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의 숨은 주역, 김훈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중국 인민해방군의 양림과 김훈

중국인민해방군과 홍군 장령 양림

중국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군대이다. 이 명칭은 1946년 처음 사용되었다. 1948년 11월 1일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전군 조직 및 부대 번호 통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되면서 중국인민해방군을 정식으로 사용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병력은 약 200만 명이며, 2018년 기준으로 국방비는 약 1조 1000억 위안을 상회한다.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90조 정도다. 2020년 한국의 국방비가 50조 원 정도인데, 중국은 한국의 4배 가까이 국방예산을 쓰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한국전쟁 때 강렬하게 등장하였다. 특히 인해전술로 한국군을 상대했던 '중공군'으로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의 등장으로 한국전쟁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또 다른 분단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그 당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수십 년이 지나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국인들에게 인민해방군은 그렇게 인식되어 왔다. 중국인들에게 중국인민해방군은 일제를 물리치고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군대로 기억되어 왔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1937년 7월 이후 중국 국민정부의 군대였다. 중국 국민혁명군제8로군, 약칭 '팔로군'이었다. 그 이전 1928년에는 '홍군(紅軍)'으로 불렸다. 홍군 가운데 대표적인 한국인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중국 포병의 귀재로 알려진 '무정 장군' 즉 김무정이었으며, 다른 한명은 김훈이었다. 김훈, 중국 이름 양림은 홍군의 대장정 시기인 1936년 11월에 허난성 뤄양(洛陽) 도강 작전 중에 순국하였다.

흑룡강성 상지시의 자오이만과 이추악

쌍즈시(尙志市)에는 중국의 전국구 항일 여전사가 있다. 그가 자오이만(趙一曼)이다. 한국의 유관순과 같은 존재다. 베이징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도 선양의 9․18역사박물관에도 그가 있다. 헤이룽장성의 성도 하얼빈뿐만 아니라 각 도시에 자오이만의 이름을 딴 거리 '일만가'를 흔히 볼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 자오이만은 프랑스의 잔다르크 같은 존재다.

쌍즈시에서의 자오이만은 좀 더 특색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자오이만기념관은 쌍즈시가 야심차게 기획하여 개관한 곳이다. 이곳에는 중국 최대 규모의 비림(碑林)까지 조성돼 있어 특화된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비림에는 한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의 휘호도 음각돼 있을 정도이다. 자오이만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기념관이다. 그런데 자오이만을 이끌고 함께 항일투쟁했던 이추악(李秋岳)에 대해서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전혀 무지하다.

이추악은 황포군관학교 교관인 양림(楊林)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김금주(金錦珠), 평양숭실학교를 다닌 이추악은 평양학생운동의 주도적으로 이끈 양림을 알게 됐지만 양림이 일제가 내린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면 양림은 어떤 인물인가.

양림, 김훈은 누구인가?

양림(1901~1936)은 1901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김훈(金勛). 그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바로 신흥무관학교와 연관이 깊다.

1911년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통화현 합니하를 거쳐 고산자에 자리를 잡는다. 졸업생이 약 35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나라 잃고 울분에 찬 열혈 청년들이 3․1운동 직후에도 고산자(古山子)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를 찾았다. 그 가운데 김훈도 있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양림은 지청천, 김경천(金擎天), 신팔균(申八均, 그의 호가 동천) 등 이른바 '만주 삼천'으로 불린 명 교관에게서 민족교육과 무관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청산리 대첩에도 참가한 김훈은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를 통해 청산리 전투 상황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신문> 97, 98호에 걸쳐 게재된 '북로아군실전기'는 김훈의 구술을 정리한 형태였다. 크게 전투전 적과 아군의 상황, 양군의 대립, 청산리 전투 등 전투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상황을 초급장교인 김훈이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서술하였다. 청산리 전투 상보로서 손색이 없는 귀한 자료를 작성하였다.

김훈은 상해임시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당시 임시정부 차원에서 윤기섭과 양림에 대한 환영회가 인성학교에서 개최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좀더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원했다. 1921년 김훈은 임시정부의 소개로 당계가 운영하고 있는 운남강무당에 입학했다. 운남강무당은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이 나온 곳이며, 중국의 전설적 군인 주더(朱德)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평생 반려자 이추악을 만나다

운남강무당 18기 생으로 입학한 양림은 양주평(楊州平)이란 가명을 썼다. 그는 늘 우등생이었으며, 일본인 교관과의 목검 대련의 승리로 유명해 졌다. 이 때 함께 공부했던 저우바우중(周保中)은 학교 교관들이 고려 학생 양주평을 칭찬하면서 학생들의 학습을 독려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1924년 가을 이추악은 애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양림이 운남강무당에서 교관수업을 받고 있을 때의 일이다. 곤명성 운남까지 애인을 찾아 나선 이추악을 본 양림은 목이 멨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서 4시간 소요되는 곤명까지 단신으로 찾아온 이추악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소.”

“당신과 함께 혁명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데도 갈 수 있지요.”

다음해 둘은 결혼했다. 양림은 부인에게 항일투쟁에 보다 적합한 이름을 짓는 게 어떠냐고 제의한다. 중국 근대 혁명열사인 추이진(秋瑾)과 지금도 중국인들의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칭송하는 위에페이(岳飛)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추악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김금주가 아닌 이추악으로 뜨거운 항일투쟁의 삶을 살아갔다.

1925년 1월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훈련처 교관을 맡았다. 황포군관학교는 손문이 설립한 중국 육군군관학교이다. 중국 광주 황포강에 위치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황포군관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4기생으로 활동했던 황포군관학교에는 수많은 한인 학생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이국 땅에서 중국인 교관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바로 그곳에서 양림은 교관으로 활약하면서 한인 청년들의 조국애를 담금질했다.

이때 황포군관학교 정치위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양림을 아꼈다. 그의 배려로 국공합작이 한창인 1927년 양림과 이추악은 새로운 군사지식과 폭넓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약 3년 간의 모스크바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각자 항일 투쟁의 길을 갔다. 양림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를 만드는데 주력했으며, 홍군의 장정길에 올랐던 1936년 2월 장렬하게 희생됐다.

이추악은 1934년 10월 헤이룽장성 연수현과 방정현에서 특별지부 서기로 활동했으며, 1932년 여름부터 남편 양림과는 긴 이별을 했다.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이추악 역시 남편 양림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1936년 9월 3일 헤이룽장성 통허시엔(通河縣) 서문 밖에서 총살당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1936년 일제에 의해 희생당했다. 그들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은 동북의 차디찬 칼바람을 녹였으며, 이방인 중국인들은 지금도 양림과 이추악에 대해서 존경심을 보이고 있다.

잊혀진 양림(김훈), 기억을 소환하다

양림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걸출한 인물이었음에도 중국의 국공 내전의 중심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범석은 그의 자서전 우둥불에 김훈의 소식을 '행불'로 처리했다. 냉전과 분단이 생산한 인식의 소산이다.

올해는 청산리 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상세한 전투상황을 세상에 알린 양림, 아니 김훈을 한국독립운동사의 전면에 복원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는 시대를 반성하고 미래의 평화를 계획하는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동반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한중 양국이 고민하고 실행할 때이다. 그것이 결국 후대들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현 세대들의 책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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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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