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명의 죽음 이후...마사회가 지킨 약속, 마사회가 어긴 약속

[문중원 1주기, 남겨진 사람들 下] 기수, 말관리사 처우 개선 관련 합의 이행 점검

오는 29일은 문중원 기수의 1주기다. 문 기수는 조교사의 부정 경마 지시 및 조교사 개업 심사 과정의 비리, 기수들의 열악한 처지를 고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지난해 11월 29일 세상을 등졌다. 문 기수가 일했던 한국마사회 부산경남(부경)경마공원의 2005년 개장 이래 기수로 보면 네 번째, 기수와 말관리사를 합하면 일곱 번째로 일어난 비극적 죽음이었다.

부경경마공원은 전국 세 곳의 경마장 중 이른바 '선진 경마'를 가장 모범적으로 시행한 곳으로 꼽힌다. '선진 경마'의 주 내용은 비경쟁성 임금 축소 및 순위상금 비중 확대 등 경쟁 강화, 기수와 말관리사의 개인사업자 형태 고용 등 마사회의 사용자 책임 약화다.

문 기수의 유족은 그의 억울함을 풀고 '선진 경마'에 균열을 내 기수와 말관리사가 더는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난 겨울 100일여를 싸웠다. 당시 유족은 생전 문 기수가 가입했던 공공운수노조 및 여러 시민단체와 함께 마사회를 상대로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대책 마련,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3월 6일, 마사회와 문중원시민대책위, 문중원열사대책위는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서에는 책임자 처벌에 관한 사항과 함께 △경주기승 8회 이상 부경기수의 월평균소득이 300만 원 이상 되도록 지원 △조교사 개업 심사 투명성 확보 △부정 경마 지시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표준계약서 체결 권장 등 기수 처우 개선을 위한 제도 개선책이 담겼다.

이후 8개월 여가 흘러 문 기수 1주기가 돌아오고 있다. 마사회를 상대로 한 싸움의 주역이었던 유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마사회는 합의서에 명시된 제도 개선책을 이행했을까. <프레시안>이 이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기사를 준비했다.

둘째 편에서는 기수와 말관리사의 처우 개선과 관련한 합의 이행 상황을 점검했다.

한국마사회 부산경남(부경)경마공원에서 2005년 개장 이래 7명의 기수와 말관리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부경 경마공원 기수와 말관리사의 처우 개선에 대한 3개의 문서가 나왔다.

첫째, 기수의 노동조건 개선을 담은 올해 3월 '부경(부산경남) 경마공원 사망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합의서(2020년 기수 합의)'다. 작년 11월 문중원 기수의 죽음을 둘러싼 100일 싸움의 결과물이다.

둘째, 말관리사의 노동조건 개선을 담은 2017년 8월 '말 관리사 직접고용 구조개선 협의체 관련 합의서'와 그 부속문서(2017년 말관리사 합의)다. 2017년 박경근, 이현준 두 말관리사의 죽음을 둘러싼 82일 싸움의 결과물이다.

셋째, 공공정책연구원이 한국마사회의 의뢰로 올해 9월 발간한 연구 용역 보고서 <부경경마 현황분석 및 개선방안 도출 연구>(개선방안 연구)다. '2020년 기수 합의' 1조 '사망사고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위한 연구 용역 사업 추진'의 이행을 위해 작성됐다.

마사회가 7명의 죽음 앞에 작성한 합의는 그간 얼마나 이행됐을까. 부경 경마공원에 대한 공공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문중원 기수 1주기를 맞아 <프레시안>이 이를 살폈다. 합의서와 보고서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기수와 말관리사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시민사회의 노력도 같이 들여다봤다.

'2020년 기수 합의' 상당 부분 이행됐지만 보완과 안착 필요

기수들의 상황을 보면 문 기수의 죽음을 둘러싼 싸움에는 성과가 있었다.

