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무소하면 외형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죄수를 감시하는 높은 망루다. 대전 중구 아파트촌 한가운데에는 낡은 망루가 세워져 있어 보는 이들을 의아하게 한다. 1984년 새로 지은 교도소로 이전을 해 이제는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이곳이 원래 악명 높은 대전형무소(형무소는 1961년 교도소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기서는 그 이전부터를 다루기 때문에 그냥 형무소라고 부르겠다)였기 때문에 남아 있는 망루다. 사실 이 망루와 대전형무소는 감옥과 전혀 관련이 없는, 많은 일반인들도 간접적으로 체험한 유명한 곳이다.
"겨울 감옥살이도 힘들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여름 감옥살이다. 겨울에는 다른 죄수들이 추위를 녹여주는 도움의 손길로 느껴지지만 여름에는 더욱 덥게 만들기 때문에 증오하게 만든다."
망루를 올려다보고 있자, 오랜 감옥 생활에서 오는 깊은 사색과 휴머니즘에서 나온 아름다운 글로 우리들을 깨우쳐줬던 신영복 선생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신영복의 이 같은 깨달음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여기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하며 사색하고 붓글씨를 배웠다. 신영복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예술가인 윤이상, 이응로도 1960년대 말 동백림 사건 때문에 여기에서 감옥살이를 했다('손호철의 발자국' 13. 통영 동백림 사건, <프레시안> 2021년 4월 5일자 참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인 안창호, 여운형, 심산 김창숙 선생도 여기를 거쳐 갔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30년대 초반에 2년 반 동안 여기서 감옥살이를 했다, 심산은 1930년대에 복역 중 고문 등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손수레에 실려 나와야 했다.
이처럼, 많은 형무소 중 대전형무소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전형무소가 사상범들을 가두기 위한 특별한 형무소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0년대 대전형무소를 지으면서 원래부터 장기수와 사상범을 위한 특별감옥으로 설계했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된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감옥살이를 했다.
망루 옆에는 반공총연맹 대전지부가 운영하는 자유회관이 있고, 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대전형무소의 역사를 알려주는 진열품과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기억의 터'에는 안창호가 이 감옥에서 부인에게 보인 편지, 그리고 신영복의 여름 감옥살이 글 등이 전시돼 있다.
대전형무소는 이름 있는 사상범만이 아니라 독립과 민주화, 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잡혀온 이름 없는 민초들이 갇혔던 곳이다. 특히 1960년대 전국 13곳 형무소에 흩어져 있었던 5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을 박정희 정부가 이곳으로 이감시키면서, 대전형무소(대전형무소 특사)는 좌익장기수 감옥, '현대의 유배지'로 악명을 떨치게 됐다.
1970년대가 되자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고문, 집단폭행 등 비인도적인 장기수 전향공작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장기수들이 목숨을 잃거나 눈물을 흘리며 전향서를 써야 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될 '청주보호감호소' 참조).
70~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으로 이곳에 들어온 학생운동가들이 이들을 만나 오히려 의식화가 되어 나오기도 했다. 1980년대 초 5‧18 학살에 항의해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폭탄을 설치하려다가 체포돼 이곳에 들어온 권운상은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채록해, 일제 말의 징병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원조 빨치산의 이야기부터 해방정국으로 이어졌던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다룬 <녹슬은 해방구>라는 대작을 썼다.
대전형무소의 비극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대전형무소가 사상범을 중점적으로 수용하던 곳이었던 만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곳은 학살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대전형무소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골로 간다"는 말이 있다. "너 까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간다"는 말이 대표적인 예다. 이 '골'이 대전 동남쪽에 위치한 산내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산내(골령)골이 어떠하기에 이 같은 말이 생겨났을까? 산내골에는 기네스북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보기 드문 광경이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긴 무덤'이다. 무덤처럼 잔디가 덮인 흙더미인데, 높이는 별로 높지 않지만 길이가 30미터 이상으로 긴 흙더미다. 한국전쟁 때 '좌파 추정자'들을 집단으로 학살하고 흙으로 덮어 생긴, 긴 무덤이다.
1950년 6월 27일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도주한 이승만은 7월 1일 다시 목포를 거쳐 해군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도주했다. 대전이 북한군에 넘어가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6월말부터 7월까지 산내골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정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1차에 1400명, 2차에 1800명, 3차에 1700명 등 49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1차 학살은 충청남도 지역 보도연맹원(과거 좌익사범들을 전향시켜 가입시킨 조직으로, 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3. 제주 백조일손, <한국일보> 2020년 8월25일자 참조), 2차 학살은 여순사건 관련자 등 그 이전부터 대전형무소에 갇혀있던 좌익사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원들도 일단 대전형무소에 수용했다가 산내골로 끌고 와 학살한 것이다. 정부조사와 달리, 여러 연구들은 약 7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생긴 말이, "골로 간다"는 말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대전형무소에서 미군이 운전하는 미군 트럭에 싣고 와 미군이 촬영하는 감독 하에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살이 '미군 몰래' 자행된 게 아니라 '미군의 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권의 나라 미합중국 만세다!
그래도 그 '덕분'으로, 미군이 찍은 생생한 학살 사진들이 역사적 증거로 남게 됐고, 최근 비밀이 해제되어 공개됐다. 산내골은 기념비 설립 등이 예정된 채 썰렁하게 버려져 있는 상태다(2021년 초 이곳을 다시 방문하자, 시신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라 흙을 파헤치고 푸른 천막천으로 덮어 놓은 상태였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북한군이 내려와 2차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1차 학살과 달리 2차 학살 장소는 대전형무소였다. 반공연맹 대전지부 주차장 구석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다.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후퇴하면서 조국반역죄와 민족반역죄로 대전형무소에 잡아 놓았던 우익 인사들을 산 채로 던져버린 것으로 알려진 현장이다.
북한군은 이 우물 이외에도 형무소 후문 북쪽 밭고랑 등에서 우익 인사들을 집단학살했다. 국군이 들어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우물에서 건진 171구의 시신을 비롯해 희생자 수가 1557명에 달했다고 한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면 북한군이 남기고 간 시신들의 사진을 접할 수 있다.
대전형무소는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좌우익의 교차 학살의 비극적인 현장이다, 특히 학살을 총지휘한 미군의 촬영과 사신들을 북한군이 그대로 버려두고 도주했기 때문에, 드물게 이 같은 교차 학살의 생생한 사진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일 것이다.
일제, 그리고 해방 후 1980년대까지 사상범들의 유배지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수많은 교차 학살의 현장이었던 대전형무소는 우리에게 이념이란 무엇이고, 이념이 인간을 위한 것을 넘어서 물신화될 때 얼마나 큰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절감하게 한다.
대전형무소를 뒤로 하며 마지막으로 망루를 올려다보자, 문득 괴테의 명작인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대화가 생각났다. "젊은이,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살아 있는 것은 늘 푸른 생명의 나무이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즉 구체적인 우리 삶의 현실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