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계급‧신분에 저항한 '최초의 민중봉기'

[손호철의 발자국] 28. 대전 : 우리가 현재를 빚지고 있는 명학소 민중봉기(망이·망소이의 난)

우리는 여러 선입견을 갖고 산다. '충청도 양반'이라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아마도 말이 느리고 행동이 신중해서 그런 말이 생겼을 것이다. 따라서 '항쟁', '봉기'를 충청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5‧18 광주항쟁, 부마항쟁은 있지만 대전항쟁은 없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충청도와 항쟁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잘못 생각했었다. 이번 한국 근현대사 기행을 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다. 첫째, 60년 4‧19혁명 당시 제일 먼저 이승만 정권이 저항해 들고 일어난 것이 대구(2‧28 민주항쟁)였고 그 다음이 대전이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에 대항한 마산의 3‧15 이전인 3월 8일 대전에서 '3‧8 민주의거'가 일어난 것이다(아래 참조).

둘째, 문헌에 나오는 '최초의 민중봉기'가 충청도에서 일어났다. 바로 우리가 흔히 '망이·망소이의 난'이라고 부르는 '명학소 민중봉기'가 일어난 곳이 예전의 공주, 현재의 대전이다(명학소 민중봉기는 비록 고려시대에 일어났지만, 자유, 평등이 그 핵심인 '근대'를 지향한 최초의 운동이라고 생각해 이번 한국 근현대사 기행에 포함시켰다.)

▲ 기념탑에 세워져 있는 반란군 지도자 망이의 동상 ⓒ손호철

'계급'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좌파'를 연상한다. 하지만 '계급', '신분'은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는, 객관적‧역사적으로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객관적인 역사적 현실'이다. '계급'이란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것 같은 박근혜도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노비였을지 모르고, 대표적인 '극우논객' 조갑제도 고대에 태어났으면 '노예검투사(글래디에이터)'였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도 역사적으로 시대에 따라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변했지만, 신분적 불평등과 계급이 지배하던 사회였고, 차별당하고 지배당하는 민중은 신분적 불평등을 전복시키고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해 왔다.

"무신정변 이후 천민도 권력자에 올랐다. 그러니 우리라고 왕후장상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각자 주인을 없애고 노비문서를 불태운 뒤 시장에 모여 봉기하자!" '만적의 난'의 주모자인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노비들을 모아놓고 한 연설은 이 같은 투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 우리만 갖가지 차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로부터 20년 전인 1176년 정월, 현재 대전 서구 탄방동 일대에 있던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했다. 명학소 민중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 관군과 싸우는 명학소 민중들의 투쟁(좌), 봉기를 준비하는 명학소 소민들을 그린 벽화(우) ⓒ손호철

이 봉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행정조직을 이해해야 한다. 고려시대에는 일반행정구역 이외에도 향, 소, 부곡 같은 특수행정구역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신분적으로는 양민이지만 세금부담 등은 일반 양민보다 훨씬 높으면서도 과거나 국학 입학이 제한되고 승려도 될 수 없는 등 신분적 제약이 많았다.

그 중 소는 철강 등 특수한 제품을 만드는 지역으로 명학소는 탄방동이라는 지역 이름이 시사하듯이 숯을 만들던 곳이라는 설과 이 숯을 가지고 철을 만들었다는 설, 탄방동이란 지역명은 훨씬 이후에 생긴 것으로 수공업 생산지였다는 설 등이 경합하고 있다.

명학소 민중봉기가 일어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무신들이 힘으로 세상을 뒤집고 권력을 잡은 무신정변 이후, 민초들도 신분제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언제든 힘으로 엎을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두 번째는 무신들의 수탈이 문신 시절보다 악랄해 민중들의 삶이 황폐해지고 불만이 누적된 것이다. 그 결과 명학소 이외에도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소의 경우 신분적 차별까지 겹쳐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나 소의 인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봉기는 농민들이 가담하지 않았다면 폭발적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명학소 민중봉기는 특수행정구역 소 주민들의 신분 해방운동과 농민 반란이란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 '민중연합 봉기'였을 것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생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단일계급이 아니라 다양한 민중 세력들이 함께 손을 잡을 때, 그 힘이 배가되는 것이다.

망이·망소이가 이끄는 1000여 명의 반란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공주를 공격해 함락했다. 놀란 중앙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보냈지만 망이·망소이는 이들 또한 격퇴했다. 반란군은 충주로 진격해 갔다. 이곳에는 농토를 빼앗기고 산으로 올라간 농부들이 있어 망이는 산행병마사를 자칭하며 이들과 연합했다.

