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령 5호'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

[손호철의 발자국] 8. 경남 산청‧함양‧거창 : '거창 사건'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한국현대사, 특히 한국전쟁 전후에서 가장 유명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무엇일까? 아마 오랫동안 '거창 사건' 내지 '거창 양민학살 사건'으로 불러온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이 떠오를 것이다. 그 이유는 단일 사건으로 그 규모가 엄청난데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당시 조사가 이루어져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는 등 널리 여론화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거창 사건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의 비극적 요소와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거창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1951년 2월 지리산에서 벌어진 학살을 '거창 (학살)사건'이라 부르지만 거창 학살은 일부에 불과하고 정확한 명칭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이다.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1951년 2월 7일 아침, 산청(정확히 이야기해 산청군 금서면 가현)에서 시작해 함양(지곡면)을 거쳐 2월 11일 거창(신원면 과정리 박산골)까지 학살을 자행했다. 다시 말해, 이 학살은 지리산 동남부를 돌며 5일간 지속된 '연쇄학살사건'이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는 알려진 거창 719명 이외에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희생되어 모두 1424명에 달한다.

하지만 거창 학살사건을 아는 사람도 산청‧함양 학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나 역시 부끄럽지만 이번 역사탐방 이전에는 산청‧함양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거창추모공원을 찾느라 내비게이션을 뒤지면서 산청‧함양 추모공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곳을 방문해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비로소 학살의 전모를 알게 됐다.

▲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희생자 위령탑 ⓒ손호철

문제는 왜 거창 학살만이 알려지고, 정작 학살의 시작인 산청‧함양 학살은 묻히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가 기가 막히다. 그것은 지역 국회의원의 차이였다. 당시 학살에 대한 정보를 몰래 제보 받은 거창의 (무소속) 신중목 의원은 이를 국회 본회의에서 폭로했다. 반면 여당 소속이던 함양 의원, 병원 입원을 핑계로 삼은 산청 의원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에 침묵했다는 것이 산청함양 유족회의 조사 결과이다.

신 의원의 폭로로 국회가 조사단을 꾸며 현장조사를 갔으나, 여순사건 때 무자비한 학살로 '살인마'라는 별명을 얻은 김종원 정보대령이 국군을 빨치산으로 위장시켜 조사단을 공격하도록 했다(김종원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8. '토벌대의 두 얼굴' <한국일보>, 2020년 12월 7일자 참조). 조사단은 이에 놀라 제대로 조사도 못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외신에 학살 사실이 보도되자 이승만 정부는 서면으로 국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산청‧함양 학살을 완전히 누락하고 거창도 187명만 학살한 것으로 보고했다. 이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된 관련 지휘관들은 징역 3년부터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지만, 이후 사면을 받고 풀려나 승승장구했다.

▲ 산청함양추모공원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산청‧함양‧거창 학살의 경로. 1951년 2월 7일 산청에서 시작해 함양을 거쳐 2월 11일 거창에서 끝난다. ⓒ손호철

"이 년들도 죽여 버리자."

"어차피 오늘 밤 호랑이 밥이 될 턴데 뭐."

1951년 2월 7일 아침, 7시경 3대대 군인들은 산청군 가현마을 40가구 100여 명을 모아 뒷동산 골짜기에 4열종대로 앉혀놓고 집단학살했다. 어린 이점순 씨와 두 여동생은 그 와중에도 이렇게 살아남아 부모님을 비롯한 123명의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 지킬 곳은 견고한 벽을 쌓고 나머지 지역은 빈 들판만 남겨라). 2월 2일 이 지역을 담당하는 11사단 9연대는 이 같은 이름의 작전명 5호를 3대대에 하달했다. 빨치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복구 지역의 주민은 전원 총살하라"는 지시였다.

▲ 산청‧함양‧거창 학살을 지시한 작전명령 5호의 내용과 배경 설명 ⓒ손호철

북쪽으로 이동, 산청군 방곡에 도착한 3대대는 오전 10시쯤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부녀자와 노인들이어서 "젊은이들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대부분 "군대에 갔다"고 답했지만, 군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212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다시 북상해 오후 1시 30분 경 함양군 휴천면 점촌에 도착한 군인들은 마을 우물가에 63명을 모아놓고 사살했다. 노하우가 생겼는지 자혜, 지곡, 손곡, 주암, 주상, 화계마을의 주민들을 끌고 북상한 군인들은 경호강변에 있는 서주마을 둔치에 오후 4시경 도착했다. 이곳에서 310명을 학살하고 시신 더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렇게 하루 동안 산청‧함양 10개 마을 주민 705명이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이다.

산청‧함양추모공원은 두 번째 학살지인 방곡에 세워져있다. 역사관이 리모델링 중이라 추모공원만 볼 수 있었던 거창과 달리, 이곳은 추모관에 사건의 배경, 진행 과정, 이후 명예회복 과정들을 다양한 시각적 자료와 함께 잘 전시해 놓았다(거창 역시 답사 후 리모델링을 끝내고 역사문화관을 개장했다고 한다).

