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책임제의 중요성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은 중앙집권적 경제질서로 운영되는데 여기에서 핵심기관은 "국가주권의 행정적 집행기관이며 전반적 국가관리기관"(헌법 제122조)인 내각이다. 북한은 오랫동안 내각책임제‧내각중심제를 강조해왔다. 1980년대에는 정무원책임제․정무원중심제를 제대로 실천하자고 김일성 주석이 자주 강조했었다.
내각책임제를 '구호'가 아닌 '실체'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활발해졌고, 5개년계획의 실행에서는 더욱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19년에 수정 보충된 사회주의헌법에서 "내각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높인다"라고 규정(제33조)한 것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북한의 내각은 우리의 정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내각의 성‧중앙기관 산하에 국영기업소들이 수직계열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각 화학공업성 산하에 화학공업부문의 국가특급‧1급‧2급 기업소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기업소들의 전 생산과정을 내각 화학공업성에서 관리하고 통제한다.
계획 수립과 국가계획위원회
경제계획 수립과정에서 각 공장‧기업소의 생산계획이 성‧중앙기관에 집결되며, 성‧중앙기관은 각 공장․기업소의 생산계획의 타당성을 검토한 뒤에 내각 국가계획위원회에 보낸다. 물론 전년도(통상 3개년) 생산량(생산액을 기준으로 한 '액상계획'도 포함)에 의거해 사전에 '계획숫자'를 공장‧기업소에 내려보내기는 한다. 국가계획위원회의 피드백을 거쳐 확정된 경제계획은 '법적인 성격'을 갖는다. 생산계획에 미달되면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
북한의 모든 공장‧기업소들은 내각의 성‧중앙기관들 밑에 주렁주렁 달린 과실이나 나뭇가지 모양으로 편제되어 있다. 내각의 성‧중앙기관들은 해당 부문의 공장․기업소들의 현황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이 꼭 그렇게 규정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보신과 형식주의에 빠진 중앙의 경제 간부들이 자기 책임을 밑에 전가하거나 책상놀음‧문서놀음을 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또한 일부 특수기관들은 자기들이 보유한 공장‧기업소에 대한 내각의 통제를 피해왔다. 특수기관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공장‧기업소들을 독자적으로 운용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던 것으로 관측된다.
내각총리에게 힘 몰아주기
북한은 지금 내각으로 하여금 군수공업을 제외한 모든 경제부문에 대한 전권을 갖도록 하기 위해 내각책임제‧내각중심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내각의 성‧중앙기관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하고 새로 임명된 상‧위원장들에게 권한을 충분히 부여함으로써 국가적 경제관리에 성공하려고 한다.
김정은 당총비서 및 국무위원장은 김덕훈 내각총리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하도록 하여 그의 정치적 권위를 높여주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실제 권한을 행사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부문(당과 특수기관)에 대해서는 당조직비서 조용원(당정치국 상무위원)이 나서서 비판과 제재를 가하도록 하고 있다.
북한에서 이러한 당‧정 구조가 갖춰진 것은 제8차 당대회가 처음이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김정은 총비서와 최룡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외에는 김덕훈 내각총리, 조용원 당조직비서, 그리고 군대와 군수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리병철 당 중앙군사위위원회 부위원장 5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위 집단을 보면 김 위원장이 당‧국가 정책의 기본방향에서 경제 살리기와 국방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거듭 확인된다.
내각책임제는 왜 정착되지 못했나?
북한은 어려운 경제사정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시스템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지 않다. 현재의 경제관리 시스템을 개선하면 충분히 성장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북한의 최근 전략적 노선과 정책을 보면 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한 가지 의문은 40여 년 동안 내각책임제(이전의 정무원책임제)를 강조해왔는데 여태 그것이 잘 이뤄지지 않았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 의문의 일부는 올해의 정책 변화를 통해 해소되었다. 김정은 집권기에 들어와 당의 세도와 관료주의‧부정부패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부패 관료들과의 싸움을 어느 정도 매듭지은 상황에서도, 이것이 경제부문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김 위원장에게 정책자문을 해온 젊고 혁신적인 경제 간부그룹이 특수기관들의 경제활동을 내각 책임 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조언했던 것 같다.
특수기관들이 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생산성이 높고 수익이 큰 국영기업체들을 보유한 현상은 수십 년 된 관행이었다. 그 출발은 특수기관 소속원들의 복지(후생)를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보유 기업체들이 늘어남에 따라 거대한 기업집단(그룹)이 형성된 데다가 그 기관들의 권력 때문에 내각조차 이 국영기업체들에 대해 별개의 경제부문으로 생각하고 관리를 포기했던 것 같다.
수령경제‧당경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국내의 북한경제 전문가들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기초해 내각이 담당하는 민간경제 외에 수령경제, 당경제, 군수경제가 있으며 민간경제 이외의 기업소들이 국가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너무 커서 민간경제 활동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고, 이것이 북한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해왔다.
실제로 수령경제, 당경제, 군수경제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특수단위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웠다. 다만 몇 가지 추정을 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당기관들의 경우 '유급(有給)' 간부들의 임금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당비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한계선을 넘어섰을 수 있다.
북한의 군수경제에는 현대적 병기 생산체계를 담당하는 국방공업 외에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후생을 담당하는 후방공급부문(인민무력성 담당)이 있는데 후방공급부문이 비대해지면서 군인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공급을 넘어 여러 부문의 기업체들에게 수산물‧식료품‧생필품 등을 공급하면서 이득을 챙기는 현상이 벌어졌을 수 있다.
