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합의 비웃듯 공장 폐쇄...정부는 과연 지킬 생각은 있었나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고용 유지 위한다던 정부...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

노사정 합의? 노사정 잠정합의? 노사정 야합? 지난 6월 30일에 벌어진 일을 도대체 뭐라고 규정지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예정된 조인식은 취소되었으니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고 보긴 어렵겠다. 계모임에도 회칙이 있는 법인데 이번 노사정 대화도 운영 원리를 정했을 테고, 국무총리 포함해 6~7명이 모이는 자리에 다수결 원리를 도입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민주노총도 7월 2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합의 최종안에 대한 추인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그 대의원대회 소집 자체가 유효한가 아닌가? 노사정 타협이 배신·야합인가 아닌가? 이와 관련한 얘기들은 넘칠 만큼 쏟아지고 있으니 그 쟁점과 관련해선 넘어가도록 하겠다.

어차피 <인사이드 경제> 삐딱한 거야 소문 난 거고, 남들이 잘 쳐다보지 않는 부분만 콕 집어서 얘기해오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노사정 합의안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합의안 도출 이후에 문재인 정부가 보이는 행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합의안이 도출된 이후 무엇보다 경총이나 전경련 등 자본가 단체에서 반대하거나 항의 성명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번 과정에서 노동계가 밑지는 협상을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민주노총 내에서 누구보다 취약계층에 가까운 비정규직 당사자들까지 나서서 합의안을 배신·야합으로 규정하는 것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22년 만의 노사정 대타협", "민주노총 불참 유감" 등 이번 합의안 도출의 의미를 엄청 높이 평가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합의안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한 정부 관료들이 오히려 그 내용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한다.

합의안 도출 4일 전과 9일 뒤에 벌어진 사건

지난 6월 26일, 대구 달성공단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사 한국게이츠가 7월 말까지 공장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곳에서 수십 년 일해온 147명의 노동자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공장 폐쇄 뒤에도 현대차 등에 납품은 계속된다. 10여년 전부터 중국에도 공장을 세워 물량을 야금야금 빼가다가 급기야 한국 공장만 폐쇄하되 판매법인만 남겨 부품은 계속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원포인트 노사정 합의안 도출 4일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노사정 합의안이 도출된지 9일 뒤인 7월 9일에는 경상남도 창원에서 LED 조명을 생산해온 한국산연이 청산 결정을 발표하게 된다. 불과 이틀 전 휴업과 함께 노동조합과 '고용안정 합의서'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6월 30일 노사정 대표자들이 합의한 내용 중 일부. 합의안 갈무리.

"경영계는 … 상생과 협력의 정신을 발휘하여 고용이 유지되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노사정 합의안 내용이 참으로 무기력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게다가 한국게이츠의 경우 30년 넘게 흑자를 낸 사업장이란 점에서 더욱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자본가들은 노사정 합의를 하건 말건 아랑곳없이 폐업과 정리해고를 강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돈 한 푼 안드는 메시지·제스쳐도 없는 문재인 정부

그런데 노사 협력과 교섭 타결을 위해 이를 "적극 지원"할 의무를 부여받은 문재인 정부는 이 사건들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을까? 자신들 주장대로 무려 22년 만의 대타협 국면이라면, 자칫 이런 타협에 찬물을 끼얹을 지도 모를 이런 사건들에서 분명한 메시지 또는 모종의 제스쳐라도 취해야 정상 아닐까?

놀랍게도 문재인 정부에게 그런 건 기대할 것이 못되는 것 같다. 공장 폐쇄 또는 청산을 선언한 자본가들을 향해 립서비스일지언정 '유감 표명'이라던지 '재고 요청' 뭐 이런 메시지도 없고, 해고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을 방문해 위로를 하며 집단 사진을 찍는 제스쳐도 없다.

메시지와 제스쳐를 취할 명분도 충분하다. 한국게이츠는 30년 넘게 흑자를 낸 사업장이고, 한국산연은 불과 이틀 전에 노사가 고용안정 합의서를 작성한 곳이다. 만일 정부가 노사정 합의안을 존중한다면 "노사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원만하게 타결에 이른 교섭 결과"가 지켜지도록 적극 지원함이 마땅하다.

