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U의 창조자, '감독들의 감독' 케빈 파이기

[인피니티 워 100% 즐기기 ②] '성공한 덕후' 케빈 파이기의 모든 것

25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10년을 정리할 대작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합니다. 영화 개봉에 앞서 <프레시안>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10년을 정리하는 최원택 칼럼니스트의 글 세 편을 연재합니다. 최원택 칼럼니스트는 과거 <프레시안>에 그래픽 노블 관련 글을 여러 차례 연재했습니다. 올해 영화계 최대작 중 하나로 꼽히는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를 연재를 통해 더 깊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2.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창조자, '감독들의 감독' 케빈 파이기

마블의 슈퍼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은 예전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마블이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폭스나 소니가 마블 코믹스로부터 <엑스멘>이나 <스파이더맨> 등의 영화 판권을 구매하여 영화화했습니다. 2008년 마블이 직접 제작한 <아이언맨>이 개봉했을 때 개인적으로 감격했습니다. "드디어 마블이 직접 제작한 영화를 보았는데 참 좋았다. 왜 진작 안했지? 이제 원작을 제대로 재현한 영화를 볼 수 있겠구나."

▲ MCU의 시작. ⓒ마블

개인적으로 <아이언맨> 이전 마블 히어로 영화들, 특히 <엑스멘> 시리즈에 대한 감정은 조금 복잡합니다. <엑스멘> 시리즈는 물론 영화로서 재미있고 의미 깊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 정식 발매되지 않은 마블 코믹스 만화책 원서들을 외서 헌책방에서 수집하고, 마블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을 접하면서 <엑스멘>을 비롯한 마블 코믹스 각색 영화들이 원작만의 독특한 개성을 영화산업에 맞추어 다듬어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블과 DC 등 미국 히어로 코믹스들이 정식 번역 출간되는 지금은 하찮기 짝이 없는, '아직 한국에 정식 출간하지 않은 것을 먼저 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죠.

▲ 미국 히어로 코믹스들. ⓒ출처: https://pxhere.com/en/photo/817442

그때는 몰랐습니다. 당시 마블 코믹스의 실체를. "1936년부터 만화책을 만들었다는 마블은 대기업일터인데, 왜 진작 마블이 직접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직접 만들었다면 <아이언맨>처럼 원작에 더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었을 텐데"라는 질문은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마블 코믹스의 유구한 역사는 결코 회사의 재정 규모와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재정 위기를 겪어온 마블도 DC가 <슈퍼맨>을 영화화해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영화제작에 나서려 했지만,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말 마블은 헐크와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을 TV 드라마로 만들었지만 당시의 열악한 특수효과 사정과 유치한 스토리 때문에 원작 팬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습니다.


70년대 마블 원작 TV시리즈로 재구성한 <어벤져스>의 처참함...

1990년대에 마블은 파산의 위기를 맞아 소속 히어로들의 영상 판권을 여러 영화사에 팔아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블레이드>(뉴 라인 시네마)와 <엑스멘>(20세기 폭스), <스파이더맨>(소니 픽쳐스), <헐크>(유니버설 픽처스), <판타스틱4>(20세기 폭스) 등 마블 코믹스 원작의 영화들이 여러 영화사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 성공에 자극받은 마블은 영상 판권만 팔지 말고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계획의 선봉장으로 <아이언맨>부터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까지 마블 코믹스의 영화화와 드라마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탄탄하게 구축한 사람이 바로 케빈 파이기입니다.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에 입사하다

1973년생인 케빈 파이기는 그 나이 또래 미국 평범한 아동이 그렇듯, 어릴 적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삼부작,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리처드 저메키스의 <백 투더 퓨처> 시리즈와 같은 오락 영화를 보며 자랐습니다. 마블 코믹스를 읽긴 했지만 영화 사랑이 더욱 컸던 케빈 파이기는 조지 루카스가 다녀 유명해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재학 중 영화 <슈퍼맨>(1978)을 연출한 리처드 도너 감독의 아내이자 영화 제작자인 로렌 슐러 도너가 <볼케이노>(1997)와 <유브 갓 메일>(1998)을 제작할 때 로렌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케빈 파이기는 이때부터 로렌에게 마블 코믹스의 <엑스멘>을 영상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MCU의 아버지, 케빈 파이기. ⓒwikipedia.org

