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과 부마항쟁, '야당도시'. 이제는 창원의 일부가 됐지만, 마산 하면 개인적으로 아구찜 외에 떠오르는 것들이다. 마산은 부산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지지를 받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됐다. 1990년 이후의 대통령선거와 총선 결과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3‧15 의거와 부마항쟁의 기념 방식의 차이에서 잘 나타난다. 3‧15 의거는 한 때 마산의 자랑으로 사방에 그 기념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옛 중심가에는 3‧15의거기념탑이 우뚝 솟아 마산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념탑을 올려다보고 있자, 3‧15 의거 사상자에 대해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이 했다는 망언이 떠올랐다.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
1960년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민주항쟁 가운데,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대구의 2‧28 민주운동이다('손호철의 발자국' 11. '대구 2‧28 민주운동' <프레시안>, 2021년 3월 31일자 참조). 하지만 3‧15 부정선거 이후 가장 선도적으로 일어나 이승만의 몰락을 가져온 곳은 마산이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에서도 전면적인 부정선거를 했다. 야당인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투표소에 들어가 사전투표 등 부정선거 현장을 적발하고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이날 저녁 민주당사 앞에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1만 명이 넘어섰고 경찰이 발포를 했다. 시위대도 저항하며 여당인 자유당사, 언론사, 파출소 등을 부쉈다. 7명이 사망했고 수 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3‧15 부정선거 후 일어난 첫 항쟁인 3‧15 항쟁이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분노한 시민들은 2차 항쟁(4‧11 항쟁)을 시작했고, 이는 전국적으로 번져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두 차례의 항쟁으로 12명이 사살됐고 수백 명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 민주당 도의원을 '남로당 출신 빨갱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12명의 희생자를 위한 묘지는 1968년에 조성된 것인데, 김대중 정부 시절 성역화 작업에 들어가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기념관과 기념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념관에는 3‧15 부정선거와 두 차례의 항쟁에 대한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바닷가는, 이제 바다 매립과 개발로 인해 찾기가 쉽지 않다. 길을 헤맨 끝에 김주열 인양지를 간신히 찾아가자 그의 상반신을 그린 벽화와 약력 등이 나를 맞았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마산 앞바다를 보고 세워진 표지판이다. 김 군의 처참한 시신이 떠오른 바다를 알려주는 안내판이다.
3‧15 의거에 대한 기념물들이 잘 조성된 반면, 훨씬 '현재성' 있는 부마항쟁은 그렇지 않다. 부산은 그래도 시내 한가운데에 민주공원을 건설하는 등 눈에 띄는 기념물을 만들었다('손호철의 발자국' 30. '부마항쟁', <한국일보> 2021년 3월 1일자). 하지만 마산은 부산과 사뭇 다르다.
부마항쟁 20주년인 1999년 세운 부마항쟁기념물은 일상적인 항쟁기념물과는 전혀 다른, 특이하고 아름다운 조각이다. 문제는 이 조각이 시내 중심가에 있는 3‧15 의거탑과 달리, 과연 그런 조형물이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마산 서쪽 끝에 위치한 서항공원이라는 작은 공원(방송통신대 창원시 학습관 앞)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3‧15 의거에 이어 민주 성지 마산의 영원한 혼이 된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 나가고자 이 조형물을 세웁니다." 문구는 자랑스럽지만, 이 조형물은 창피한 위치에 있다. 한마디로, '찾아오지 말라'는 조각 같고,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한 '망각탑' 같다.
시내에 설치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 구석진 곳으로 귀향을 왔다고 한다.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된 이곳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박정희에 저항해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부담스러운 사건인 것이다.
마산항쟁의 진원지인 경남대학교도 마찬가지다. 경남대학교에는 부마항쟁 30주년인 2009년 10월 마산항쟁의 출발지라는 의미를 담은 '시원석(始元石)'이라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3‧15 민주정신으로 일어난 10‧18 부마 민주항쟁의 그 날을 기억하며'라고 쓰여 있는 이 기념물도 찾아오지 말라는 듯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어, 찾느라 애를 먹었다(부산대학교 기념물에는 '10‧16부마민중항쟁'이라 쓰여 있지만, 경남대학교는 마산항쟁이 이틀 뒤에 일어난 점을 기리는 듯 '10.18부마민주항쟁'이라고 쓰여 있다.).
