할하는 민수경제와 제2경제위원회가 관할하는 군수경제로 이원화되어 있다. 제2경제위원회는 국무위원회 산하의 국방성이나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와 분리되어 있다. 군수산업의 규모와 실태에 대해서는 접근 자체가 어렵다.
사정이 이러한데 군수산업이 민수경제의 발전을 어떻게 견인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안개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안개 속에도 틈새는 있는 법이니 그 속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제8차 당대회에서 언급된 첨단병기
북한의 군수산업은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초대형방사포 등의 시험 발사과정에서 그 실력이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다. 핵실험과 미사일 등의 시험발사는 지난 15년간 되풀이됐다. 북한은 지난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개발이 완성됐거나 진행 중인 첨단병기를 공개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거론된 첨단병기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핵무기를 비롯해 다양한 전략‧전술무기의 목록은 북한의 군수산업의 현 단계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군수산업에 투입된 자금‧설비‧원자재와 과학기술인력의 산물이다. 김 위원장은 <사업총화보고>에서 향후 5년간 "국방공업을 비약적으로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중핵적인 구상과 중대한 전략적 과업들"을 밝혔다. 그 구상과 과업은 다음과 같다.
핵무기와 ICBM, 핵잠수함과 SLBM, 군사정찰위성과 무인정찰기 등의 첨단병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군수산업을 더욱 첨단화하겠다는 것이다. 국내외 군사전문가들과 군수산업 전문가들은 북한 첨단병기의 세부 검토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첨단병기를 세부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군수산업이 민수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북한의 첨단병기 개발 실태를 열거한 것은 군수산업의 목표와 국방과학부문의 기본과업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첨단화‧정예화 군대, 무장장비의 지능화‧정밀화‧무인화의 해석
북한은 '재래식 군대의 첨단화‧정예화 군대'로의 비약적 발전과 '무장장비의 지능화‧정밀화‧무인화‧고성능화‧경량화' 실현에 주력하겠다는 의사를 갖고 있다. 그 속의 숨은 뜻은 군대의 성격을 탈바꿈하겠다는 것이다.
군대 성격의 탈바꿈은 정규군 128만 명의 병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제대군인 숫자를 급격히 늘리거나 제대시키지는 않고 군 소속으로 둔 채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병력이 줄어들면 각종 군사자원이 줄어들고 비(非)생산인구가 줄어든다. 그 파고(波高)는 민수경제로 밀려들 것이다.
김 위원장은 <사업총화보고>에서 지난 시기(2016~20년)에 "당의 영도 밑에 인민군대는 조국보위와 사회주의건설의 두 전선에서 위훈과 기적을 떨치며 자기의 혁명적 본분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지적했다. 군대가 사회주의건설, 즉 민수경제에서 '혁명적 본분'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회주의건설이라고 할 때의 '건설'은 '경제 전반의 생산 증대와 확대재생산'을 위한 활동을 의미한다. 군대가 '건설'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군대의 '경제건설' 역할론
김 위원장은 제7차 당대회(2016년 5월)에서 "인민군대는 사회주의강국 건설의 주력군, 돌격대의 위력을 계속 높이 떨쳐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그는 2016년 3월의 한 담화에서 "우리는 주체적 국방공업을 강화하여 강위력한 국방력, 전쟁억제력으로 적들이 무릎을 꿇게 하고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여야 하며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투쟁에 자금과 노력을 집중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편으로 주체적 국방공업의 강화를, 다른 한편으로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투쟁을 강조했던 것이다. 후자와 관련해 '자금과 노동력을 집중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마련'을 지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유리한 조건 마련'은 정세 완화를 위한 주동적인 노력, 또는 민수경제에의 배분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원배분의 측면에서 통상 군대와 민간은 경합관계에 있다.
김 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군수공업부문에서는 조선반도의 평화를 무력으로 믿음직하게 담보할 수 있게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를 다그쳐 나라의 방위력을 세계 선진국가 수준으로 계속 향상시키면서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수공업부문을 '경제건설의 적극 지원'의 주체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는 2019년 2월 건군절 축하연설에서는 "인민군대에서는 《조국보위도 사회주의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라는 구호를 계속 추켜들고 당이 부르는 사회주의강국 건설의 전구(戰區)마다에서 인민군대 특유의 투쟁본때, 창조본때를 높이 발휘함으로써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 수행의 관건적인 해인 올해에 인민군대가 한몫 단단히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군수공업부문의 '경제건설' 역할론의 연장선에서 '5개년전략 수행'에서의 군대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김정은 집권기의 전략적 노선에 따른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2년에 선군시대 경제건설노선을 제기하면서 '국방공업 우선발전, 농업‧경공업 동시발전'을 내걸었다. 국방공업의 발전을 앞세움으로써 그에 따라 중공업이 발전하고 연쇄적으로 농업‧경공업이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김정은 집권기의 초반인 2013년 당중앙위원회 3월전원회의에서 채택된 전략적 노선은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이었다. 이 노선에는 핵무력건설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경제건설에 집중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2016년 5월의 제7차 당대회에서는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이 유지되었다. 북한은 2018년 4월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 총력집중노선'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군수산업이 민수경제의 발전을 견인하는 길이 넓어졌다. 군수-민수경제의 결합과 국방공업 능력의 민수 전환이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정세가 안정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과거의 군수-민수산업의 협력 움직임
북한에서 군수-민수경제의 협력의 움직임은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 선군시대 경제건설노선에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제2경제위원회와 국방성은 무기생산과 모든 군수물자(생활필수품‧식량‧식음료‧의류‧내구성소비재 등)를 생산하는 단위(공장‧농장)들을 운영하고 있다. 민수산업의 주요 공장‧기업소에 군수단위(일용분공장‧일용직장의 명칭 사용)들을 두고 있다.