로렌은 당시 마블 코믹스 산하 영상 제작 부서인 마블 스튜디오 대표 아비 아라드에게 케빈 파이기를 소개해주었고, 그로 인해 케빈 파이기는 드디어 마블과 인연을 맺습니다. 2000년 20세기 폭스가 마블 원작의 영화 <엑스멘>을 제작할 때 폭스는 케빈 파이기를 제작자로 고용합니다. 이때부터 그동안 죽 쒀서 개 주어왔던 마블의 영화 제작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로렌 슐러 도너의 소개로 아비 아라드를 만나 마블 스튜디오로 영입된 이야기는 2013년 <토르: 다크 월드> 개봉으로 내한한 케빈 파이기의 '[토르: 다크 월드] 톰 히들스턴의 서울 나들이 & 제작자 인터뷰'(원문보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케빈 파이기는 <엑스멘>의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다시 마블 코믹스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엑스멘> 제작 당시 다른 제작진들이 만화 영웅을 실사 영화 캐릭터로 만드는 데 곤혹스러워할 때, 마블 코믹스를 정독한 케빈 파이기는 "간단하다. 코믹북처럼만 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블 코믹스 지식을 바탕으로 <엑스멘>을 성공시킨 케빈 파이기는 대표 아비 아라드에 의해 마블 스튜디오의 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엑스멘>을 시작으로 <데어데블>(2004), <헐크>(2003), <퍼니셔>(2004), <스파이더맨2>(2004), <판타스틱4>(2005) 등 마블 원작의 여러 영화 제작을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엑스멘>과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만화 슈퍼히어로를 영화로 불러낸 결과물은 항상 성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오리지널 코믹스 팬들과 대중은 작품에 따라 환호하기도 하고 싸늘하게 반응하기도 했습니다. 제작사나 외부 제작자, 감독, 작가 등 제작진이 각각 달라 각 작품의 색깔이나 수준이 제각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케빈 파이기는 2005년부터 자기가 속한 마블 주도하에 만화 세계관인 마블 유니버스를 스크린에서 충실히 재구현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시작!

케빈 파이기가 구상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중심에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헐크, 토르 등으로 구성된 '어벤져스'가 있었습니다. 어벤져스 소속 히어로들의 판권은 아직 다른 영화사에 팔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케빈 파이기는 2005년 증권 회사 메릴린치에 캡틴 아메리카와 닉 퓨리를 담보로 5억2500만 달러의 융자금을 빌려 마블만의 영화 제작을 추진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케빈 파이기를 불러 2인자의 자리에 앉혔던 마블 스튜디오의 회장이자 CEO 아비 아라드가 마블 스튜디오를 떠나게 됩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제작자로 마블 스튜디오를 높은 위상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은 아비 아라드. 하지만 아비 아라드가 제작한 영화는 그 만듦새와 흥행의 격차가 컸습니다. 특히 스파이더맨 팬들에게는 스토리에 개입하여 영화를 망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www.reddit.com)의 '왜 사람들은 아비 아라드를 싫어하나요?'(원문 링크)라는 글의 댓글들을 통해 마블-스파이더맨 팬들의 아비 아라드에 대한 분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마블 스튜디오를 떠나게 된 이유로 혹자는 메릴린치에 융자금을 빌린 케빈 파이기의 선택을 아비 아라드가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는 아비 아라드가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 라인업 결정 및 사내 의사결정 힘 싸움에서 밀려 사임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후에 아비 아라드는 언론 보도를 부정하며 '그냥 때가 되어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라고 밝히고 언론 보도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관련 기사 링크) 이렇게 자신을 발탁한 아비 아라드가 떠나자, 케빈 파이기는 2007년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가 됩니다.

