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기본협약 무시하는 국책은행?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노사관계 개입 않는다면서 쌍용차엔 대놓고 협박

"쌍용차 노사에게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고, 흑자가 날 때까지 쟁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라. 그러지 않으면 쌍용차에 단 한 푼의 돈도 지원하지 않겠다."

지난 1월 12일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이 온라인으로 기자간담회를 한다기에, 평소에 '산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도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저 얘길 듣는 순간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다. 에이, 잘못 들었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이동걸 회장은 그날 저 얘길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해 주었다. 아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명백한 ILO 기본협약 위반

이동걸 회장의 발언은 자세히 따져볼 것도 없이 ILO(국제노동기구) 협약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내용이다. 특히 ILO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의 몇 개 안되는 조항들 중 하나를 말이다.

★ ILO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1948년) 제3조

1. 노동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그들의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

2. 공공기관은 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 권리의 합법적인 행사를 방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삼가하여야 한다.

산업은행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금융기관으로 ILO 협약이 규정한 '공공기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방해하는 어떠한 간섭도 삼가야 한다. 그 권리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이 노동 3권, 즉 노조를 결성하고 교섭을 요구하고 쟁의를 할 권리가 놓여 있다.

그런데 ILO 협약을 비롯한 국제조약 이행을 책임져야 할 공공기관장의 위치에 있는 이동걸 회장이 ILO 협약을 위반하는 언행을 공개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언급한 것이다. 쟁의를 할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이다.

ILO 협약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런데 노사 합의로만 가능한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을 강요하고 나선 것이다. 이 문제 역시 사용자에 대한 결사의 자유를 공공기관이 간섭, 억압한 것으로 ILO 협약 위반에 해당한다.

결사의 자유 포기 안하면 불이익 주겠다?

87호 협약만 위반한 게 아니다. 딱 2개의 조항으로 이뤄진 ILO 제105호 강제노동 금지 협약의 각 조항을 모두 위반하고 있다. 몇 개 안 되는 조항들, 이동걸 회장은 이 모든 걸 위반하는데 불과 몇 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것도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 ILO 제105호 강제노동 금지 협약(1957년)

<제1조> 이 협약을 비준하는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은 다음에 규정한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이를 이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가) 정치적 강압이나 교육의 수단이나 정치적 견해 또는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제도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거나 표현하는 것에 대한 제재

(나) 경제발전을 위하여 노동을 동원하고 이용하는 수단

(다) 노동규율의 수단

(라) 파업 참가에 대한 제재

(마) 인종, 사회, 민족 또는 종교적 차별대우의 수단

<제2조> 이 협약을 비준하는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은 제1조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폐지를 보장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한다.

ILO는 파업 참가 시 불이익을 주는 것은 사실상 강제노동을 강요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결사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일체의 금융 지원을 할 수 없다는 불이익을 약속한 이동걸 회장의 발언이 딱 여기에 해당한다. 공공기관은 강제노동 폐지를 위해 효과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기관장이 앞장서서 어기고 있는 꼴이다.

6일 뒤에 나온 대통령의 ILO 협약 비준 약속

이동걸 회장의 ILO 협약 위반 발언이 있은지 6일 뒤인 1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새해 첫 기자 간담회를 진행했다. 어느 기자가 재벌개혁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다소 초점에서 벗어난 대통령의 답변이 나온다.

"법 제도적인 공정경제에 관한 개혁은 공정경제 3법의 통과로써 일단 대체로 마무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보다 노동존중사회를 위해서 노동관계 3법도 통과가 되고, 그것을 통해서 ILO 핵심협약에도 우리가 비준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비준안이 국회에서 처리 중에 있습니다. 그런 법들을 통해서 노사관계에도 보다 균형 있는 관계로 그렇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조속히 하겠다는 얘기다. 비준하겠다는 협약 중에는 이동걸 회장이 정면으로 위반한 제87호 협약도 포함되어 있다. 행정수반인 대통령이 비준을 약속한 협약, 이걸 불과 며칠 전에 공공기관장 한 명이 무시한 거다. 손발이 안 맞는 걸까, 아니면 기관장 한 명의 돌출행동일까.