우선 지난 5월, 부경 경마공원에서 기수노조가 설립됐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점 때문에 흩어져 있던 기수들이 집단으로 모여 마사회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2020년 기수 합의' 이행에도 진전이 있다. 지난 19일 공공운수노조가 마사회로부터 제출받은 '합의서 이행내역'을 보면 △기수의 세전 월평균 기본소득 300만 원 이상 보장 △재해위로기금 증액 및 운동처방사 지원 △경마시행세칙의 기수면허 박탈 조항 삭제 등 합의 내용 대부분이 이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단, '기수의 세전 월평균 기본소득 300만 원 이상 보장'에 대해서는 보완과 감시가 필요하다.

'개선방안 연구'를 보면 기수의 월 평균 소득은 1억 2000여만 원이다. 소득이 높다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격차다. 작년 기준 34명의 부경 경마공원 기수 중 5명의 소득은 월 3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체력을 요하는 스포츠 선수인 탓에 기수의 평균 근속연수가 7.71년으로 짧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합의서 이행내역'을 보면, 올해 1~2월 최하위 소득 기수 월 평균 소득은 364만여 원이었다. 합의가 지켜졌다고 볼 수 있지만 지난 3월 이후 코로나19로 경마가 중단 혹은 축소 운영되며 기수의 소득이 감소했기 때문에 정착을 이야기하기는 이르다.

한대식 공공운수노조 쟁의조정부실장은 "합의 당시 기수 소득보장의 실효성을 1년 정도 모니터링하기로 했다"며 "실제 상위 순위권 기수와 그렇지 않은 기수 간에 형평성 있게 기승횟수가 주어졌고, 기본적인 소득 보장이 가능했는지는 시간을 더 두고 봐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상 고정급화로 이행이 완료돼야만 합의 내용의 완전 정착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 11일에는 조교사(경마 경기의 감독) 개업 심사가 폐지되고 조교사 면허를 딴 순서에 따라 개업이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전에는 조교사로 일하려면 면허를 딴 뒤 정성평가가 포함된 마사회의 별도 개업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조교사 개업 심사 과정의 '비리'는 문 기수가 유서에서 언급한 내용 중 하나였다. 합의 당시 유족과 노조, 시민단체는 조교사 개업 심사 폐지를 요구했지만 마사회의 거부로 '2020년 기수 합의'에는 담기지 않았다. 그랬던 조교사 개업 심사를 마사회가 스스로 폐지한 것이다.

문 기수 조교사 개업 심사 관련 비리 혐의자인 김 모 씨의 처벌과 관련해 마사회는 '합의서 이행내역'에서 "수사결과에 따라 인사 조치 예정"이라고 적었다. 현재 김 씨는 업무방해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수사결과에 합당한 징계가 이뤄질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이밖에 '개선방안 연구'에서 제시된 심리 상담센터 설치 및 상담 의무화 등 대책은 '2020년 기수 합의'의 연장선상에서 마사회가 실행을 검토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조교사의 부당 지시 금지, 기수 권익 보호 등을 명시한 기수와 조교사 간 기승계약서 표준안 마련은 현재 검토 단계에 있다.

▲ 지난 24일 서울 정부청사 옆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문중원 기수 1주기 추모제에서 오열하는 유족. ⓒ프레시안(최형락)

'2017년 말관리사 합의' 반쪽 이행 혹은 시간 지나며 무력화

'2020년 기수 합의'가 비교적 잘 이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그보다 앞서 작성된 '2017년 말관리사 합의'에는 반쪽 이행으로 끝나거나 시간이 흐르며 무력화된 조항이 꽤 있기 때문이다.

