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나폴리'. 개인적으로 전남의 강진·해남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인 통영의 별명이다. 통영은 개인적으로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 2학년 때, 수배를 피해 도망을 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직행한 슬픈 추억을 가진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다도해와 세월을 비껴간 것 같은 아담한 도심, 그리고 한국 최대의 굴 생산지답게 싱싱한 굴 요리로부터 충무김밥, 중앙시장의 시락국 등 풍부한 먹거리와 좋은 지인(고 노회찬 의원의 고등학교 동기이며 이곳에서 '건강한 굴양식'을 하는 시인 장석 씨) 때문에 자주 찾는다.
이 같은 매력과는 별개로, 통영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특히 2018년부터 찾게 된 미륵도 관광특구의 언덕에 서면 그러하다. 이 언덕에 서있는 멋진 현대식 건물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천연석으로 만든 묘비석이 통영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돌에 새겨진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맑다'는 뜻의 글 밑에는 '윤이상 1917~1995'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통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해외간첩단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희생자였던 윤이상의 고향이다. 따라서 이곳에 서면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자부심과 동백림 사건이 웅변적으로 보여준 분단의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2000년대 들어 그가 우리 사회에서 '복권'이 되어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고 통영국제음악당을 지은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8년에는 독일에 있던 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충남 예산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암자가 있는 수덕사가 있다. 그 앞에는 초가지붕을 한, 풍치 있는 수덕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수덕여관 앞에는 땅에 누운 커다란 바위에 글자를 닮은 특이한 암각들이 눈에 띈다. 윤이상과 함께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응로 화백(1904~1989)의 흔적들이다. 일본에서 생활했던 그는 해방 후 귀국해 수덕여관을 인수해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들도 그의 작품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두 명의 세계적인 예술가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의 누명'을 쓰고만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다." "아이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다." 1967년 6월 말. 윤이상을 심문하던 조사관이 조사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서 보니, 벽에는 피로 이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윤이상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사관이 잠든 사이 윤이상은 책상에 있던 사각형 재떨이로 머리를 쳐 자해를 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손가락에 묻혀 쓴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7월 3일부터 17일까지 무려 7차례에 걸쳐 유럽 거주 지식인들과 유럽에 유학한 바 있는 국내 교수들, 이들 교수들과 연결된 학생운동 지도자 등 203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동백림 사건('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을 발표했다. 203명에는 윤이상, 이응로,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등 해외 거주 교민 30명과 황성모 서울대 교수, 김중태, 현승일 등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 이외에 시인 천상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독일에서 공부한 서울대 문리대 교수이자 한일회담 반대투쟁 등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지도교수였던 황성모 교수를 통해 북한이 학생운동을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고 총선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벌이던 학생운동은 풍비박산 났다. 중앙정보부가 공작원들을 파견해 독일과 프랑스에 윤이상, 이응로 등을 사실상 불법적으로 납치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도 들끓었다.
윤이상과 이응로는 공통점이 많다. 서양 예술에 각각 동양적 음악과 동양화 기법을 도입해 주목을 받은 것이 그러하고, 둘 다 1950년대 후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이상이 통영의 죽마고우로 월북한 음악가 친구의 소식을, 이응로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 소식을 물어보려 동백림(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도 비슷하다.
서베를린에 살고 있던 윤이상은 이후 북한대사관을 10여 차례 방문했고 여비 등의 명목으로 금품도 받았다. 자신의 작품 테마로 구상하고 있던 고구려 강서고분도 보고 북한의 실상을 보고 싶어 1963년 북한을 방문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재판과정에서 "북한의 노동당 가입 권유는 일언지하에 거부했으며 북한과 접촉한 것은 결코 사상적으로 동조해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부인 이수자는 윤이상이 돈을 받은 의리 때문에 북한대사관에서 전화가 오면 몸서리를 치면서도 찾아갔고, 다녀와서는 "내가 백림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괴로워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윤이상 등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대접을 받고 금품도 받았으며 일부는 북한은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 체제하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간첩죄에 대해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고, 다만 '적국'인 북한 방문 등에 관해서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이에 화가 난 박정희는 유신 후 판사 재임명제를 도입해 사법부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변질시켰다).