때로는 군납용품을 기업체 등에게 판매하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군 관련 기관 외에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도 전국적으로 상당수의 소속원을 보유하고 있고, 이 기관들도 국영기업소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이 '수령제 국가'인 점에서 보면 금수산기념궁전 관리 및 최고영도자의 친인척 지원 등의 수령경제 부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규모 상으로 별도의 경제부문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있는 것 같다.
당중앙위원회 39호실 같은 곳에서 이 재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특수기관의 '단위특수화'의 대상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단위특수화와 본위주의에 대한 전쟁에서 예외를 두지 말 것을 천명함에 따라 특수기관들에서는 지금 긴장감이 감돌 것이다.
북한이 올해부터 단위특수화와 본위주의에 빠져 있는 특수기관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부패문제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 즉, 내각책임제의 강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시스템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는데 있어서 내각책임제‧내각중심제만큼 중요한 과제는 없다고 할 것이다.
당-국가시스템과 당의 지도
한편, 북한의 당-국가시스템은 내각 성‧중앙기관과 그 산하의 국영기업체들에게 생산활동 전반을 맡겨두지는 않는 구조이다. 조선로동당은 국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고(헌법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그 지도는 당적 지도와 정책적 지도를 포함한다.
당적 지도는 범위가 포괄적이며 내각 성원들과 국영기업소 지배인 등 모든 경제단위의 간부들은 당원으로서 당생활지도, 당사상생활지도를 받을 뿐 아니라 당으로부터 여러 형태의 지도를 받게 된다. 정책적 지도는 해당 시기의 당의 전략적 노선, 해당 부문의 개별 정책에 대한 지도를 포함한다.
당의 지도가 과도하면 자칫 '당의 행정대행'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 관행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어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김정은 집권기에 들어와서는 행정대행 현상과도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시장'과 사회주의 상업체계
북한경제의 구조적 특징을 파악하는데 있어 '시장' 문제는 중요한 측면의 하나다.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기본으로 하고 시장을 보조적 수단으로 간주해왔다. 소비재의 유통부문에 해당하는 '시장'은 사회주의사회의 과도기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들의 생필품 공급이 충분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또는 농부산물 판매가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농민시장을 인정해왔다.
북한은 사회주의 상업체계를 통해 국영상점망을 정상적으로 가동하여 생필품을 충분히 공급(판매)하고 내구성 소비재는 주문공급제에 의해 판매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국영상점을 비롯한 상업체계가 상당히 무너져 자연발생적인 장마당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2002년 7.1조치 이후 시장이 늘어나는 가운데 2003년부터 시 지역을 중심으로 종합시장을 설치했고 종합시장은 400여 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평양에서 '광복거리중심'이라는 백화점식 쇼핑몰이 개장된 이래 주민들의 인기를 끌면서 이런 쇼핑몰이 늘었고 요즘은 식료품 판매를 위주로 하는 슈퍼마켓 방식의 상점이 북한 전역에서 늘어나는 추세이다.
북한 경제당국은 시장을 국가관리 하에 두는 정책을 유지한다. 시장판매자와 이용자들이 늘어나더라도 시장관리소를 두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종합시장과 농민시장, 장마당 등이 급격히 늘어난 현상에 대해 국내의 일부 경제학자들은 '시장화'에 주목하면서 마치 북한이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이 평가한다. 그러나 북한이 시장을 국가 또는 지방정부(도‧시‧군 인민위원회)의 관리 하에 두는 원칙에서 바뀐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중국),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경제(북한)에서의 시장의 차이는 너무 크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장은 유사하지만, 그 시장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의 시장은 판이하다. 북한의 시장을 외부에서 관찰할 때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북한 사회주의에서 '시장'을 용인하는 이유는?
북한은 사회주의사회에서 왜 시장을 용인할까. 첫째, 주문공급제와 생필품의 국영상점 판매만으로는 인민들의 상품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사정에 있다. 이 때문에 시장을 허용하고 있으니, 역설적으로 생필품과 내구성 소비재의 공급 사정이 좋아지면 시장의 역할은 줄어들 것이다. 북한 경제당국은 시장의 규모, 판매 허용상품의 종류, 장사 가능 연령 등을 조정함으로써 시장의 지나친 확대를 막아왔다.
둘째, 북한 경제당국은 '시장신호'(가격, 물동량 등)를 관찰하여 상업유통부문에서 국정가격 등에 반영하고 있다. 북한은 '시장신호'라는 표현을 주체경제학 이론이나 정책문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장신호를 그만큼 중시한다는 방증이다.
셋째, 사회주의경제학 이론과 관련된 측면인데, 상품-화폐관계를 '형태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사회는 과도기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기본양식인 상품-화폐관계를 완전히 없앨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상품-화폐관계를 전면적으로 허용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상품-화폐관계를 형태적으로 이용하면서 이를 전면적으로 허용하지는 않는다. 시장을 허용하지만 시장을 전면화하여 생필품 공급을 시장에 맡긴다는 생각은 없는 것이다. 다만 가치법칙의 경제적 공간들을 이용해 인민들의 편의성(시장 이용의 편의와 가격 조절 기능)을 높이겠다는 생각은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사회주의 전 기간에 이를 유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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