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를 원망하지 말고 /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 네 에미는 과도기에 / 선각자로 그 운명의 굴레에 / 희생된 자였느니라'
수원 중심가에 위치한 한 광장의 입구 기둥에는 이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에미'는 이 광장의 주인공인 나혜석(1896~1948)이다. '신여성'을 대표하는 나혜석은 이 기둥에 쓰여 있듯이,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 '최초의 여성 소설가', '최초의 전시회',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여기에 쓰여 있지 않지만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을 한 여성', '최초의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등 그를 따라 다니는 '최초'라는 수식어는 많다. 그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근대적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나혜석은 자신의 글처럼 봉건적 조선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화하는 '과도기'에서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위해 몸부림친 '선각자로 그 운명의 굴레에 희생된' 불운의 인물이다.
나혜석은 이제는 '나혜석거리'라고 불리는 이 광장으로부터 10여분 떨어진 팔달산 근처에서 할아버지가 호조참판을 지내 '참판댁'이라고 부르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파이지만, 자식 문제에는 깨인 사람으로 나혜석 등 딸에게도 똑같은 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조선의 봉건적 유제를 벗어나지 못해 여러 첩을 거느렸다. 특히 나혜석이 사춘기 때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첩을 들여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혜석은 우리의 축첩제도, 가부장제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미모에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언변, 글재주 등 재색을 모두 갖춘 나혜석은 특히 일찍부터 미술이 탁월한 재능을 보여 진명여고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서양화를 공부했다. 조선여성유학생친목회를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이광수, 염상섭 등과 교류하는가 하면 1914년에 이미 "현모양처는 (중략)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파격적인 글을 발표했다. 특히 일본의 페미니즘 잡지에 소개된 '인형의 집'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오빠의 친구로 재주가 많았던 최승구와 연애했지만, 그는 유부남이었던 데다 병으로 요절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는 혜석에게 결혼을 강요하며 학비 송금을 중단했지만, 혜석은 굴하지 않고 귀국해 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18년 졸업과 함께 귀국,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인 <경희>를 발표하고, 유화 등 근대 미술을 알리는 개인전도 열었다. 유학 시절에 본 노동자들의 삶을 주제로 진보적인 판화도 발표했다. 1919년 김마리아 등과 이화학당의 독립운동 참여를 조직하는 등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6개월 간 감옥살이를 했다. 가족의 결혼 압박에 자신을 좋아하던 오빠의 친구이자 결혼 전력이 있는 김우영과 1) 평생 사랑하고, 2) 그림 활동을 방지하지 않으며, 3)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 따로 살며, 4) 최승구묘지에 비석을 세워준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서양 화가로 우리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나혜석 씨의 양화 전람회는 (…)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1921년 유화 80점으로 연 전시회는 '최초의 여성 유화 개인전시회'로, <매일신보> 기사처럼 하루에 5000명이 다녀갈 정도로 대성공이었다(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등은 수원 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나혜석은 여성운동, 독립운동 등에도 적극적이었다. 남편이 일본 외교관이 되면서 만주로 발령이 나자 그곳에서 여성들을 위한 야학도 하고 부영사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김원봉이 이끌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여러 면으로 도왔다.
1927년 포상으로 세계 일주를 하게 된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다. 여행 중 그림과 현대 문물을 공부하며 여행기와 그림을 국내 언론에 기고해 '조선 최초로 구미를 여행한 여성'이 됐다. 그러나 파리에 외교관으로 나와 있던 최린과 연애에 빠지면서 1930년 이혼을 하고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했다.
나혜석은 여론에 굴하지 않았다. 결혼 전 동거를 해봐야 한다는 '실험결혼론'을 주장하고 '사랑의 자유'를 선언하고 나섰다.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혼외정사는 "죄도 실수도 아닌 진보된 사람의 행동"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이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서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혜석은 한발 더 나가 <이혼고백서>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잘못된 정조관과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을 폭로했다. 나혜석은 거침이 없었다. '정조는 취미'라는 그의 정조론은 지금 보아도 충격적이니 당시의 파문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 같이 (…)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 우리의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니 좀 더 정조가 문란해 가지고 다시 정조를 고수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 우리도 이것저것 다 맛보아 가지고 고정해지는 것이 위험성이 없고 순서가 아닌가."