윤이상, 이응로는 국제예술가들의 서명운동과 독일, 프랑스 등의 압력으로 석방되어 독일과 프랑스로 돌아갔다. 황성모 교수와 김중태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 같은 민비연 관련자들도 가벼운 형을 받는데 그쳤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이들 유럽의 지식인들은 국내와 달리 국가보안법 등을 잘 몰랐고 북한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었고, 외화송금 제한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유학생 등은 북한의 호의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많은 유학생 등이 북한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한식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도 동백림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문제는 독일 유학 시절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임석진 교수가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정보기관에 자수를 하면서 불거졌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임 교수를 직접 청와대로 불러 설명을 듣고 공작팀을 만들어 유럽 등에서 관련자들을 잡아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당시 반공에 목을 매고 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이들을 좌시할 수 없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판단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을 무시하고 이들을 독일, 프랑스 등에서 잡아 온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 옥고를 치른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는 "국내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동서독 간 교류를 보고 동백림을 왕래해서 그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사전에 한국대사관이 경고라고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게 무리하게 간첩죄를 씌워 상처를 주었지만 대법원이 간첩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을 간첩으로 발표해버림으로써, 그가 간첩이란 오명을 쓰고 평생 쓰고 살도록 했다. 그 결과 윤이상, 이응로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소위 '반한친북인사'로 만들고 말았다.
주목할 것은 동백림 사건의 해외 불법납치공작의 경험이 1970년대의 비극적 사건들을 잉태했다는 점이다. 1973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과 1970년대 말에 있었던 '김형욱 살해사건'이 그것들이다, 유신 선포 당시 외국에 있었던 김대중은 일본을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서 서울로 끌고 왔다. 김형욱 사건은 더욱 극적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동백림 사건을 터트린 김형욱은 권력에서 밀려나자 해외로 도주, 미국에서 반(反)박정희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프랑스로 유인해 비밀리에 살해한 것이다. 이처럼 동백림 사건은 이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불법해외공작의 효시이다.
윤이상은 1969년 독일로 돌아간 뒤 독일로 귀화했고 1972년 오페라 '심청'으로 뮌헨올림픽의 서막을 여는 등 세계적인 작곡가로 주가를 날렸다. 동백림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성숙해진 그는 1980년 광주학살을 보고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했다. 1988년에는 자신이 직접 옥고를 치르며 체험한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 남북한 정부에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안해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 간의 음악 교류를 성사시켰다.
윤이상은 통영을 무척이나 사랑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1994년 서울 등 국내 주요 도시에서 윤이상음악축제가 열리면서 귀국을 준비했으나, 한국 정부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옹졸하게 요구하자 귀국을 거부했다. 윤이상은 독일 예술에 기여한 공으로 독일 대공로훈장과 괴테상 등을 받았다.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목숨을 거둔 그는 이제 윤이상 생가터에 세워진 윤이상공원의 동상으로 우리를 맞는다. 공원에 세워진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의 천재성과 분단과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의 아픔 등 그의 체취를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윤이상의 음악관을 배울 수 있다.
"우주에는 항상 흘러 다니는 음(音)이 존재한다." "음악은 작곡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음을) 낳는 것이다." 음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서양음악과 달리 그는 도교적 관점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그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의 음악언어는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에 더 가깝습니다. 나의 음악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단결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천의무봉한 시인 천상병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 '귀천'을 생각한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 친구에게 막걸리를 얻어먹은 죄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받고 나와 쓴 '소풍'이란 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통영을 떠나려는데 '소풍'의 슬픈 구절이 생각났다.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사건을 통해 이 땅에서 가장 맑은 영혼을 가진 '귀천'의 시인까지도 이처럼 절규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저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
(중략)
오늘 / 반쪽의 일터에서는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 바람이 바뀌었다고 / 다른 쪽의 사람들은 감옥으로 내 몰리는데 / 이 길이 소풍길이라고? /
(중략)
홀로 밤길을 걷고 / 길을 비추는 달빛조차 몸을 사리는데 / 이곳이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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