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 (중략) /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소녀.'
춘천 소양 댐 앞에 서면 절로 나오는 노래다. 소양 댐을 조금 못 미친 북한강변에는 강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작은 잔디밭 공원이 있다. 공원에서 춘천전투기념비, 6‧25참전학도병기념탑을 지나면 월남전참전기념탑이 나타난다.
이번 답사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여러 차례 돌면서 알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기념물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기녑탑이라는 사실이다. 대략 시나 면에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이중 춘천의 월남전참전기념탑은 특별하다. 춘천 북쪽 파로호 근처의 옴리는 우리나라에서 지형이 베트남과 가장 비슷하다. 그곳에서 참전 병사들이 훈련을 받고 춘천을 거쳐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춘천 지역 병사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국군 장병들 조각과 기념탑 앞에 서자, 여러 가지 개인적인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첫 번째 장면은 중학교 시절 강제 동원에 의해 베트남참전용사 송별식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던 기억이다. 베트남전쟁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수업을 하지 않는 것에만 신이 났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베트남 파병을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제의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는 군사, 경제적 이유로 베트남에 참전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미국이 오히려 여러 이유로 거절했다(사실 1954년 이미 이승만은 미국에게 라오스에 우리 군대를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전세와 국제적 환경이 어려워지자, 다급해진 미국이 우리에게 파병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공산 침략을 자유 우방의 도움으로 저지한 나라로서 아시아의 자유를 지키는데 기여해 빚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1964년 야당 반대 속에 월남 파병안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인 베트남 파병이 시작된 것이다. 박 정권은 1965년 본격적으로 파병을 시작해 휴전협정이 체결된 1973년까지 8년 간 총 32만 명을 파견했다.
두 번째로 떠오른 장면은 대학에 들어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깬 리영희 선생의 글과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온 늦깎이 대학 동기로부터 들은 베트남전쟁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다. 베트남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자유진영의 전쟁'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베트남전쟁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어진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 민중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리영희 선생의 주장은 충격이었다. 대학 동기로부터는 베트남에서 우리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졌었다.
"베트남은 '한국의 엘도라도'였다." 1980년 광주학살로 언론사를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하버드대학의 한국 연구총서를 읽고 있을 때 나타난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이 책은 베트남전쟁을 스페인의 아메리카대륙 식민지화 시절에 생겨난, 도시 전체가 황금으로 덮여있다는 '전설의 땅 엘도라도'에 비유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베트남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직접적인 상업적 이익이 7억 달러이고 한국군이 받은 월급을 송금한 것이 20억 달러, 합쳐서 27억 달러였다. 이는 그 기간 중 우리의 전체 수출액의 40%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소위 '산업화의 도약의 단계'였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엘도라도'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브라운이 작성한 '브라운 각서'에 의해 우리는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무기 현대화와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 기업들은 브라운 각서에 의해 여러 현지 공사, 운송 등에 참여해 세계시장으로 나아가 글로벌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진은 비행기로 사람들과 물류를 베트남으로 수송하고 베트남에서 운전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군부대에 물류를 운송하는 등 다양한 운송사업을 벌여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대한항공 등 종합운수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현대건설 등도 베트남에서의 해외 건설 경험을 토대로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에 뛰어들 수 있었다. 즉 '한강의 기적'은 사실상 베트남전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에 가려진 어둠 역시 깊다. 32만 명의 파병 중 5099명이 죽고 1만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16만 명이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 피해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고통을 받은 병사들도 적지 않다. 이들만이 아니라 위험한 물자 운송을 하다가 죽은 노동자들도 적지 않다(파월 노동자들 400여 명은 1971년 한진상사가 연장노동 등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번 140억 원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KAL빌딩을 점거하고 방화했다).
이 점에서 한강의 기적,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는 열대우림의 이국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군인들과 노동자들에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포터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한국이 베트남전에서 얻은 이익은 일본이 한국전에서 얻은 이익과는 비교도 안 되고 파병도 하지 않은 일본이 베트남전에서 얻은 이익보다도 훨씬 적었다고 한다.
"어디에서 왔지?"
"한국"
"아, 미국 용병의 나라에서 왔구먼."
