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일 0시를 기해 중국에서 제7차 인구센서스(人口普査)가 시작된다. 이번 조사에는 700만 명 이상의 조사원이 투입될 것이라 한다. 조사 대상 인원, 조사원의 숫자 등등 여러 면에서 이번 조사는 유사 이래 인류 최대의 조사사업이 될 것이다.
건국 후 첫 번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53년, 중국 정부는 상세한 인구자료를 확보할 필요에서 제1차 인구센서스를 실시했다. 6월 30일 24시를 기해 시작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인구는 6억 193만 8035명이었다. 1964년 2차, 1982년 3차 등 유동적이었던 인구조사는 1990년부터는 매 10년에 한 차례 실시로 고정됐다.
4000년 전 중국의 인구가 1355만?
중국 최고(最古)의 인구통계는 기원전 21세기 무렵에 조사된 1355만 3923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삼국시대 인물인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처음 제시했다. 이전의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숫자가 2300년이 지난 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출현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인구조사에 관한 기록은 <국어>(國語)의 주어(周語) 편에 보인다. 주 선왕(宣王)대에 '요민(料民)'을 행하려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 바, '요민'은 인구조사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사실상 중국에서는 기원전 11세기부터 다양한 인구조사가 행해졌으나,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 조사가 아닌 선별적 조사였다.
역대 중국의 인구
중국에서 첫 번째 전국적 규모의 인구조사가 진행된 것은 진(秦)에 이르러서이다. 당시의 조사결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진의 인구조사는 정식으로 남자의 연령을 호적에 등록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병역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의 제도에 따르면 남자는 23세부터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임시 징병의 경우도 연령의 표준이 정해져 있었다. 명확한 연령기록이 없다면 징병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천하통일 후 진의 인구는 약 2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확인되는 신뢰성이 높은 가장 오랜 중국의 인구통계는 서기 2년의 것이다. 이때 중국 인구는 5959만 4978명이다. 당시 조사는 군국(郡國)이 설치된 지역에 한정되어 공간적으로 지금의 인구조사 범위와는 달랐다.
그럼에도 당시의 조사대상 지역은 청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 왕조가 행한 인구조사의 대상범위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시종 중국인의 대다수가 생활하였던 지방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상기 통계는 중국 인구발전의 추세와 변화의 규율을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의거가 된다.
한 이후 현(縣) 단위의 인구통계는 매년 상계(上計) 형식으로 중앙에 보고됐다. 전란이 빈번하고 남북이 대치했던 5호16국시대 이후 한동안 상계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당(唐)에 이르러 각 주군(州郡)은 매년 장안(長安)에 사람을 보내 호구와 인구를 보고하였다. 이런 임무를 맡은 이를 조집사(朝集使)라 했다. 당시 조집사들이 집중적으로 참가한 조회(朝會)도 '상계'라 불렸다. 극성기 당의 인구수에 대해서는 5000만, 7-8000만, 9000만, 심지어 1억 4000만에 달하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송대 인구조사는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부역(賦役) 부과대상자들을 등록하는 선에 머물렀다. 현존 통계자료에 근거하여 추산한 북송대 인구는 1억 전후로 파악되고 있다. 남송의 경우 인구가 가장 많았던 1235년 약 5800만에서 6400만 사이로 추산된다.
주원장은 호적의 병폐와 정확한 조사등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전국을 평정하기도 전 자신의 통치범위 내에서 인구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호첩(戶帖)이라 불린 등록부에는 주소, 성명, 연령, 성별, 소유 토지와 건물이 기록됐다.
주원장은 1381년 매 10년마다 한 차례 전국적 규모의 호구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조사결과는 겉표지가 노란색인 호적부에 기재하도록 하였기에, 이를 황책(黃冊)이라 한다. 주원장 재위 시의 마지막 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인구는 약 6000만 명에 달했다. 이보다 한 세기 전인 1293년 원의 인구는 약 7000만이었다.
황제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백성의 숫자
명대 중엽 이후의 황책이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인식한 강희제는 1668년 황책 편정을 중지시켰다. 대신 매년 각 지방관아에서 경내 인구의 증감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고, 3년에 한 차례 이를 심의하여 편정하도록 했다. 다만 당시의 조사는 전체 백성인 구(口)가 아니라 부역 부담자인 정(丁)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청대 초엽 남겨진 통계로는 당시의 전체 인구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
1734년 2735만이었던 인구가 1741년 1억 4000만으로 급증한 것은 조사대상이 정에서 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백성을 조사대상으로 삼지는 않았기에 청의 황제들도 그가 다스리는 백성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태평천국혁명운동이 발발한 1850년 당시 중국의 인구는 4억 3천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백성에게 맞아 죽은 인구조사원
1908년, 청은 통계사(統計司)를 신설하고 인구조사를 위한 6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4년만인 1911년 졸속으로 마무리됐다. 인구조사가 증세(增稅)를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백성들의 비협조가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인구조사가 '영혼을 털어가는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조사원이 맞아 죽거나 생매장되는 일도 있었다.
비록 결과는 참담하였지만 이때의 인구조사는 중국 정부가 비로소 전면적 인구조사의 개념과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청 멸망 직전인 1911년 중국의 인구는 3억 7000만 가량이었다.
중화민국시기 각종 명의와 형식으로 공포된 인구통계는 10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조사결과였다. 그러나 당시의 통계는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조사결과가 아니었다. 근 40년 가까운 기간 단 한 차례도 제대로 형식을 갖춘 전국적 규모의 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급격한 노령인구 증가는 국가적 부담
한때 중국인들은 인구대국임을 자랑스러워하였다. 풍부하면서도 저렴한 인건비가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인구는 양날의 검과 같아, 인구문제는 중국이 풀어야 할 난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특히 노령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국가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2017년 60세 이상 노령인구는 2억 4000만이었다. 2025년에는 전체 인구의 20.2%인 2억 8300만 노령인구로 분류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그러하겠지만, 노령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연기금 고갈 등 사회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10년 전 중국의 인구는 13억 4000만에 약간 못 미쳤다. 그간의 인구증가율을 감안할 때, 이번 조사결과는 14억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2020년 현재 중국의 인구는 얼마일지, 7차 인구센서스 결과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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