부마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놓고 10월 16일을 주장하는 부산과 10월 18일을 주장하는 마산이 부딪쳤지만, 10월 16일로 결정됐다. 부마민주기념재단 마산 사무실은 부마항쟁이 격렬했던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다. 부마항쟁이 두 곳에서 일어난 만큼 기념재단도 두 곳에 있다. 기념식은 10월 16일에 하되 부산과 마산 두 곳이 돌아가며 진행하며, 재단 운영권도 3년씩 돌아가며 가지기로 했다. 항쟁 피해 신고를 받고 있는데, 구속자만 1500명인데도 신고한 사람이 2020년 5월 현재 300명대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시 시위대에 의해 불탄 파출소는 이제 소방서로 바뀌었다.
주목할 것은 마산이 박정희 시절 외국자본을 위해 만든 (마산)수출자유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입주 업체는 미국과 일본의 군소 전자업체들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유입됐다. 박 정권은 외국 기업의 노동조합 구성을 금지시켰지만, 간간히 저항이 일어났다. 부마항쟁 때에는 가까운 창원 지역의 노동자들까지 합세해 부산과 달리 노동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특히 1980년대 말 미국으로 원정투쟁을 가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마산‧창원 여성노동자회에 들려 당시의 치열한 투쟁 기록들을 보고 있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산자유무역지역으로 이름을 바꾼 공단은 업종도 바뀌어 이제는 남성노동자들이 대부분이며 노동운동이 미미하다고 한다. "게다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상대적으로 젊은 노동자들이 많은 창원과 달리, 보수적 정치 색깔을 가지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선망하는 교수(경남대학교)직을 던지고 노동운동에 전념해온 임영일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사회교육원 이사장의 설명이다.
"이대로 길을 내고 오른쪽은 공장, 왼쪽은 생활시설을 지으라." 박정희는 창원 지도를 놓고 자로 줄을 그어 지시했다고 한다. 1973년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내걸고 방위산업 등 중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건설한 신도시이자 계획도시 창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중공업단지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적이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원시를 달려보니 그 같은 도시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에서 본 북한 평양의 거리를 달리는 기분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도시 끝에 있는 로켓 모양의 탑이다. 신기해서 다가가 보니 박정희의 친필로 쓴 '정밀산업진흥의 탑'이었다.
창원은 중공업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울산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집중된 노동자 도시로 발달했다. 특히 숙련공 남성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있다. 이들은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전설적인 마창노련(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을 만들었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을 거쳐 이제는 민주노총의 중심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결과가 '진보정치'다.
3당 합당 이후 계속 보수정당이 승리해온 마산 지역과 달리, 창원 지역은 2000년대 들어 총선에서 권영길 두 번, 노회찬 한 번, 여영국 한 번 등 네 번이나 민주노동당과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에게 승리를 선사한 '진보도시'다. 노동자 도시로 알려진 울산보다도 더 많은 진보의원을 배출한 진보정치의 요람이다.
2020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중당 등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안타깝게도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그가 47.3% 득표에 그쳤다면,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34.9%를 얻었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15.8%, 민중당 후보가 1%를 얻어 진보개혁 후보들이 51.7%를 득표했다.
찰스 디킨스의 명작에 <두 도시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다. 이제는 하나의 도시로 통합됐지만 창원시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 창원'과 '보수 마산'이 공존하는, 또 다른 '두 도시 이야기'이다. 역사적인 야당 도시에서 보수 도시로 변해버린 마산과 우리 사회에서 예외적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한 진보 도시 창원의 공존을 바라보며, 도시의 변천과 '도시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진보의 씨를 뿌리다가 황망히 저세상으로 떠난 노회찬 의원이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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