유학 초기 미국 대학에서 만난 남미의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말에 단번에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의 또 다른 어둠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불명예이다. "한국도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 미국편을 들어 군대를 보낼 수 있느냐"며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민족해방전쟁을 하고 있는데 베트남이 일본 편을 들어 파병을 하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 남베트남이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역사를 알게 되고 남베트남이라는 것이 부패한 꼭두각시 정권에 불과해 미국의 엄청난 원조와 지원에도 결국 패망하고 만 상황에서, 한국의 파병이 '베트남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할 수도 없어, 낯만 붉히고 있어야 했다.
사실 용병 논쟁은 파병 당시 이미 미국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도 제기됐다. 당시 우리군은 미군 봉급의 3분의 1 수준을 지급받았는데, 이 금액이 국내에서 받은 봉급보다 훨씬 많아 비판적인 의원들로부터 "한국군은 '피의 보상을 노린 용병'이 아니냐"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용산 전쟁기념관의 베트남 참전 전시장의 커다란 팻말이다. 베트남 십자성부대 정문 앞에 세워져 있었던 채명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의 훈령을 크게 재현해 놓은 이 진열물은 2018년 한베 평화재단을 따라 베트남을 방문해서 본 한국군 학살 관련 추모물과 너무나 대비가 됐다. 과연 한국군은 이 훈령을 지켰는가?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지만, 최근 들어 한국 사람들이 자주 가는 여행지 중의 하나가 중부 베트남의 휴양지 다낭이다. 다낭에서 가까운 하미 마을에는 기이한 비석이 하나 있다. 추모비인데, 한 면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지만, 다른 한 쪽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비'다. 1968년 1월 24일 한국군은 이곳에서 130명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이후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추모탑 건설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추모탑 한 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쓰고 다른 한 면에 한국군의 학살 사실을 언급했다. 참전용사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마을 측이 항의의 뜻으로 그 면의 글을 다 없애고 백비로 만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군에 의해 69명이 학살당했다는 퐁니 퐁넛 마을에서도 희생자들의 추모비가 우리를 맞는다. 광남성 주이쑤엔현 투언찌촌 마을 무덤 입구에는 9명의 가족을 한국군에게 몰살당했다는 당소 씨가 베트남어와 영어로 '한국군이 가족 9명을 학살한 범죄의 흔적'이라고 써 놓았다.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1966년 2월 26일, 미 제국주의의 지휘 아래, 남조선의 꼭두각시 군인이 380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베트남 곳곳에는 이와 비슷한, 섬뜩한 '한국군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온 한베 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에 따르면, 이같이 한국군에 학살당한 사람은 80여 건, 총 9000여 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 중 상당수는 어린이들이다. 베트남이 '전선이 없는 전쟁'이었다고 하지만,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들까지 죽여야 했는가? 우리군은 이들 학살을 부정하고 있지만, 한국군이 아니라면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북한군이 국군복을 입고 학살을 저질렀던 말인가?
베트남에 가서 이들 추모비들을 보고 있자, 떠오른 것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등 한국전쟁 과정에서 우리 군이 저질렀던 무수한 민간인 학살과 1980년 광주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 셋은 분리된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셋 중 한국전쟁 전후 학살과 5‧18은 뒤늦었지만 진실화해위원회와 5‧18 진상조사 등을 통해 그 진상이 상당히 규명됐고 희생자들도 명예회복이 됐다. 또 미진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베트남 학살의 경우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 등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다만 미국의 한국군 감찰보고서에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퐁니 마을 학살사건에서 8살 어린이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응우엔티탄이 2020년 민변의 도움을 받아 한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정부가 베트남 학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우회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이에 대한 자료 공개 등 진상규명에 미온적이다. 우리가 훨씬 오래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고, 미국이 노근리 학살에 대해 문서를 공개했고 학살에 가담한 미군들이 증언을 한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소개될 노근리 학살 참조). 베트남정부 역시 한국과의 경제 교류 등을 위해 이들의 진상규명과 손해배상 요구 등을 '제어'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베트남 참전의 그림자는 너무 깊다. 베트남 참전의 빛과 그림자를 생각하며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춘천을 떠나려는데, 베트남에서 만난 응우엔티탄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왜 한국군이 나까지 죽이지 않아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만들었느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