군수-민수경제의 협력이 본격화되면서 민수경제의 군수단위가 제2경제위원회의 통제를 받던 기존 구조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군수산업이 민수산업에 대한 지원 시스템으로 변화되는 움직임이 확대되었다.
군수산업과 민수산업 간의 협력은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다. 군수산업 산하의 정밀기계공장에서 생산한 CNC(컴퓨터수치제어)공작기계는 각종 공장들의 설비 갱신에 도움을 주었다. 국방과학의 첨단과학기술은 민수산업의 현대화‧정보화‧자동화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대의 산업역량이 민간의 건설업‧수산업‧축산업 등 인민생활과 밀접한 분야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군수-민수경제의 결합에서 2009년은 중요한 해다. 북한은 2009년 4월 5일 《광명성2호》 시험발사,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진행한 뒤 '핵무기 개발에 의한 비대칭전략'을 본격화했다. 이 전략 수행에 대한 자신감은 북한으로 하여금 군수-민수산업의 결합 프로젝트에 나서게 했다.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은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한 뒤에 재래식 무력의 비중을 줄여도 국방력이 유지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확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009년 4월 5일 우주개발 과정에서 확립된 첨단과학기술을 다른 부문으로 이전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지적하면서 스핀오프(spin-off)를 언급했다. 스핀오프는 군수부문에 확보된 자원‧자금‧기술‧인력 등을 민수부문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일컫는다.
<로동신문>은 그해 4월 7일 정론에서 《광명성2호》의 시험발사를 통해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력을 과시했고 이는 과학기술을 앞세워 2012년 강성대국 대문을 열겠다는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학기술력을 앞세운 '강성대국 대문 열기'는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에 따라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2012년 김정은 집권기에 들어와서 과학기술력은 계속 중시됐고 군수-민수산업의 결합 프로젝트는 지속됐다.
주목되는 스핀오프와 CNC
북한 군수산업의 스핀오프에 대해서는 베를린자유대학의 강호제 교수가 국내에 있을 때 수 차례 언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우주발사체의 관련 기술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과 겹치기 때문에 고(高)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최첨단산업이며 상품 생산에 응용될 수 있다. 우주발사체-미사일 관련 첨단기술이 스핀오프 된다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군수부문에서 줄어든 생산요소를 민수로 전환하면 '요소투입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방공업의 첨단기술과 기술 인력들을 민수경제에서 활용하기 시작하면 기술수준은 일거에 높아질 수 있고 생산효율도 향상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스핀오프 전략은 <로동신문>이 2009년 8월 11일 정론에서 CNC를 강조하면서 구체화된다. 그해 하반기에 CNC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것은 국가과학원 조종기계연구소 연구진에 의해 5축동시조종 수력터빈날개가공반이 그해 1월에 개발됐기 때문이다.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에 파견된 연구원들은 생산설비의 혁신과정에서 CNC화를 진척시켰다. 고급형‧고성능 CNC인 5축가공중심반은 련하기계공장에서 2002년 이전에 이미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종기계연구소 연구진은 련하기계공장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 형의 전용수자(digital) 조종장치'를 개발하여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에 도입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이들은 그 뒤에 10m광폭선반과 300㎜보링반도 CNC화했다고 한다. 아울러 현대화의 본보기공장으로 선정된 구성공작기계공장과 트랙터 특화공장인 금성뜨락또르공장에 CNC화된 생산설비와 생산 공정이 완비됐다고 한다.
정밀기계제작공업의 기술(우주발사체-미사일 제조기술)을 민수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최첨단돌파와 CNC화가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CNC가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 프로젝트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9월의 제3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될 무렵에 북한에서 9축선삭가공중심반이 생산됐는데, 그 이전의 1년 사이에 5축수직가공중심반을 넘어 6축동시조종CNC기계와 크랑크축연마반, 8축선삭가공중심반 등이 잇달아 개발됐다.
희천종합공장은 2011년 10월에 CNC전용 공장(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으로 바뀌면서 CNC공작기계 본체를 생산할 수 있는 11축복합가공중심반의 제작에 들어갔다. CNC는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의 대표적인 실증사례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첨단부문에서만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광범위하고 다양한 결합과 협력이 진행되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