케빈 파이기 주도하에 영화를 제작하게 된 마블은 외부 프로듀서를 고용하는 관행을 벗어나 케빈 파이기와 공동대표 루이스 데스포지토(Louis D’Esposito)를 포함한 마블 스튜디오 내부 6인으로 구성된 크리에이티브 위원회를 중심으로 영화를 기획, 제작합니다. 관행을 깬 제작 방식을 할리우드는 비웃었지만, 마블 코믹스의 열혈 팬 여섯 명의 크리에이티브 위원회는 케빈 파이기를 중심으로 열혈 팬답게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건설적인 논쟁 장면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제작 당시인 2014년 4월에 발행한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의 기사 'B급 히어로들로 마블을 구하려는 '펑, 쾅, 쿵' 계획'(The Pow! Bang! Bam! Plan to Save Marvel, Starring B-List Heroes, 원문 링크, 번역 링크)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벤져스>에서 처음 모인 뒤 서로의 개성 때문에 목소리 높여 논쟁하던 슈퍼 영웅들처럼, 크리에이티브 위원회원들은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의 시간 배경 설정 등을 두고 격렬하게 논쟁했습니다. 이런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들 여섯은 "원작 만화의 열혈 팬을 기쁘게 하자"는 한 가지 원칙에 따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만들어갔습니다.

ⓒbloomberg.com

<아이언맨> 개국공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여섯 명의 크리에이티브 위원회가 논쟁을 통해 만들어낸 첫 성공의 결과가 바로 2008년에 개봉한 <아이언맨>입니다. 원작에서는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가 강철 수트를 만든 토니 스타크를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 심은 결정도 이들 여섯 명 논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5억8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아이언맨>의 성공 배경에 케빈 파이기와 크리에이티브 위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감독이자 배우 존 패브로와 주연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큰 기여를 했습니다. 200만 달러의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의 제작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대본조차 제대로 안 나와 쪽대본이 난무했다며 <아이언맨>의 악당 오베디아 스탠을 연기한 제프 브리지스는 인터뷰(원문 링크)를 통해 밝혔습니다. 제프 브리지스는 인터뷰에서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감독이자 배우인 존 패브로가 재즈의 즉흥연주를 하듯 토론을 통해 대본을 새로 써서 촬영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제작 초기에는 과거 마약 전과 때문에 캐스팅 반대 목소리가 높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이언맨>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이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개국 공신처럼 존경받습니다.

원작을 정독한 마블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 위원회와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마블 히어로를 향한 애정으로 배우 이상의 역할을 해준 배우들 덕에 원작의 팬들도 인정한 흥행작 <아이언맨>은 영화 마지막 쿠키 영상에 새뮤얼 L. 잭슨이 연기하는 닉 퓨리를 등장시켜 <아이언맨> 세계관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확장됨을 시사했습니다. 이 쿠키 영상에 여러 제작사에서 우후죽순 만들어졌던 마블 히어로 영화에 실망했던 원작 마블 코믹스 팬들이 먼저 환호했고, 일반 관객들 역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언맨>의 성공과 디즈니의 마블 인수

마블 스튜디오가 <아이언맨> 속편 작업을 시작할 때, 마블 스튜디오의 모회사인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회장 아이작 펄머터가 케빈 파이기를 뉴욕으로 호출합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펄머터는 케빈 파이기에게 디즈니의 CEO 로버트 아이거를 만나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미 2007년 픽사를 인수한 디즈니는 그렇게 2009년 마블 엔터테인먼트도 인수했습니다. 이 뉴스는 기존 마블 코믹스팬부터 <아이언맨>을 통해 마블 코믹스에 입문한 전 세계 팬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마블 제작 이전 복불복이 심했던 마블 히어로 영화와 달리, 탄탄한 디즈니의 자금력에 따라 안정된 퀄리티의 마블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우려도 있었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에 디즈니의 입김이 들어가면 아동 편향의 영화가 나올지 모른다는 우려였습니다.