'2017년 말관리사 합의'의 핵심 내용은 △조교사 개인 고용을 조교사 협회 고용으로 바꿔 말관리사 고용안정 제고 △경쟁성 상금 비중을 축소해 최소 생활이 가능한 말관리사 임금 확보 △말관리사 인원을 20명으로 충원하고 1인당 말 관리 수를 3.16두로 맞출 것 등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조교사 협회 고용'은 반쪽 이행에 그쳤다. 말관리사를 조교사 개인이 아닌 조교사 협회가 고용하면, 조교사 조 폐업 등으로 말관리사가 일자리를 잃어도 협회가 이들을 다른 조교사 조에 취직시킬 수 있다. 말관리사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기도 상대적으로 용이해진다. 10여 명의 말관리사가 조교사 개인과 교섭하는 것보다 300여 명의 조교사가 협회 하나와 교섭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작년 8월 조교사 협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부경 경마공원 31개 조교사 조 중 협회에 가입한 조는 22개다. 5개 조는 아예 가입하지 않았다. 4개 조는 조교사만 가입하고 말관리사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3분의 1에 달하는 말관리사는 합의 전과 같은 수준의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고광용 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 말관리사지부장은 "조교사 개인에게 고용된 말관리사의 경우 불안해한다"며 "조교사에게 잘 보이려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조교사 개인 고용 제도가 남아있는 만큼 조교사 협회를 통한 집단고용의 틀이 흔들릴 위험도 있다.

하지만 고 지부장은 미가입 조교사를 조교사 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한 마사회 차원의 후속대응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개선방안 연구'를 보면, 조교사 협회 출범 후 말관리사 임금은 연장근무 수당 등을 합쳐 총액 기준 월 2만 원(월 406만 원), 실지급액 기준 월 50만 원(월 358만 원)가량 올랐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경마가 중단되거나 축소된 기간 말관리사 임금이 180만 원 수준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에 실제 안착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인원충원 방안은 시간이 지나며 무력화됐다. 마사회는 합의 직후 약속대로 20명의 말관리사를 충원했다. 하지만 이후 퇴직 혹은 해고가 있었던 자리에는 인원충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합의 당시 280여 명이었던 부경 경마공원 말관리사는 현재 290명이 됐다. 말관리사 1명이 관리하는 평균 말 수는 '2017년 말관리사 합의'에 적힌 3.16마리가 아닌 4.1마리다.

▲ 2017년 8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한국마사회 경영진 퇴진과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경영진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절규하고 있는 고 박경근 말관리사의 어머니. ⓒ연합뉴스

문중원 기수 1주기, 남은 과제들

종합적으로 보면, 마사회는 '2020년 기수 합의'의 상당 부분을 이행했다. 단 기수의 월 기본소득 보장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와 보완이 필요하다. 심리상담센터 설치, 기수와 조교사 간 표준계약서 마련 등도 앞으로 마사회가 완수해야 할 일이다.

반면, 조교사 협회 고용, 인원 충원 등 '2017년 말관리사 합의'의 주요 내용은 반쪽 이행으로 끝나거나 시간이 지나며 무력화됐다. 이의 제대로 된 이행은 앞으로 마사회가 신경 써서 수행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두 합의 바깥에 있는 과제도 있다. 두 합의의 완전한 이행과 이의 정착, 그리고 합의에 다 담기지 않은 기수와 말관리사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기수와 말관리사의 지위 강화가 필요하다. 매출과 경쟁을 중시해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처우를 악화하고 이들에게 높은 스트레스를 안기는 마사회 운영방식을 바꿀 필요도 있다.

현재 '한국마사회 적폐청산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는 이를 목적으로 마사회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개정안에는 △마사회 경쟁성 완화를 위한 경영평가 기준 개선 △마사회 내부 비리 조사 방안 마련 △기수에게 조교사의 부당한 지시 거부 권한 부여 △마사회 징계위원회에 기수, 말관리사 참여 △기수 소득격차 완화를 위한 기승기회 보장 △말관리사 조교사 협회 고용 법제화 등이 담길 예정이다.

두 합의의 이행에 더해 시민사회의 이같은 노력에 대해 마사회와 정치권이 어떻게 화답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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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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