나혜석은 여성권을 확대하기 위한 법률투쟁에 있어서도 선구자였다. 그는 최린이 강제로 자신의 정조를 유린했고 이혼 당시 이후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고소했다. 조선총독부는 최린의 손을 들어줬지만, 고소 취하의 대가로 거액을 받아냄으로써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 결과 사회적으로 "바람을 펴 이혼을 당한 탕녀"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결과 개인전이 실패하는 등 추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나혜석은 세상이 손가락을 하고 김우영이 접근을 금지하면서 자식들을 볼 수 없는데다 아들마저 죽어 우울증에 시달렸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를 건너 당진을 지나면 해미인터체인지가 나온다. 여기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조금 달려가면 유명한 수덕사가 나온다. 비구니들의 사찰인 수덕사 앞에는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응노 화백이 머물며 작업을 했던, 역사적인 수덕여관이 우아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수덕여관에서 수덕사 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절의 담 안쪽으로 작은 집이 보인다. 수덕사의 가장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환희대라는 곳이다.
"웬일이지요?"
"나도 머리를 깎을까 해서."
나혜석은 고통 속에 번민을 하다가 1935년 불교에 귀의할 생각으로 일본 유학 시절부터 같은 '신여성'으로 가깝게 지내다 스님이 된 김일엽을 찾아 온 것이다. 일엽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나혜석은 처음에는 수덕여관에, 이후는 환희대에 5년이나 머물렀다. 나혜석이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는 미술지망생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세계적인 화가로 동백림사건으로 고생을 한 이응노다.
나혜석은 이 시기에 <삼천리>라는 월간지에 세계일주기를 연재했는데, 이 글 도입부에 인용한 '에미를 원망하지…'도 이 일주기에 최린과 만난 문제의 파리여행을 이야기하며 쓴 글이다. 나혜석은 특히 1936년 1월 영국 여행 당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취재한 영국여성참정권운동을 소개했다. "내가 조선의 여권운동자 시조가 될지 압니까?" 그는 영국운동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썼다.
1943년 불교 귀의를 포기하고 속세로 돌아왔지만 세상의 손가락질은 여전했고 몸과 마음은 파킨슨, 중풍, 관절염, 우울증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의 창씨개명과 협력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해방 후 그는 노숙자 생활을 하다 지나가는 사람이 서울시립병원으로 보내서 무연고자 병동에서 지내다가 1948년 사망했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조선에서 가장 잘 나갔던', '가장 각광을 받았던 여성'은 조선의 가부장체제에 저항해 너무 선구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외친 죄로 이렇게 처참하게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제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길 정도로 명예회복을 했으니, 때늦었지만 다행이다. 나혜석은 1970년대부터 복권이 되기 시작해 1987년 민주화 이후 완전히 복권되어 '근대 한국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정확히 예언했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 (중략) /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혜석 거리의 서쪽 끝에서 인계예술공원이 있는 동쪽 끝으로 걸어가다 보면 화구통을 든 나혜석 동상이 우리를 맞는다. 마침 동상 뒤에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여성의당'이라는 페미니즘 정당이 설치해 놓은 여성폭력 추방에 대한 펼침막이 바람에 흔들리며 우리에게 나혜석이 꿈꾸었던 남녀평등의 사회가 얼마나 실현되었는가를 묻고 있었다.
다시 인계예술공원 쪽으로 걸어가면, 나혜석이 쓴 '인형의 가(家)'를 써 놓은 벽 앞에 나혜석이 한복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자
(중략)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 주게
나는 나혜석거리를 떠나며 물었다. 나혜석이 여성해방운동으로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뒤 근 100년이 지났지만, 과연 이제 우리는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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