▲ 방곡마을 학살을 그래픽으로 만든 슬라이드 ⓒ손호철

전시물 중 가슴 아픈 것은 사체로 발굴된 300여 명을 분류한 결과이다. 이중 여성이 51.3%였고, 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리산 밑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어린이들이 국군에 의해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가며 자신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가슴이 메어졌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지휘라인에 있었던 사단장 최덕신 장군, 연대장 오익경 대령,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대대장 한동석 소령 등 학살주범 4인을 빚어놓은 조각상이다. 다들 학살의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총애로 승승장구한 이들 가운데 이력이 특이한 사람은 최덕신이다. 그는 박정희 아래에서 주독대사,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다 월북해버렸다. 민간인 학살 주범의 월북이라니, 기이한 이야기이다.

▲ 산청함양추모공원 기념관에는 김종원 등 학살 주범 4인을 잊지 않기 위해 이들의 모습을 부조로 만들어 놓았다. ⓒ손호철
▲ 거창사건추모공원 입구에는 1954년에 있었던 학살자들에 대한 재판판결문을 크게 설치해 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사면을 받고 승승장구했다. ⓒ손호철

산청 생초초등학교에서 야영을 한 다음 날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간 학살군은 9일 덕산리 청연골 주민 84명을, 10일 대현리 탄랑골 주민 100명을,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무려 517명을 학살함으로써 5일 간의 잔혹한 학살극을 마무리했다.

산청‧함양추모공원을 떠나 거창사건추모공원에 다다르면 길가에 '거창사건 희생자 박산골 학살처'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화살표를 따라 산 쪽으로 올라 골짜기에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와 '총알흔적 바위'라는 팻말이 나타난다. 517명의 목숨이 처참하게 사라진 박산골이다. 70년이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바위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놀랍게도 이중 3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거창 학살을 알리는데 일조했다.

▲ 거창의 민간인 517명이 희생당한 박산골 총알바위. 아직도 바위에는 총알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손호철

거창사건추모공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안과 밖의 차이'다. 밖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 '거창양민학살사건 판결문', '거창양민학살 사건 안내도' 등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사방에 표기돼 있다. 정부가 '거창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이라는 표현을 팻말에서도 막아왔다는 이야기다.

거창 사건은 다른 많은 학살 사건들과는 달리 용감한 지역 국회의원 덕분에 학살 당시의 비극이 알려지는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명예회복의 길은 길고 험난했다. 추모공원 초입에 설치되어있는 문병현 유족회 부회장의 공로비가 이를 증언해주고 있다.

암흑과 통곡 속에서 살아온 유족들은 보도연맹 등 다른 학살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유족회를 만들어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에 들어갔다. 특히 5월에는 학살 당시 학살 대상자를 선별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신원면장 박영보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가 거부하자 분노한 유가족들이 그를 생화장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거창 학살은 다시 한 번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국회는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에 들어갔고, 문 부회장의 주도 아래 시신을 수습해서 합동묘소를 설치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추모비도 설치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군사정부는 추모비를 부숴 묻어버렸고 합동묘역을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문 부회장을 구속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고발했다.

▲ 4‧19혁명 후 설치된 거창학살희생자 위령비를 5‧16 쿠데타 후 군부가 부숴 버렸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제공
▲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희생자 추모 조각상 ⓒ손호철

긴 어둠은 민주화가 된 뒤인 1996년, 즉 학살 45년 만에 국회가 명예회복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끝났고, 2004년 거창추모공원을 준공했다. 그러나 같은 학살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역사적 체험 때문에 산청‧함양과 거창 학살 유가족들은 추모와 명예회복사업을 함께 추진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다행히 두 유가족회는 2018년 국가에 대한 배상요구 등을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거창을 떠나며 생각해보니, 산청‧함양‧거창의 민간인 학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후 베트남전쟁, 그리고 1980년 광주의 시민 학살로 이어져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억울한 영혼들이여, 고히 잠드소서.

▲ 거창 학살 현장 사진

<보론> 한국전쟁 전후 학살 유가족 박정희?

"마산 유족회입니더."

"저는 부산기지사령부사령관 박정희라고 합니더. 내도 같은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십니꺼?"

4‧19혁명 후 한국전쟁의 학살 유가족들이 전국유족회를 조직해 명예회복에 나선 때인 1960년 8월25일, 전국유족회 회장인 마산유족회 노현섭 회장에게 박정희부산기지사령부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박만순, "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사면 안 되겠심니꺼?'", <오마이뉴스> 2020년 11월 30일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도주하다 사살됐으니, 자신도 유족이라는 박정희의 말은 사실이었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6, '대구는 진보도시였다',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고). 박상희의 부인인 조귀분은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열심히 활동했고 박정희는 형수를 위해 유해 발굴 때 군 트럭도 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뒤 5‧16 쿠데타에 성공하자 표변한 박정희는 한국전쟁 유가족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등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을 탄압했다. 쿠데타 이틀 뒤인 1961년 5월 18일 노현섭 씨는 영장도 없이 방첩대에 연행되어 혁명재판부로부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2년까지 11년 간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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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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