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에게 산재를 인정할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은 (좌충우돌하는) 재판을 통해 노동자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기업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재판부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려면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증명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황 씨 등이 담당한 공정에서 노출된 유해물질이 해당 질병을 유발했거나 그 진행을 촉진했다고 보기 어렵고, 근로자들이 주장하는 그밖의 유해물질에 노출됐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본 원심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2016년 대법원 판결, ☞관련 기사 : 대법원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3명 산재아니다")
"이 사건 사업장이나 비슷한 근무환경인 다른 반도체 사업장의 뇌종양 발병률이 한국인 전체 평균발병률이나 비슷한 연령대의 평균발병률보다 유달리 높다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 유리한 사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2017년 대법원 판결, ☞관련 기사 : 삼성 반도체 뇌종양, 첫 산재 인정)
헌법재판소까지 포함하면 사법체제가 내 삶에 개입하는 정도는 상상 이상이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임산부가 낙태하는 것 자체를 처벌하는 자기낙태죄와 관련해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게 된다면 현재보다도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며 "자기낙태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전제했다.(2012년 헌법재판, ☞관련 기사 : 헌재, 낙태 시술 처벌 합헌 판결)
산재와 낙태죄가 옳은지 그른지를 시비하는 것은 다른 기회로 미루자. 오늘 우리는 사법체제가 이와 같은 판단으로 개인과 사회에 개입하는 근거를 묻고자 한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이 재판이라면, 누가 왜 그들에게 최종 판단을 맡겼는가? 그들이 자유와 돈과 지위와 정치 권력을 배분하는 데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왜 정당화되는가?
그들은 이 일의 당사자가 아니며, 재판 결과에 목을 맨 사람, 특히 약자의 이해관계와 시각을 대변하지 않는다. 산재나 낙태 문제의 전문가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고 합의와 동의를 끌어내려는 정치적 주체도 아니다.
그들은 이 체제와 제도가 만든 '세속화된 신’으로, 인과관계를 판단하고 도덕과 규범을 제시하며 진실과 허위를 판별한다.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 자유와 양심에 개입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피치자를 처벌하고 훈육하며 이 시대에 맞는 주체로 만드는 일, 즉 '품행을 인도하는 것'(푸코의 말)이야말로 이 시대 세속의 신이 맡은 일이다.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신이 아니되 신의 역할을 부여받은 자, 그들은 누구인가? 신에 버금가는 권위, 그 자격을 갖추었는가?
대법관 142명 중 판사 출신은 124명으로 전체의 87.3%를 차지했다. 법원 이외 직역 출신은 검찰 11명, 변호사 4명, 교수 1명이었다. 남성이 전체 97.2%에 해당하는 138명이었고, 여성은 4명뿐이었다. 출신 대학은 서울대가 102명(71.8%)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관련 기사 : "대법관 공식 = '서울대 출신 男판사'…그들만의 리그")
"오랜 세월 서울대, 연고대로 상징되는 소수의 배타적 지배계급에서만 사법시험 합격자가 주로 배출되었고, 법의 운용도 그러한 불평등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법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자기하고는 완전히 낯선, 어떤 타자성의 세계에 던져졌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독과점체제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문제가 '가족 내부의 일'이 되기 쉬운 반면, 외부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멸의 신성가족> (김두식 지음, 창비 펴냄)).
견제받지 않아도 되는지 따지는 일은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다. 비슷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학연과 혈연을 비롯한 여러 연고에, 사법연수원 기수와 같은 봉건적 질서에, 이들에게 '자기 조절적' 기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해 수사와 처벌을 반대한다는 고위법관들의 반응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 가족이란 끈끈한 인연과 정으로 맺어진 '관계'를 넘어 하나의 '체제'이며, 따라서 사법부는 권력과 자기 논리를 가진 '사법체제'라 해야 한다. 고위법관들이 사법부 독립과 사법 불신을 말하는 반대 논리가 참으로 남루하지만, 지금 사법부가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냈다.
지난 시기 재판을 거래하고자 했던 사람들과 전교조 법외노조, KTX 해고 승무원 사건, 통진당 해산 등을 판결한 재판관과는 얼마나 다른가? "대통령이 추진 중인 노동·교육 등 4대 부문 개혁을 강력하게 지원해왔다"는 양승태 대법원의 문건은 개인 견해가 아니라 체제의 자기 이해라 봐야 한다. 오늘 검찰 수수에 반대하는 논리를 펴는 그 고위 법관들은 그 체제의 수혜자인 동시에 상속인들이다.
오늘 한국의 사법체제는 평범한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견제받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족'이 되어도, 그 가족이 자기 이해에 충실한 체제를 구축해도, 재벌과 권력자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판결을 해도, 말도 되지 않게 이상한 논리의 사법부 독립을 주장해도, 이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다. 이 체제는 눈치도 보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다.
권력 독점을 넘어 그것이 권력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은 권력에 개입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다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거로 선출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다. 몇몇 최고위 법관을 임명할 때 그리고 예산을 따기 위해 행정부, 입법부와 동맹하지만, 그 나머지는 완전히 그들만의 리그다. 선출되지 않고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자, 누구도 위임하지 않은 권력까지 행사하는 자기중심적 권력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사법 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논의조차 드물다. 사법부는 무수한 잘못을 저질렀지만(예를 들어 긴급조치, 간첩 조작, 국가보안법 사건 등), 모든 개혁을 비껴갔다. 지금도 국민참여 재판을 확대하는 정도가 개혁 방안이라니, 민주적 사법체계는 아직 첫발조차 떼지 못한 것이다. 얼마 전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도 대법원장의 인사권 축소와 국민참여 재판 정도에 머물렀다.
사법 권력 외부의 힘도 미미하니, 사법체계를 개혁하자는 시민사회의 논의와 개입도 활발한 편이라 할 수 없다. 참여연대의 '사법감시센터'(☞바로 가기)를 빼면 이렇다 할 사회운동을 찾아보기 어렵고, 언론은 <한겨레21>의 '올해의 판결'이 눈에 띄는 정도다(☞관련 기사 : 표현의 자유 억압은 계속된다).
이 정도의 체제 내 개혁 또는 그 동력으로는 사법 민주주의가 의제가 되기 어렵다. 좀 더 근본적 대안, 예를 들어 사법체제의 구조 개혁을 말하지 않고는 공고한 기득권을 해체하기 힘들 것이다.
새로운 근본을 상상하려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들에 도전해야 한다. 대법원장과 각급 지방법원장을 꼭 지금 형태로 임명해야 하는가? 국민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방식, 선거는 불가능한가? 그 말썽 많은 대법원 구성과 운영에 시민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직접 피해자가 있는 만큼 과거 사법 심판을 왜곡한 죄를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비슷한 일이 없을 것이라 자신하기 어렵다. 기존 사법 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를 당장 시작하자.
핵심은 한 방향으로 수렴한다. 자율이 아니라 권력(예를 들어 시민과 여론의 비판과 요구)이 변화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사법개혁과 새로운 사법체제는 정책과 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것. 지금 드러나는 재판 거래 스캔들이 과거사로 기록되고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법체제와 권력을 개혁하는 것, 그것도 사법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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