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강제로 성남에 끌려온 빈민들이 일어났다

[손호철의 발자국] 43. 성남 : '도시빈민 항쟁'은 이곳 성남에서 시작됐다

"야~ 이건 정말 천당과 지옥이네." 2000년, 아마도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약 30만 명이 거주해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치안공백'의 무법천지라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브라질 리오의 악명 높은 판자촌 호시냐 파벨라에 들어가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한 판잣집에서 끝없이 펼쳐진 판자촌과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리오 해변의 별장들의 대비를 보고 있자, 이 같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19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이라고 불러온 '1971년 성남(빈민)항쟁'이 생각났다.

▲ 브라질의 리오의 악명높은 판자촌 호시냐 파벨라 ⓒ손호철

'천당 밑에 분당.' 이제는 옛 말이 되어버렸지만, 1990년대 초 제 1차 신도시 개발 후 살기 좋은 도시로 분당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이후 그 옆에 판교가 개발됐다. 분당과 판교 개발로 성남은 '가난한 서민층의 도시'에서 '돈 많은 중산층의 도시', '제2의 강남'으로 변모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무상교복 등 '무상시리즈'를 실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재원에 기초해 가능했다. 그러나 성남의 원래의 탄생과 초기 역사는 이 같은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 성남의 신도시로 지어진 분당 ⓒ손호철

"여러분, 서울로 쳐들어갑시다!" 1971년 8월 10일. 한여름 무더위와 폭우에도 불구하고 광주시 성남출장소(당시 성남은 경기도 광주시의 일부였다) 앞에는 성난 5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출장소를 점거한 뒤 불을 질렸다. 성난 군중 중 일부는 불타는 출장소를 뒤로 하고 8대의 시영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구호에 호응한 일부 시민들은 당시로는 서울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인 수진리 고개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직장을 달라' 등의 구호를 붙인 버스를 바리케이드 삼아 급파되어 온 경찰 800명과 대치했다. 해방 후 첫 '도시빈민 집단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는 1971년 성남 빈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 서울의 판자촌을 철거해 모아놓은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의 판자촌들 ⓒ성남시
▲ 1971년 광주대단지(현재의 성남)에서 벌어진 빈민항쟁 ⓒ성남시

왜 이 같은 항쟁이 일어난 것인가? 직접적인 이유는 박정희 정권이 빈민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이 '도시 미화'를 위해 서울시에 산재한 판자촌들을 철거해 철거민들을 허허벌판인 이곳 성남으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1968년 서울시는 광주군 중부면 일대의 350만평을 개발해 공단과 생활시설을 건설, 50만 명이 살아갈 수 있는 자족도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계획에 따라 도시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택, 도로 등 도시의 기본시설이 건설되기도 전에 판자촌을 지어 서울의 판자촌 주민들을 토지분양과 일자리를 약속하고 '강제 이주'시켰다. 한 연구자의 지적대로, 이는 "이주가 아니라 '수용'이었다."

이렇게 성남으로 사실상 '끌려온' 사람들은 항쟁 당시인 1971년 여름에는 2만5000여 가구에 12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도로, 편의시설 등은 말할 것 없고 전기, 수도, 화장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생지옥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 주민들은 대부분 행상, 일용직 노동자 등으로 서울에 살 때는 그런대로 일자리를 찾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는 그 같은 생계수단이 전혀 없었다. 짓기로 한 공장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출퇴근은 하는 것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중교통 수단이라고는 농촌 마을버스 몇 대가 전부였다. 당시 천막촌에는 "굶주림에 산모가 사산한 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기이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따라서 철거이주민들은 당장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배정된 분양권(딱지)를 투기꾼들에게 팔아야 했다. 그 결과 항쟁 당시 분양권의 30%가 불법전매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민심에 불을 지른 것은 정부의 새로운 분양정책이다. 재원조달에 어려움을 느낀 정부는 1971년 7월 분양 땅값을 처음 약속한 2000원에서 8000~1만6000원으로 대폭 올렸고, 분양대금도 장기분할이 아니라 일시불로 납부하라고 통보했다. 분노한 주민들은 8월 10일 성남출장소 앞에 모여 무상분양, 분양가 인하, 공장과 상가건설, 주민구호사업 등을 요구하며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급파한 진압대와는 별개로 내무부차관과 경기도지사 등을 파견해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서울시장도 이주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고 이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주민들은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시위 과정에서 검거되어 구속기소된 21명은 대부분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고 2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주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이 항쟁은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철거민들의 폭동'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생존조건과 정부의 거짓말에 분노한 이주민들의 '정당한 항쟁'이었다. 이 항쟁은 정부가 요구사항을 수용함으로써 겉으로는 '승리한 항쟁'처럼 보이지만, 문제의 핵심인 주거권과 생존권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광주대단지 사업은 투기꾼들의 배만 불리고, 많은 철거이주민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 무허가 판자촌 주민이 돼야 했다.

1971년 성남빈민 항쟁은 1회성 사건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된 한국 빈민운동의 상징이자 시발이다. 제정구 전 의원과 미국 출신의 정일우(존 데일리) 신부는 1973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만나 1975년 양평동 판자촌 공동생활을 시작으로, 철거민 집단이주 마을인 보금자리(1977), 한독주택(1979), 목화마을(1985)을 건설했다. 이들은 이 같은 노력으로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공동수상했고 1988년 민중주거쟁취 아시아연합 설립을 주도했다. 이제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상임의장을 역임하는 등 '강성보수' 인사로 변했지만, 김진홍 목사도 1971년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만들고 판자촌에 살면서 빈민운동을 했다. 이후 전국철거민연합, 전국빈민연합 등이 생겨나 생존권 투쟁을 벌였다.