반란이 길어지자 중앙정부는 6개월 뒤 명학소를 일반 양인들과 부역 등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는 현으로 승격시키는 파격적인 유화책을 제시했다. 망이·망소이는 응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이에 만족해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게다가 중앙정부는 북쪽의 난을 정벌하고 그 병력까지 명학소 봉기 진압에 투입하면서 망이·망소이 등은 1177년 초 항복했다.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곡식을 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끝난 줄 알았던 명학소 민중봉기는 두 달 뒤 다시 타올랐다. 망이가 천안의 홍경원을 공격하고 예산의 가야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망이·망소이는 당시 사원경제 등으로 민중들의 원한을 샀던 홍경원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살해했다. 2차 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2차 봉기에 나선 것은 중앙정부가 유화책을 쓰면서도 뒤로는 이들의 가족들을 잡아가는 등 보복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홍경원 주지승을 통해 개경으로 보낸 편지에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왕경까지 쳐들어가겠다"고 공언했다. 정권 타도와 권력 장악의 의지를 선포한 것이다. 이들은 청주 지역을 장악하고 이천 등 경기도 남부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규모 진압작전 끝에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이 봉기는 1년 반 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 봉기의 결과로 결국 소와 같은 불평등한 행정제도는 사라졌고, 이후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한 한반도 민중들의 저항의 씨를 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전 서구지만 유성에서 가까운 곳에 남선공원이란 작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 한가운데에는 꽤 높은 탑이 있다. 세 개의 기둥을 세워 놓은 탑에 가까이 다가가면 머리띠를 동여매고 죽창과 칼을 든 장정들의 조각이 나타나 범상치 않은 탑임을 알려준다. 2006년에 만든 명학소 민중봉기 기념탑이다. 유성온천에 자주 왔지만, 이 같은 탑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지방자치가 활성화된 이후, 지방자치단체들이 여러 기념시설들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지만, '불온한 반란'으로 치부하던 망이·망소의 난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있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역시 지방자치는 좋은 일이다.

세 개의 기둥은 각기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하며, 탑의 정면에는 망이·망소이를 형상화한 무사 두 명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점잖게 칼을 차고 있는 이들과 달리 세 기둥 끝에 세워진 농민군들은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칼을 내리 찍으려고 하거나, 죽창을 찌르거나, 주먹을 쥔 팔을 하늘로 높이 쳐들고 소리를 지르는 전투적인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그곳 화장실 외벽에 그려져 있는 명학소 민중봉기 그림이다. 관군과 싸우는 봉기군 중에 스님들의 모습이 두 명이나 그려져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화가가 단순히 상상력으로 스님들을 그려 넣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자료들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동학혁명과 같은 근현대 투쟁에 기인하며 그것이 실질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명학소 투쟁에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아주 조금일지 모르지만 명학소 민중봉기에 빚지고 있다. 나는 망이·망소이 등에게 감사를 표하며 남선공원을 떠났다.

망이, 망소이의 후예들과 3‧8민주의거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교에서의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3‧15 대통령선거를 앞둔 1960년 3월 8일, 대전고 1, 2학년 학생 1000여 명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구호를 외치며 대전 시내 중심가로 달려갔다. '3‧8 민주의거'가 시작된 것이다.

3‧8 민주의거는 4‧19혁명과 관련해 전국적으로 최초로 일어난 항쟁인 대구의 2‧18 민주의거에 대한 동조시위로 3‧15 부정선거 이전에 일어난 것이 특징이다. 즉 학생들을 선거에 동원하는 이승만 정권의 관권선거에 반대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경찰은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무차별 구타와 연행으로 대응했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3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여 경찰과 투석전까지 벌였다.

3‧8 민주의거는 잊혔다가 1987년 민주화가 진행되며 이를 재조명하기 시작해 2006년 명학소 민중봉기기념탑으로부터 멀지 않은 둔지미공원에 기념탑을 설치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이 높은 탑 위에는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다. 탑을 올려다보며 3‧8 민주의거를 생각하자 망이·망소이의 후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는 2018년 이 의거의 의미를 높이 평가해 3월 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고 대전시는 매년 3월 8일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연다.

▲ 4.19 혁명 이전에 대전 학생들이 일어났던 '3.8 민주의거 기념탑' ⓒ손호철
▲ 대전 근현대사전시관에는 대전 3.8 의거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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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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