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극우독재' 서막은 부산에서 올랐다

[손호철의 발자국] 10. 부산 : '의회정치 압살'은 1952년 부산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꽃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독재 시절 한국정치에 대해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1952년 영국의 세계적인 정론지인 <타임스>는 이 같은 글을 게재했다. 흔히 '부산 정치파동'이라고 부르는 사건 때문이다.

부산영화제 때문에 부산은 이제 국제적인 영화의 도시다. 특히 세계 인기 스타들의 손바닥을 길바닥에 찍어놓은 헐리우드의 '스타의 거리'처럼, 부산영화제 관련 스타들의 발자국을 찍어놓은 곳은 남포동이다. 이 '영화의 거리'의 자갈치역 방향 입구에 영화관이 하나 있다. 부산극장이다. 이제는 현대식으로 재건축을 했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부산을 대표하는 영화관이다.

"야 이 자식들아! 왜 이래?"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52년 5월 26일, 이 부산극장에 헌병부대가 난입해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은 한국전쟁 때문에 임시수도였으며, 부산극장 국회의사당이 입주해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온 사람들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었다. 이승만은 50여 명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 헌병대로 연행하고 그 중 정헌주 의원 등 12명을 국제공산당 세력이라는 황당한 죄명으로 구속기소했다. 왜 이승만은 이 같은 무리수를 둔 것인가?

▲ 1952년 임시수도 부산의 임시국회의사당이었던 부산극장. 부산 정치파동의 현장이다. ⓒ손호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1948년 제정한 제헌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했지만, 국회가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택했다는 사실이다. 즉 이승만은 국민들이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 국회가 뽑은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한국민주당(한민당) 등 국회가 친일파 심판을 위해 만든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공격했고,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국회의 요구도 일축함으로써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은 보수정당 한민당과 반목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간의 실정으로 1950년 5월 30일에 실시한 제2대 총선(5.30 선거)에서 이승만지지 세력이 참패하게 된다.

위기에 몰린 이승만을 구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잘못된 주장(음모론)을 하기도 했다. 또한 6월 25일 전면적인 남침을 할 때 북한이 서울 이남의 작전지도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원래 목적은 서울까지만 점령하는 것이었다는, 소위 '제한전쟁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5.30 선거 결과를 이승만 중심의 한 단정(단독정부) 세력이 국민들에 의해 심판을 받은 것으로 판단한 북한이 당선된 반(反)이승만, 반(反)분단 세력을 이승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들과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을 모색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한숨을 돌렸어도 이승만은 국회가 대통령을 뽑는 제헌헌법 하에서 치러지는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참패할 것이 뻔했다. 그는 권력 유지를 위해 대통령직선제로 개헌을 추진했지만, 한민당이 이끄는 국회는 1952년 1월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이승만이 꺼내든 비장의 무기는 폭력이었다. 5월 25일 국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부산과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음날 폭력과 근거 없는 '빨갱이 사냥'으로 국회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한민당 계열이었던 김성수 부통령은 이승만을 탄핵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타임스>가 문제의 '쓰레기통' 기사를 발표하는 등 국제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은 국회 해산을 유보했다. 대신 극우 단체들을 동원해 회의 중인 야당 의원들을 피습하고 국회의사당에 의원들을 감금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자 장택상이 대통령직선제의 이승만안과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국회안을 발췌해 '발췌개헌안'을 제안했다. 7월 4일 국회의사당을 군경이 포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기립투표 방식의 표결을 통해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개헌안이 통과됐다. 이로써 이승만 장기 집권의 첫 문이 열린 것이다.

▲ 국회 통근버스를 검문하는 군경의 사진이 임시수도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임시수도기념관에는 기립 거수 투표에 의해 이승만이 요구한 대통령직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사진이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 부산 정치파동에 의한 개헌에 따라 치러진 1952년 대통령선거 포스터 ⓒ손호철

부산 정치파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단순히 이승만의 장기 집권 이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일회성 사건을 넘어 계엄령과 공권력, 그리고 색깔론 등 극우 독재 세력이 이후 수 십 년간 의회정치와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전형적 수법들의 첫 단추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부산 정치파동이 보여주듯이, 이승만을 비롯한 극우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야당을 국정 파트너는커녕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국회를 3권 분립에 의한 동등한 국민의 대표기관이 아니라 자신의 들러리로 간주한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은 이후 한국정치의 핵심적인 병폐 중의 하나가 되어온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스타의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산극장이 한국 민주주의 유린의 첫 단추를 꿴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했다.