▲ 성남항쟁은 이후 전국철거민연합 등 조직적인 빈민운동으로 발전했다.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자료

왜 이처럼 5‧16 쿠데타 이후 도시빈민과 판자촌은 생겨났고, 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인가? 우리나라, 특히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 판자촌이 늘어난 것은 분단 후 월남민들이, 그리고 한국전쟁 후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면서다. 판자촌은 5‧16 쿠데타 다시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는 '밀어내는 힘'과 '당기는 힘'의 상승효과 때문이다.

밀어내는 힘은 저미가 등 저농산물 정책에 따른 농촌의 해체이다. 가난한 빈농들은 저농산물 가격을 견딜 수 없었고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야 했다(이농). 당기는 힘은 이들을 서울로 대도시로 끌어당기는 도시화, 산업화다. 하지만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정규직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즉 공장을 짓고 빠르게 산업화를 했지만,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농촌이 해체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서울의 비싼 집값 때문에 이들은 이사짐을 메고 무허가 달동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주목할 것은 이 같은 농촌의 해체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특히 한국 최대의 곡창지역인 호남이 심했다는 사실이다. 설상가상으로, 박정희 정권이 공단들을 울산, 포항 등 영남권에 건설하면서, 호남에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호남의 많은 빈농들은 결국 수도권, 때로는 영남으로 몰려가, 도시빈민으로 전락해야 했다.

현재 호남대 영남의 인구격차는 1대 2.5를 넘어섰다. 그러나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인 1961년에는 그 격차가 1대 1.3에 불과했다. 1961년 이후 호남민의 이농과 인구 유출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호남은 인구 유출로 인구가 줄어들었지만, 대신 이들이 구 성남 등 수도권의 '서민지역'에 유입됨으로써 이 지역은 '지역'과 '계급'의 중첩효과에 의해 '민주당계열', '호남기반 정당'의 중요한 텃밭이 되어 왔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한국사회는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더 빠른 농촌의 해체와 비싼 집값 때문에 도시빈민들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판자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무마하기 위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내세워 사생결단식으로 1988년 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는 '올림픽을 준비한다'는 이름 아래 서울시내 200여 곳의 달동네를 재개발한다며 용역업체 폭력배들과 포크레인 등 중장비, 전투경찰을 동원해 주민들을 쫓아냈다.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제 판자촌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지만, 무허가 판자촌과 달동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 최고의 주거지역이자 부촌인 강남에는 아직도 두 군데의 판자촌이 남아있다. 개포동의 구룡마을과 포이동의 재건마을이다. 성남은 구시가지의 경우도 이제 엄청나게 발달했다.

하지만 구도심의 언덕에는 다닥다닥 지은 낡은 주택들이 도시 건설 초기의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이 언덕을 걸어 50년 전 철거이주민들이 정부의 약속불이행에 항의해 생존권투쟁을 벌였던 성남출장소로 향하자 역사의 현장에는 이제 초고층 고급 주상복합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이를 올려다보고 있자, 이 자리에 살았던 주민들은 또 다시 철거민으로 다른 곳으로 쫓겨 간 것은 아닌지, 최소한의 주거권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공주택사업은 불가능한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 항쟁의 중심지였던 성남출장소는 이제 고급주상복합시설이 들어섰다. ⓒ손호철
▲ 서울로 쳐들어가기 위해 경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성남의 수진리 고개 ⓒ손호철

후기

성남시는 최근 1971년 성남(빈민)항쟁 50주년을 맞아 이 항쟁을 '8‧10 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으로 부르기로 결정하고, 오는 28일 명칭 지정 선포식을 열기로 했다. 이는 '5‧18 민중항쟁'처럼 일어난 날짜로 이름을 붙이는 관례를 따른 것이지만, 잘못된 것이다.

물론 항쟁 당사자들이나 지역사회단체 등이 예전부터 이 투쟁을 '8.10'이라는 이름을 불러와 이를 계승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8‧10 성남 민권운동'이 아니라 '71년 성남항쟁'이라고 불러야 한다. '8‧10 성남 민권운동'이라고 하면, 그것이 1971년에 일어난 것인지, 1990년대 일어난 것인지, 2000년대 일어난 것인지,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아는가? 1971년에 일어난 것이 중요하지, 8월 10일에 일어난 것이 뭐가 중요한가?

'항쟁'이라는 이름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해 피했는지 모르지만, '민권운동'이란 이름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민권운동은 1960년대 미국에서 아프리카계가 인종차별 등에 반대해 시작한 'Civil rights movements'를 번역한 것으로, 우리 역사에는 처음 사용되는 것이다. 물론 생존권도 민권의 일부이니 생존권을 위한 1971년의 투쟁도 민권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민권운동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 개념이라 1971년 투쟁의 내용도, 치열했던 투쟁 방식도 전혀 전달하지 못하는, '죽은 용어'이자 익숙하지 않은 '생뚱맞은 용어'이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항쟁'이란 표현을 쓸 수 없다면, 이 투쟁이 경제민주화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71년 성남 민주화운동'이 '성남 민권운동'보다는 나은 표현이다.

▲ 한국최고의 부촌인 강남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마지막 판자촌'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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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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