메시지와 제스쳐는 돈 한 푼 안 드는 생색내기에 불과한데도, 문재인 정부는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이 추인 안해도 합의에 효력이 있다던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문재인 정부는 답이 없다. 오죽했으면 공장 폐쇄 협박을 당하고 있는 한국게이츠 조합원들이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 사무실에서 농성을 시작했겠는가 말이다.

프랑스 정부도 이 정도는 한다

<인사이드 경제> 지난 글에서 르노 자동차가 프랑스에서 공장 3개를 폐쇄할 계획을 발표하자 그 나라 재정경제부 장관이 곧바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절대로 공장 폐쇄가 있어선 안 된다", "(르노가 신청한 정부 지원대출에 대해) 나는 아직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다"라고 압박에 나섰다는 얘기를 소개한 바 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프랑스 "공장폐쇄하면 정부 지원 없다"...한국의 '기업 지원'은?)

당시 글을 쓰던 상황에서는 르노 자동차의 반응 또는 답변이 나오기 전이었는데 이제는 결과가 나온 상황이다. 사실상 르노는 프랑스 정부에 두 손을 들었고, 공장 폐쇄는 없는 것으로 하되 필요할 경우 일부에 한해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런 입장을 확인한 뒤에야 정부 금융지원이 이뤄지게 된다.

그런데 르노 자동차는 프랑스 토종기업 출신이며 정부가 15%의 지분을 쥐고 있는 기업이지만, 이번에는 독일 출신의 다임러(Daimler)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스마트' 브랜드의 2인승 전기차·내연기관차를 생산하고 있는 엉바슈(Hambach) 공장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브뤼노 르메르 장관이 다시 등장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다임러는 엉바슈 공장 생산이 유지되도록 모든 조치를 다해야 한다"며 매각 계획을 재고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물론 '재고 요청'은 그저 립서비스일 수도 있겠지만, 르노 자동차를 압박해 입장을 선회시킨 사례가 있기에 지켜보기로 하자.

▲ 다임러에게 매각 계획 재고를 요청한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 로이터통신 웹페이지 갈무리.

노사정 타협이나 합의 같은 게 벌어지지도 않은 프랑스 정부도 이 정도는 한다. 국내 자본만이 아니라 외투자본에 대해서도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정부 지원 중단 등의 압박을 하고 있다. 왜일까?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유지하고 지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지킬 생각 없었던 합의안

"하나의 일자리라도 더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6월 30일에 나온 노사정 합의안 내용의 일부이다. 표현만 보면 프랑스 정부와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실제 문재인 정부가 하는 행태는 프랑스 정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스스로 만든 합의문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는 꼴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요즘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는 행태, 특히 7월 14일 하루에 진행된 정부 행태를 보면 하나같이 노사정 합의안 취지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의적으로 어길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루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을 한꺼번에 벌일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 7월 14일, 고용노동부는 코로나19 사태로 1년 90일 한시적으로만 특별연장근로 활용기간을 한정했던 것을 하반기에도 90일 더 허용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 이 과정에 노사단체 의견수렴이나 논의조차 하지 않았음

△ 7월 14일, 노동계 심의위원 퇴장한 상태에서 공익위원·사용자위원만 표결에 참여해 2021년 최저임금 인상률 1.5%(시급 130원 인상)로 결정함. 1988년 최저임금 제도 생긴 이래 최악의 인상률로 기록됨.

같은 날(7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 딜' 관련 내용을 직접 발표했다. 이 계획에 대해서는, 단순히 몇 마디로 분석 또는 평가를 할 수는 없는 내용이니 별도의 글을 통해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전에 분명히 짚어둘 지점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계획을 발표하면서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회장, 네이버 한성숙 대표를 화상으로 연결해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뉴 딜(New Deal)'이란 것이 미국에서 노동기본권과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것만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 아래, 노사관계를 전면적으로 바꾸고 정부가 책임있게 경제정책을 집행한다는 취지의 사회적 타협(Deal)을 의미하는 말 아니던가? 그런데 '한국판 뉴 딜'을 얘기함에 있어 노동기본권이나 교섭력을 높이는 내용은 일절 들어있지 않다.

정부 스스로 지킬 생각도 없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노사정 합의안', 노동계가 할 역할은 이걸 추인하고 양보하는 길 뿐이란 말인가? 노사정 합의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빈 말이라도 노동계를 세워주고 생색내기라도 할 텐데, 문재인 정부의 행태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인사이드 경제>는 궁금하다. 도대체 이게 '합의안'이긴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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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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