2월 임시국회 비준 약속한 고용노동부

이동걸 회장의 기자 간담회가 벌어지던 때는, 한국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에 명시된 ILO 협약 비준 및 노동기본권 보장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유럽연합(EU)이 제기한 무역분쟁이 2년 가까이 진행되다 마지막 단계인 패널 보고서 작성이 이뤄지던 시점이다.

1월 말에 공개된 패널 보고서에는 다행히 한국 정부가 EU와의 자유무역협정에 명시된 내용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EU는 한국 정부가 실제 약속을 이행하는지 여부를 지속 감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1월 25일 고용노동부 박화진 차관은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 그다음에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 본회의가 12월 9일에야 개최되었기 때문에 외통위가 12월 임시국회 때도 제 기억으로는 외통위는 현안이 없어서 개최되지 못했고, 그래서 2월 국회에서는 저희들이 외교부와 협력해서 3개 비준동의안이 국회 외통위를 통과해서 본회의 의결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할 예정입니다."

고용노동부가 걱정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늘었다. EU가 감시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이 시점에 공공기관장이 ILO 협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얘기를 쏟아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국제조약을 국책은행장이 무시하도록 그냥 내버려둔다면, 2년 넘는 노력으로 겨우 협정문 위반을 피해간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협약 비준 전이라도 문제가 된다

어쨌건 한국 정부가 아직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한 상태가 아니니 협약 위반 여부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황당한 인식을 가진 분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 분들의 소망과 달리 ILO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은, 비준 여부와 무관하게 이행 의무가 부여되는 가장 기본적인 협약이다.

그래서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협약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제소가 가능하다. 제소할 수 있는 주체는 ILO 회원국 정부나 노동자단체·사용자단체 누구나 가능하다.

즉, 노동조합단체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동걸 회장의 간담회 내용을 ILO에 제소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제 갓 EU와의 무역분쟁이 마무리되는 국면인데, 공공기관장의 말 한마디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야 되겠는가.

그때그때 다른 산업은행의 태도

2018년 군산공장 폐쇄 사태 당시 산업은행은 GM과 협상을 벌여 신차 배정 등에 합의하며 무려 8,100억 원에 달하는 국민 혈세를 한국지엠에 지원한 바 있다. 그 후 2년 동안 노동자들은 임금동결과 성과급 제로의 희생을 강요받았지만, 카허 카젬 사장을 비롯한 임원과 고위 관리직들은 매년 성과급을 지급받았다.

1조 가까운 국민 혈세를 투입한 기업에서 경영실패의 책임을 가장 크게 져야 할 임원·관리직들만 성과급 잔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산업은행 태도를 묻는 국회 정무위 배진교 의원실(정의당)의 질의에 대한 산업은행의 답변이 더 걸작이다.

"임금 체계 및 성과급 지급 규모는 노사간 합의사항으로 저희은행이 관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람"

아니, 그렇다면 어째서 쌍용차에 대해서는 노사간 합의사항인 단체협약 유효기간에 대해서, 그리고 ILO가 보장한 결사의 자유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관여를 하는 걸까? 게다가 그걸 하지 않으면 일체의 금융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말이다.

비슷한 사례가 한 가지 더 있다. 항암치료조차 거부한 채 한 달 가까이 부산에서 뚜벅뚜벅 걸어 청와대로 향해 오는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문제다. 현재 산업은행은 쌍용차와 함께 한진중공업의 주채권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산업은행은 보도자료를 통해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채권단과 김 지도위원의 복직 및 금전 보상에 대해 의견을 나눴으며, 노사가 결정할 사안으로 채권단이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한진중공업과 한국지엠 사안에 대해서는 노사가 결정할 사안이라 절대로 개입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는 산업은행, 쌍용차에 대해서는 노사가 결정할 사안에 이렇게 저렇게 해오지 않으면 절대로 지원할 수 없다는 이동걸 회장. 그럼 노동자들은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ILO 협약이라는 국제적 약속 이행과 국격이 걸린 상황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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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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