'1023'. 남포동 부산극장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부민동 임시수도 거리로 가면 임시수도의 여러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크게 써놓은 바로 이 숫자다. 이는 부산이 임시수도 역할을 한 기간이다.

1950년 8월 18일, 부산은 임시수도가 됐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10월 26일 정부가 서울로 올라가며 임시수도 부산의 운명은 끝나나 싶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고에서 불구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군이 참전해 다시 남하했고, 1951년 1월 4일 수도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졌으며 휴전 후인 53년 8월 14일까지 지속됐다. 모두 1023일이다.

▲ 부산 임시수도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판.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날짜 1023일을 표시해놓았다. ⓒ손호철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에 들어가면 박물관이 나타난다. 이 박물관이 바로 임시수도 정부청사였다. 이 캠퍼스를 나와 뒤쪽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임시정부 기념관이 나온다. 이승만이 생활하고 근무했던 대통령궁이다. 언덕길에는 이승만의 어록 등을 돌에 새겨놓았는데, 그 소개 글이 가관이다. '혜안을 가진 건국대통령'으로 시작되는 이 '이비어천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짧은 어록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를 그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산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정당의 기반인 '보수도시'가 됐다지만(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부마항쟁은 아직도 부산의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한국일보> 2021년 3월 1일자 참조), 오랜 폭정 끝에 국민들에게 쫓겨난 독재자에 대한 찬양글은 이해하기 어렵다. 헌병들이 국회에 난입해 국회의원들을 끌고 가고 계엄령을 선포한 뒤 국회를 군경이 포위한 채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란 말인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임시정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산 정치파동의 생생한 사진들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인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 임시수도 시절 이승만이 머물렀던 부산 경무대. 지금은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손호철
▲ 임시수도기념관에는 한국전쟁과 부산에 대한 전시물이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보론> '피난민의 도시' 부산

눈보라가 휘날리는 / 바람 찬 흥남부두에 / 목이 메어 불러봤다 / 찾아를 봤다 / 금순이 어디로 가고 /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1950년대 부산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다. 그렇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 정치파동의 중심인 임시정부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부산의 인구는 인구 폭발에 따른 도시의 마비를 우려한 정부의 인구유입 제한 조치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이 유입해 한국전쟁 전 40만 명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1953년에는 100만 명 가깝게 늘어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을 비롯한 남한 각지의 많은 시민들이 부산으로 피난 왔다. 이것이 1차 피난이라면, 2차 피난은 북한주민들의 피난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에 대항해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처럼 미군들이 흥남부두에서 피난을 원하는 북한주민들을 함정에 실고 부산에 도착한 것이다.

▲ 용산 전쟁 기념관에 있는 흥남 철수작전 그래픽 ⓒ손호철

문재인 대통령도 바로 이 피난 행렬에 동참한 부모님 덕분에 부산사람으로 자라나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었다. 즐겨 먹던 전통음식 냉면을 먹고 싶던 북한 피난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메밀 대신 흔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바로 밀면이다. 임시수도기념관과 부산미문화원 자리에 세워진 부산근대역사관에 가면 피난의 슬픈 역사들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부산에는 지금도 피난의 흔적들은 남아 있다. 산등성이에 따닥따닥 자리 잡은 낡은 집들은 옛 피난민들이 와서 지은 집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보고 있자 한국전쟁과 피난의 비극들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왔다.

▲ 임시수도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초기 밀면식당 모습 ⓒ손호철
▲ 옛 판자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산 산동네 ⓒ손호철

북한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통일론이 만연했던 당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터질 것이 터졌다고 할 만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군사적 남진'으로 통일을 시도한 북한처럼 이승만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 역시 '북진통일'이었다. 즉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의 정책입안자들, 나아가 적지 않은 사람들도 무력을 써서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북한과 차이가 있었다면, 북한과 달리 우리는 그럴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이 아무리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이 가져온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 나아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그 후유증을 생각하면, 이를 전쟁과 같은 무력적인 방법으로 이루려 한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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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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