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시절부터 전국 미군부대에서 노래하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냈다. 소속 밴드는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이젠 이름마저 가물하다.
영 사운드, 영 러브즈, 양떼 그룹사운드, 골든 웨이브….
밴드 활동을 끝냈으나, 노래까지 접은 건 아니다. '솔로가수 임연희'를 찾는 곳은 카바레, 극장식 비어홀, 호텔 나이트클럽 등 그야말로 줄을 섰다. 헤비메탈 그룹에서도 활동했다.
그렇게 청춘은 노래에 실려 떠났고, 어느덧 환갑 즈음이 됐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라쓰’는 영원하다고 했던가. 청춘은 갔어도, 노래 실력과 무대 매너는 남았다. 그게 무기가 되어 임연희를 다시 무대에 세웠다.
거리의 태극기 집회, 청바지에 붉은 점퍼를 입은 임연희(1962년생)는 왼쪽 다리를 엠프 위에 올리고 헤비메탈에서 다진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왕년의 미군들처럼, 많은 노년층이 환호하며 응답했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으나, 성조기 하나 만큼은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여전히 임연희 곁에서 휘날렸다.
노래가 좋아 학교 대신 미군부대로 갔던 임연희, 밤무대 가수와 로커(rocker)를 거친 그는 어떻게 태극기 집회에서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는 ‘태극기 아이돌’이 됐을까. 그 이유가 궁금해 지난 4월, 임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2021년 4월 말, 집으로 초대한 취재원을 위해 쿠키 선물 세트를 구입했다.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한 주택, 고교생 임연희가 학생 대신 가수를 택해 떠난 그 집은 여전했다.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금방 문이 열렸다. 대문 바로 앞 계단에서부터 현관문까지 이어진 벽에 메모장 여러 개가 붙어 있었다.
치매 어머니를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하는 습관은 태극기 집회 활동까지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임연희는 여러 기록을 거실 바닥에 펼쳤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의 태극기 집회 큐시트, 포스터 등이 사람 한 명 정도 누울 수 있을 법한 공간을 이불처럼 덮었다.
임연희는 기자가 앉은 의자와 그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환자용 침대를 오가며 질문에 답했다.
임연희는 입안의 쿠키를 우물거리며 말을 꺼냈다. 임연희는 2016년 11월부터 태극기 집회에 참여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였다. 이후 그는 2019년 조국 규탄 집회, 2020년 미국 대사관 앞 한미동맹수호 집회 등 여러 보수우익 성향 집회에 참여했다.
임연희의 본업은 앞서 말한 대로 헤비메탈, 팝 가수다. 그는 1979년 고교 1학년 때, 서울 서대문의 한 학원에서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아는 언니의 권유로 경기도 문산 선유리 미8군 무대에서 공연하는 하우스 밴드에 들어갔다.
기타, 베이스, 보컬… 밴드 입단 후 임연희는 선배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이때부터 다니던 학교도 그만뒀다. 가난 때문이었을까. 부모님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선배의 조언이 귀에 들어왔다. 돈을 벌어야 했던 임연희에게 솔깃한 말이었다.
선배들에게 노래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헬퍼 생활을 한 지 6개월이 지난 뒤, 무대에 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가 해체되었다. 소속 밴드를 잃은 보컬은 솔로 가수가 되었다. 임연희는 극장식 비어홀, 카바레, 극장 등에서 노래를 불렀다.
밤낮으로 무대에 서다 보니 잠과 일이 일상의 전부였다.
쉬지 않고 일한 결과, 동네에서 유일한 자가용 소유자가 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임연희는 일자리, 새로운 무대를 찾아야 했다.
임연희는 스스로를 용감하고 도전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임연희는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진출했다. 시작은 모델이었다. 1989년, 헤어 모델, 식당 광고 모델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한복미인대회에도 참가했다.
