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 부천역에서 내려 약 15분 정도 언덕으로 올라가면 안테나가 달린 노란색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한국 여성운동사에게 길이 남을 역사적 현장이다. 몇 년 전 미투 운동이 세계를 휩쓸었지만, 이보다 30여 년 전에 바로 이곳 부천경찰서(지금은 부천소사경찰서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한국의 '미투 운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권양,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얼굴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1986년 11월 3일, <전태일평전>의 저자로 유명한 조영래 변호사는 당시는 '권양'으로만 보도된 권인숙 씨의 재판에서 변론요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여성학 학자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권인숙 씨는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군사독재의 현실에 고민하다 부천에 있는 한 작은 공장에 가명으로 위장취업했다. 1986년 5월 인천 지역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공안당국은 이에 대한 배후조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침 권인숙을 수상하게 여긴 통장이 경찰에 신고를 했고, 권인숙은 1986년 6월 4일 부천서에 잡혀갔다.
그는 조사를 받으면서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위장취업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권인숙의 수사를 맡은 문귀동 상황실장은 그에게 인천항쟁 수배자들의 소재를 심문하면서 그의 팔을 뒤로 해 수갑을 채워 반항을 못하게 한 뒤 심한 성고문을 했다.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했습니다. 가능하면 고발하고 싶습니다." 인천소년교도소로 옮겨진 권인숙은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잊으려고 했다고 한다. 자살충동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싸우기로 결심하고, 1986월 6월 중순, 권인숙은 고민 끝에 접견을 온 변호사에게 성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역사적인 '원조 미투' 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이전에도 1980년 광주 5‧18 항쟁 관련 성고문 등 많은 성고문이 있었지만, 권인숙처럼 이를 정식으로 폭로하고 고발한 적은 없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재야는 당시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던 조영래 변호사를 중심으로 대규모 변호사팀을 구성해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고발했다. 온 나라는 충격에 빠졌다.
경찰은 역으로 권인숙을 공문서 변조, 사문서 변조, 절도, 문서 파손 혐의로 고발하는 한편, 문귀동은 권인숙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전두환 정권은 정권의 사활을 걸고 권인숙의 폭로를 거짓으로 몰고 갔다.
"공권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공산세력의 조작." 장세동 안기부장은 이를 좌파의 음모로 몰고 갔고, 정권의 지침에 따라 검찰은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며 문귀동을 기소유예했다. 뿐만 아니라 권인숙의 성고문 주장은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라며 권인숙을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 붉은 마귀'로 몰아갔다.
조영래 변호사 등 권인숙 변호팀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부당하다고 법원에 재정신청했다. 법원도 한통속이었다. 이철환 부장판사가 이끄는 재판부는 피고 문귀동이 "직무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수사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파면되고 (…)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을 참작해야 한다며, 이를 기각시켰다. 조 변호사는 "사법부는 몰락했다"고 탄식했다. 반면에 성고문 피해자인 권인숙은 공문서 위조로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을 뿐 아니라 불공정 재판 진행에 항의하던 권인숙 씨의 어머니조차 법정모욕과 공무집행방해로 구속됐다.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검찰 보도 내용만 보도할 것, (1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보도할 것, 성추행 대신 성적 모욕이라고 표기할 것, 발표 외의 독자적인 취재 보도 불가' 등의 보도지침을 모든 언론사에 하달했고 언론들은 이 사건을 '운동권, 공권력 무력화 책동' 등으로 보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의 협조로 사태가 잘 무마되자 언론사 편집 간부들과 법원 기자들에게 거액의 촌지를 배포했다고 한다. 월간 <말>이 1986년 9월호에 전두환정권이 보도지침을 통해 이 사건의 보도를 통제했다는 것을 폭로했는데, 전두환은 이 같은 폭로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이처럼 안기부, 검찰, 법원, 언론 모두가 권인숙 성고문 사건의 공범들이었다. 물론 이는 광주 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이에 기생했던 국가기관과 언론의 공생관계가 낳은 결과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한국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여성인권에 대한 무관심, 성적 감수성의 결핍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 등 운동권 진영조차 성적 감수성과 여성인권의 문제에 매우 둔감했다.
"피고 문귀동, 징역 5년, 자격정지 3년." 비극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민주화가 되면서 눈치 빠른 사법부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수사기관의 고문 등 인권침해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 여성으로서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피해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한 이 사건 범행은 비난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이 드디어 권인숙 변호팀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성범죄자 문귀동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권인숙도 석방됐다. 권인숙은 유학을 가서 여성학을 공부한 뒤 한국 최초의 성폭력전문연구소 '울림' 초대 소장을 맡는 등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2020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부천서로부터 약 4시간을 달려 밀양시에 들어서면 의열기념관이 있는 항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약 7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한때 연극계에서 잘 나갔던 밀양연극촌이 나온다. 탁월한 연극 연출가로서 '한국 연극계에서 최고의 권력자'라는 평을 받는 이윤택이 밀양시의 지원을 받아 연희단거리패를 거느리고 연극을 하던 곳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 등에서 무수한 성폭행, 성추행을 한 것이 미투 운동으로 밝혀져 2018년 "극단 내에서 18년 간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형태의 일이었다"고 사과했고 6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이윤택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밀양연극촌은 이름도 '밀양아리나'로 바꾸고 변신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미투 운동으로 예술‧연예계의 다양한 성범죄들이 밝혀졌지만, 미투 운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일어났다. 우리나라 남성지배 문화, 성폭력, 성추행 문화가 아직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어서 차기 대통령감으로 주목을 받았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여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다. 또 다른 대권주자이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가운데 자살을 했고, 오거돈 부산시장이 사퇴했다. 이로 인해 치러진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충격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의 대표로 차세대 진보정치 리더로 주목을 받던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동료 국회의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당에서 제명당했다.
부천서를 떠나려는데, 이제는 국회의원이 된 권인숙 의원이 자신의 성고문 사실을 폭로한 용기에 다시 한 번 존경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최근 충격적인 박원순 사건을 듣고 그가 한 이야기가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 "박원순 시장이 제 성고문 사건 변호인 중 막내 변호인이었는데, 그가 성추행 의혹 당사자가 된 현실에 절망합니다." 우리 모두, 내 속에 있는 '작은 문귀동', '작은 이윤택'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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