마블을 인수한 디즈니는 마블의 수많은 영웅 캐릭터에 감명을 받았고, 케빈 파이기의 크리에이티브 위원회 제작 방식을 인정하는 대신 최종 승인권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블 영화 제작에 재정적 안정성이 확보되나 싶었지만, 디즈니의 의도가 마냥 선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디즈니는 마블 스튜디오가 <아이언맨>처럼 저렴한 제작비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흥행작을 뽑아낼 것을 기대하고 인수했고,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회장 아이작 펄머터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로 인한 케빈 파이기의 고생담은 뒤에 더 길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수 초반 마블과 디즈니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문제는 영화 제작 순서였습니다. 역시 돈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의도에서인지 디즈니 측은 먼저 <어벤져스>에서 새로운 어벤져스 멤버인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를 소개한 뒤, 대중의 반응을 보고 독립 영화 <토르>, <캡틴 아메리카>를 만들지 말지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케빈 파이기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이미 영화화된 <아이언맨>과 <헐크>가 갑자기 새로운 캐릭터들과 섞이기 전, 관객이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의 사전 정보를 알아야 한다고 디즈니를 설득했습니다. <어벤져스>에서 시작하는 팀원 간의 갈등이 이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시빌워)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충돌로 제대로 폭발하기 위해서는 <어벤져스> 이전 <캡틴 아메리카>의 솔로 영화에서 캡틴의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 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쭉 마블 영화를 보아온 팬들은 케빈 파이기가 주장한 이 전개 외의 다른 전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마블 사내의 시빌 워: 케빈 파이기 VS 아이작 펄머터

케빈 파이기가 이견 때문에 논쟁하고 설득해야 했던 인물은 디즈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제작에 관한 이견뿐 아니라 경영 방식부터 생각이 달라 갈등을 빚었던 인물은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회장 아이작 펄머터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이자 지인으로, 인종차별 전적과 성차별 발언이 드러나 비난을 받기도 한 아이작 펄머터는 사생활뿐 아니라 영화제작 방식을 두고도 케빈 파이기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아이언맨>에서 후에 워머신이 되는 제임스 로드 중령을 연기한 테렌스 하워드가 속편에서 높은 출연료를 요구하자, 그는 배우를 돈 치들로 교체하면서 "어차피 흑인들 생김새는 다 비슷하니 사람들은 못 알아 볼 것"이라는 인종차별 발언을 했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장난감을 잘 사지 않는다는 이유로 블랙 위도우 완구를 판매 중지시키는가 하면, <아이언맨3>에서는 여성 악당 출연계획도 반대했습니다.

1942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1967년에 전 재산 25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이민 온 아이작 펄머터는 당시 못사는 동네인 뉴욕 브루클린에서 장난감을 팔다 여러 완구회사 중역을 거쳐 1993년 마블 이사진이 된 인물입니다. 1996년 한 번 파산했던 마블을 포함, 여러 회사의 경영난을 겪어보았기에 그는 예산 집행에 보수적인 짠돌이가 되었고, 그 성향은 마블이 영화들의 성공과 디즈니로의 인수합병으로 재정이 넉넉해진 시점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검소함을 꼬집는 <할리우드 리포터> 기사(원문 링크)에 따르면 <아이언맨> 기자 시사회 때는 겨우 감자칩만 제공하라고 지시했고, <어벤져스> 기자 시사회에서는 음식 제공을 아껴 기자들이 다른 영화 기자 시사회에서 음식을 훔쳐 먹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세대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아이작 펄머터와 케빈 파이기는 당연히 여러 부분에서 충돌했습니다. 원작을 최대한 반영하고 팬들이 가장 원하는 요소와 재미를 담아 영화를 만들려 하는 케빈 파이기에게 펄머터가 예산 문제를 언급하며 <시빌워>의 예산 규모를 줄이라 지시한 것이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펄머터는 아이언맨을 연기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몸값이 비싸니 <시빌워>에 아이언맨을 빼고 헐크를 등장시키라는 지시를 했다고 하는데, 원작 만화 <시빌워>와 영화 <시빌워> 둘 모두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팀 아이언맨과 팀 캡틴의 대결을 다루기에 마블 슈퍼 영웅 사이의 시빌워(civil war, 내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우 출연료가 비싸니 아이언맨을 빼고 헐크를 넣으라니, 원작에 대한 이해 없이 돈만 생각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지시입니다. 비유하자면 적벽대전을 다룬 삼국지 영화에 제갈량을 연기한 배우의 몸값이 비싸니 제갈량을 빼고 방통이 동남풍을 부르게끔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이런 황당한 지시를 케빈 파이기도 더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시빌워> 개봉 직후인 2015년 9월 경 발행한 <할리우드 리포터>의 기사 '마블의 시빌워: 왜 케빈 파이기는 아이작 펄머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가'(Marvel's Civil War: Why Kevin Feige Demanded Emancipation From CEO Ike Perlmutter, 원문 링크)에 따르면, 펄머터의 받아들이기 힘든 지시에 케빈 파이기는 결국 마블을 떠날 생각을 하는가 하면, 마블을 인수한 모회사 디즈니 측에 펄머터의 간섭을 배제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펄머터뿐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위원회와 케빈 파이기의 관계도 갈등을 빚었습니다.

