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겁니다"

[발로뛰는 동네의사 야옹선생의 지역사회 진료일지] 시시해도 괜찮아

안녕하세요. 동네의사 야옹 선생입니다.

제가 프레시안에 왕진과 방문 진료를 하며 경험한 이야기들을 올리다 보니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마음이 따뜻한 의사라고 추켜 주시는 분들을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대단하지도, 그닥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도 아닌, 평범한 의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대단하지 않은 답답한 얘기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일하는 민들레 의료사협은 대전에서도 취약계층이 많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도 많고, 장애인들, 가난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 집들을 방문해보면 사연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아니, 사연이 하나만 있는 집이 드문 편입니다.

가족들이 서로 모시지 않으려고 해 요양보호사가 없을 때는 쫄쫄 굶고 있는, 죽을 날만 기다리신다는 어르신도 있고,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 장애인들도 있고, 자녀들이 줄줄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80이 넘어까지 자녀들을 돌보느라 죽지도 못하겠다는 어르신도 있습니다. 진료실에서 “안녕하세요. 어디가 아프세요? 오늘은 이 약을 드려 볼게요.“ 하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그분들의 삶을 목격하고, 그분들의 아픔을 해결해본답시고 뛰어들면서, 사실은 오히려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문제들을 더 많이 만납니다.

ⓒ박지영

얼마 전 항암치료 중인 환자가, 항암치료제 부작용으로 구토를 너무 심하게 한다고 연락이 와서 왕진을 나갔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절대적인 안정과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지요. 동거 중이던 사람의 폭행 때문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본인의 집에서 도망 나와 인척 집에 몸을 의탁해 있었습니다.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경찰이 다녀갔는데…… 사실 제가 고소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니, 왜요?! 이렇게 계속 맞으면서…. 처벌을 원하지 않으시나요?!"

"그 사람도 불쌍하잖아요…."

반복적으로 협박과 폭행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까지 있는 동거인이지만 이분에게는 그래도 긴 시간을 같이 해왔던 가족인가 봅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관계의 끝이 뻔히 보이는데, 본인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실한데도 당사자에게는 아닐 수도 있나 봅니다.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또 다른 답답한 상황입니다.

몇 년 전 사고로 경수 골절이 된 후 사지 마비로 지내는 남자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가족들이 어떻게든 재활을 도와 일으키려고 노력 중인데, 두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일단 본인이 의지가 없습니다. 젊어서 큰 사고를 당하셨기 때문인지, 매일 잠만 주무시고 무기력한 상태로 우울해하며 가족들 애를 태우고 계십니다. 또 다른 걸림돌은 이분을 돌보겠다고 나서는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체격이 건장한 남자분이라 이분을 앉히고 닦아주고 씻기는 데 보통 체력으로는 힘들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남자 활동지원사들도 와서 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돌아가 버린다고 하니 본인도 기운이 날 수가 없겠지요. 민들레 지역사회의료센터에서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같이 힘 내보자고, 노력하면 휠체어도 타시고 아이들 학교에도 가실 수 있다고 동기부여를 하지만 대답만 하실 뿐 진전이 없고, 활동지원사도 지금 구해지지 않아 막막합니다. (지면을 이용해 광고도 좀 하겠습니다. 혹시 대전 지역에 의욕 있는 활동지원사가 계시면 꼭 민들레의료사협 지역의료센터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돌봄을 받는 분들과 돌봄을 주는 분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 또한 힘든 상황을 만듭니다. 중증 근무력증으로 혼자서는 생활이 힘든 장애인이 한 분 있습니다. 이분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계신 활동지원사가 한 가지 도저히 못 하겠다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양치질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해도 양치질은 못 해 주겠다 하십니다. 사실 활동지원사가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지요. 본인은 근무력증으로 양치질이 힘드니 가족이나 활동지원사가 도와줘야 하는데 양쪽 모두 일을 서로에게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치아 관리인데 이 간단한 것조차 해결이 안 되니 또 답답해집니다.

그래도 이렇게 꾸역꾸역 지역으로 나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애초에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은 것이겠지요.

"그려, 그게 그냥 나라는 인간이제~ 이건 내 맘 편하자고 하는 일이여~."

부산 출신인 저는 요새 이곳 어르신들 따라 충청도 사투리가 입에 붙었습니다.

드라마 <송곳>을 보면 거대기업인 푸르미 마트와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구고신 노동상담소 소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입니다."

평범하고 시시한 의사인 저는, 매일 평범하고 시시한 환자들을 만나 짜증도 내고, 좌절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물론 작고 시시한 일에 기뻐도 하고 감동도 받고 애도 쓰면서 말이지요. 방문을 나가서 뜻밖에 만나는 동물 친구들, 어르신들이 내어주시는 과일 한 조각, 고맙다는 말 한마디.... 이런 것들 덕에 오늘도 저는 괜찮다 싶습니다.

▲ 방문진료 가서 만난 야옹이 친구 ⓒ박지영

▲ 방문진료 가서 만난 야옹이 친구) (사진 11-2:어르신이 내어주신 과일. ⓒ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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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수료했다. 현재 대전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원장 및 지역사회의료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엄마의사 야옹선생의 초록처방전>, <아이를 위한 면역학 수업 : 감염병, 항생제, 백신>, <야옹의사의 몸튼튼 비법노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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