도전은 연기로 이어졌다. 또 누군가의 조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임연희는 1995년 개봉한 안성기 주연의 영화 <천재 선언>으로 데뷔(?)했다. 술자리 장면에 잠시 등장하는 엑스트라였다. 데뷔 후에는 극에서 잠깐 등장하는 단역을 주로 맡으며 활동했다.
그의 이력은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을 친다.
사회활동을 해온 사람들과의 교류는 임연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서류봉투에서 사진 뭉치를 꺼냈다. 세상에나, 정치인과 찍은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임연희는 대한민국에서 여야 가리지 않고 정치인과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일반인인지도 모른다.
임연희는 2012년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2015년에는 새누리당 서울시당 문화예술분과 위원장, 2018년에는 김문수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의 유세단장을 맡는 등 당에서 여러 직함을 달고 활동했다.
임연희는 어쩌다 새누리당(국민의힘)을 선택했을까?
조금 당혹스러운, 예상 못했던 답변. 그의 말대로 만약에 민주당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면, 임연희는 2019년 서초동에서 "조국 구속!"이 아닌 "조국 수호!"를 외쳤을까?
정당 활동과 가수 활동을 병행하고 있던 2016년 말, 임연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열혈 참가자가 됐다. 철창에 가둬진 박근혜 전 대통령 조형물을 보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집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임연희는 태극기 집회 무대에서 노래를 하겠다고 자기가 먼저 제안했다. 그때 처음 부른 노래가 <아, 대한민국><전후가 남긴 한 마디>였다. 그 첫 무대를 느낌을 그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불러주는 집회 현장이 있으면 어디든 다 갔다. 물론 출연료 따위는 없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5년 동안 노래한 이유는 뭘까?
서청대는 '서울구치소 청와대'의 줄임말로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된 서울구치소를 이렇게 부른다.
임연희는 자신을 울린 '서청대'의 그 한 사람을 위해 5년 넘게 출연료 없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태극기 집회 현장에서 임연희는 새빨간 점퍼와 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행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목청으로 “문재인 퇴진!”을 외치곤 했다. 그런 임연희가 현장에서 눈물을 쏟아냈다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태극기 집회 활동이 알려지자, 가수 임연희에게 들어오는 행사가 끊겼다. 그러자 임연희는 자기가 직접 행사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임연희의 활동은 예상할 수 없는 일로 중단됐다. 2019년 4월, 임연희의 어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원에 들어갔다.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돌봐주었기에, 임연희는 태극기 집회 활동을 계속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된 이후, 요양원 면회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올해 4월 초, 임연희는 형제들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임연희는 집에서 혼자 어머니를 돌본다. 돌봄에 필요한 노력, 비용 거의 모두 임연희 혼자 부담한다. 그동안 모아둔 돈과 코로나19 예술인 지원금으로 생활을 한다.
기자와 요양원 이야기를 하던 임연희가 고개를 돌려 어머니에게 크게 물었다. 등받이가 올라간 환자용 침대에 앉아있던 임연희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 좋아”라고 대답했다.
아무나 못하는 일을 해나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혼자 어머니를 돌보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할 때마다 그는 "아무나 못 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임연희 말처럼, 그의 삶은 아무나 못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살다보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선택의 국면에서, 임연희는 언제나 기존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스스로 "용기 있는 도전"이라고 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임연희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동네 산책을 나갔다. 집에서 대문까지 나가는 길, 산책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그때마다 임연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머니 휠체어를 미는 임연희에게 물었다.
도전정신 충만한 그의 입에서 또 예상 못한 답이 나왔다.
태극기 아이돌로 불린 임연희는 지금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임연희는 이 말도 덧붙였다.
젊을 땐 전국 미군부대를 돌고, 중년 이후엔 태극기 집회 따로 또 전국을 돌고… 환갑을 앞둔 임연희는 치매 어머니를 돌보며 오래전 떠난 그 집에 머물기로 했다.
아무나 못하는 그 일을, 임연희는 직접 하기로 했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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