비록 크리에이티브 위원회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뼈대를 만드는데 기여했지만, 각 영화를 맡은 감독의 성향이나 배우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소문이 잦았습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베이비 드라이버> 등 재기 넘치는 영화를 감독한 에드가 라이트가 <앤트맨>을 감독하기로 했다가 그만 둔 데도 크리에이티브 위원회와의 갈등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학과 관련한 너무 까다로운 요구를 감독에게 전달하여 케빈 파이기와 위원회 사이에도 갈등이 커져갔습니다. 게다가 <시빌워> 제작 시기에는 위원회 멤버인 앨런 파인이 펄머터의 오른팔을 자처하였습니다.

결국 케빈 파이기는 자신의 퇴사 여부를 걸고 디즈니 CEO 로버트 아이거에게 펄머터와 자신 사이의 의사 결정 시스템을 조정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로버트 아이거는 케빈 파이기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마블 영화 제작 시 케빈 파이기가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펄퍼터가 아니라 디즈니 스튜디오의 앨런 혼에게 의사결정 승인을 요청하도록 조정했습니다. 즉, 2015년 9월부터 마블 스튜디오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벗어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자회사로 편입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케빈 파이기는 아이작 펄머터로부터 벗어나 후속작을 자유롭게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조정 속에서 크리에이티브 위원회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케빈 파이기와 결이 맞는 위원회 멤버들은 파이기와 함께 영화를 제작하고, 펄머터와 결이 맞는 위원회 멤버들은 펄머터와 함께 <에이전트 오브 실드>같은 마블 코믹스 원작 TV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링크) 이 조정 이후 마블 팬들은 펄머터로부터 자유로워진 파이기의 마블 영화에 더 큰 기대를 갖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마블의 영화와 TV드라마 사이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을 아쉬워합니다. ABC의 <에이전트 오브 실드>나 넷플릭스의 <디펜더스> 등 TV 드라마 마블 히어로들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펄머터에게서 벗어나 <인티니티 워>까지

