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진보의 아이콘, 이 사람의 '건강'에 美민주주의가 달렸다?

'진보' 긴즈버그 교체시 '보수' 절대 우위로 가는 대법원...트럼프 숙원 해결?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우라는 것이다."(1973년 1월)

"'여성의 권리'라는 표현은 다소 문제가 있다. 인간의 권리다.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모든 인간의 권리다." (2006년 12월) (<긴즈버그의 말>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지음, 오현아 옮김, 마음산책)

미국 연방대법원의 최고령 대법관이자 진보주의의 상징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7) 대법관이 지난 13일(현지시간)에 병원에 입원해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독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종신직을 보장받는 대법관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극우적인 성향의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법원은 미국 민주주의의 균형추를 유지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반이민 정책, 낙태 문제 등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이래로 2명의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검증된' 보수적 성향의 법관들(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로 채웠다. 이로 인해 9명의 대법관 중 이미 5명이 보수 성향, 4명이 진보 성향으로 보수 쪽으로 기울어졌다. 긴즈버그 대법관(이하 직함 생략)이 건강 문제로 사퇴할 경우, 트럼프는 당연히 이 자리를 보수로 채울 것이고, 그러면 대법원 구성은 '보수 6 대 진보 3'으로 확연히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다. 일각에서 "긴즈버그의 건강에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렸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항암치료 때문에 병원에 입원 중이다. ⓒAFP=연합뉴스

'진보'의 아이콘 긴즈버그, 5번째 항암치료..."나는 계속 일할 수 있다" 성명

미국 워싱턴DC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입원 중인 긴즈버그 대법관은 15일 개인 성명을 내고 지난 2월 건강검진에서 간에서 암 병변이 발견됐고 5월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7일 검사한 결과 간 병변이 상당히 감소했으며 새로운 질병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면서 직무 수행과 관련해 "나는 여전히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된 긴즈버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다. 그는 "대법원에 여성이 몇 명 필요하냐는 물음에 9명(전원)이라고 답하면 모두가 놀란다. 하지만 전원이 남성일 때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남성중심적 법조계의 현실에 대해 꼬집기도 했다. 그는 변호사 시절부터 대법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여성,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전향적인 판결을 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 <긴즈버그의 말> 라는 책 등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 진보적 성향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로터리어스 RBG'(악명 높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기득권층이 싫어하는 판결을 한다는 의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그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와 머그잔 등도 젊은 층 사이에 인기 아이템이다.

대법관으로 일하면서 이번까지 5번째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절대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진보 성향 대법관으로서 그의 자리가 갖는 무게와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15일 긴즈버그의 건강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입원 사실을 몰랐지만 건강하게 회복하기를 바란다"고 의례적인 답변을 했지만, 그는 내심 정반대의 상황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과정에서 "긴즈버그는 정신이 나갔고 사퇴해야 한다"고 막말을 하기도 했다. 긴즈버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한 것에 대한 반격이었다.

긴즈버그와의 '구원'이 아니더라도 트럼프가 그의 사퇴를 내심 바랄 이유가 있기도 하다. 현재 신종 코로나바아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반전을 꾀할 '카드' 중 하나가 대법관 교체다.

대법관 교체, 공화당도 적극 동조...로버츠 대법원장 역할도 의미 없어질 것

<복스>는 21일 긴즈버그 건강 문제와 관련해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면 그 판돈이 어마어마하다"며 의미 부여를 했다.

물론 지난 2016년 대법관 공석이 발생했을 때, 상원 다수당을 점하고 있던 공화당이 물러날 대통령이 대법관 임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생떼를 쓰며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메릭 갈랜드의 인준을 거부한 전례가 있기는 한다. 하지만 공화당 미치 매코넬 상원의장은 지난해 대법관 교체 문제와 관련된 질문에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채울 것"이라며 매우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여론이나 전례 등은 무시하고 최대한 실속을 챙기겠다는 뜻이다.

트럼프 뿐 아니라 공화당 입장에서도 긴즈버그의 자리를 보수 성향의 대법관으로 채우는 것은 선거를 앞두고 중요한 이벤트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오는 11월 대선에서 트럼프의 재선 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동시에 치러지는 상원의원(일부)과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 여부가 불투명하다. 특히 현재 과반(100석 중 53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원의 경우, 이번 선거로 다수당 지위를 빼앗길 가능성도 무시 못 한다. 대법관은 상원에서 인준 청문회와 표결을 거치기 때문에 공화당 입장에서는 행정부와 상원 모두를 장악한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다. 대법관은 종신직이라는 점에서 한번 교체될 경우 임기가 수십년에 이르기 때문에 올해 대선 전에 또 한명의 보수 대법관을 임명할 경우 그 영향은 길게는 수십년 갈 수도 있다.

대법관 교체는 6월 들어 연이어 나온 '반 트럼프 판결'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지난 6월에 성소수자에 대한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판결(15일), 불법체류청소년 추방유예프로그램(DACA) 폐지에 제동을 거는 판결(18일), 낙태권을 보장하는 판결(30일)을 내렸다. 3건 모두 트럼프의 대선 공약과 연관된 판결이었다. 보수 성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3번의 판결 모두 진보성향 대법관들의 의견에 함께 하면서 트럼프 대선 공약 실현에 '제동'이 걸렸다. <복스>는 긴즈버그 자리가 보수 성향의 대법관으로 채워질 경우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적이긴 하지만 다른 공화당 대법관들에 비해 당파적 성향이 덜하다"며 이런 로버츠 대법원장의 역할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낙태권 제한과 반이민 정책은 트럼프와 공화당 열혈 지지자인 보수적 백인 (기독교) 유권자들의 정치적 요구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법관 교체는 트럼프와 공화당 입장에서 선거를 앞두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반전 카드라고 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또 다른 대법관의 자리를 지명하게 되면 미국은 훨씬 덜 민주적이 된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본보기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인들은 2016년 선거로 민주당 경쟁자보다 300만 표 가까이 적게 받은 대통령, 의원 정수의 불균형 문제(인구수에 비례하지 않고 각 주마다 2명씩 상원의원을 뽑는다) 때문에 민주당 '소수 의석'보다 1500만 명을 적게 대변하는 공화당 '과반 의석'의 상원을 갖게 됐다. 트럼프가 지명한 두 대법관은 모두 국민 투표에서 실패한 대통령, 국가의 절반도 대표하지 못하는 상원에 의해 확정됐다."(<복스>, 앞의 기사)

현재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가 갖고 있는 '대표성'의 문제가 대법원 구성의 문제를 더 심화시킬 경우, 소수 집단의 의지에 의해 민주주의가 왜곡되는 부작용이 악화되며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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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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