<아이언맨>에서 <인피니티 워>까지 10년 동안 케빈 파이기는 마블 스튜디오의 제작자로 시작해 사장으로서 마블 히어로 영화의 제작을 총지휘해 대중문화의 거물이 되었습니다. 여러 제작사와 제작진에 따라 때로는 원작을 훼손하여 팬들을 좌절시켰던 마블 히어로 영화들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이름의 통일된 하나의 세계로 엮어내었습니다. 그 덕에 원작 만화 팬들은 오래전부터 꿈꾸던 '헐크 VS 아이언맨', '아이언맨 VS 캡틴 아메리카', '토르 VS 헐크'의 세기의 대결을 스크린에서 맛볼 수 있었습니다. 케빈 파이기의 마블은 원작 만화에 충실하면서도 영화만의 차별점을 갖는 히어로와 스토리를 창조하여 더 많은 마블 팬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미 성공한 원작 만화가 많으니 그 안에서 좋은 캐릭터와 스토리만 고르고 골라 괜찮은 감독과 각본가에게 맡겨버리면 그만 아닌가? 마블 영화의 제작자만큼 복 받은 직업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거대한 조직 안에서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해당 분야를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해도 상사가 자기 취향을 강요하며 스토리를 바꾸라 하거나, 예산 때문에 반드시 등장해야 할 캐릭터를 빼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생을 견뎌낸 케빈 파이기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시빌 워>를 시작으로 펄퍼터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과연 <시빌 워> 이후의 마블 영화는 예전보다 더 파격적입니다. <토르: 라그나로크>가 가장 대표적으로, 포스터만 봐도 예전 마블 영화 포스터와 다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에 우려도 있었지만, <토르: 라그라로크> 개봉 이후 그런 우려는 수그러들었습니다. <블랙 팬서>는 기존 마블 영화의 기록들을 갱신하며 히어로 영화에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더했다는 긍정적인 비평까지 함께 얻었습니다. 이처럼 <시빌 워> 이후, 위로부터 간섭이 줄어든 케빈 파이기의 감독 용병술은 더욱 재기발랄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케빈 파이기의 성공 신화가 모두에게 칭찬받지만은 않았습니다. 파이기와 그가 주축이 되었던 크리에이티브 위원회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언맨>, <아이언맨2>의 존 패브로 감독, <어벤져스>, <어벤져스2: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조스 웨던 감독과 여러 부분에서 충돌했고, 결국 이 두 감독은 마블 영화감독 자리에서 떠났습니다. <토르: 다크 월드>의 감독으로 여성을 추천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나탈리 포트먼 역시 토르의 연인 제인 포스터 역에서 하차했습니다. <시빌 워> 즈음에는 위원회 내부에서도 펄머터 편의 멤버들과 파이기를 따르는 이들 간의 의견 차이가 발생해 결국 위원회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케빈 파이기에 대한 아쉬움은 팬들로부터도 나옵니다. 연이은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어벤져스 구성이 성적으로, 인종적으로 편향되어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입니다. 여성 캐릭터는 블랙 위도우와 스칼렛 위치 등 소수이고, 인종 면에서는 백인이 압도적입니다. 슈퍼히어로는 백인남성만 가능한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온전히 케빈 파이기 혼자만의 책임일까요? 제작자와 감독의 갈등의 경우, 작가 혼자 작품을 창작하는 소설이나 만화가 아닌 영화 같은 집단 창작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때 있었던 감독과의 갈등, 쉽게 이해가지 않아 비판받았던 일부 내용 전개들도 그 원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케빈 파이기를 향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더 올라갔습니다. 어벤져스 내 인종과 성별의 비대칭 문제 역시 <블랙 팬서>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주연 영화이자 여성 감독이 (공동이지만) 연출하는 <캡틴 마블>(2019년 3월 개봉)을 통해 완화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원작인 마블 코믹스는 점점 성별과 인종의 다양성을 추구하여 최근 많은 비백인, 여성 슈퍼히어로를 선보이고 있는데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도 그런 다양성을 추구하고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 2014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사회에서 케빈 파이기. ⓒwikipedia.org

2014년 4월에 발행한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의 기사 "B급 히어로들로 마블을 구하려는 '펑, 쾅, 쿵' 계획"에 따르면, 케빈 파이기는 자기 사무실 벽에 2014년부터 앞으로 10년 간 발표할 영화 지도를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2028년까지 가는 새 지도를 인쇄했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2020년까지의 라인업을 통보 받았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 있을까요? 1973년 생으로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인 그가 지난 10년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여러 흥행작을 제작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처럼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10년도 승승장구하리라 예측합니다. 우리는 지난 10년과 앞으로의 10년을 통해 한 세대가 태어나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진행 중인 거대한 프랜차이즈의 행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케빈 파이기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새로운 10년을 기대해봅니다.

▲ 케빈 파이기가 주도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들. ⓒ프레시안(이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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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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