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를 위한 '한반도식 해법' 제안

[현안진단] 한국만의 비핵화 시간표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맞은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의 기회

우리 민족은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위한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5월 말 ~ 6월 초에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면 한반도 냉전 구조의 해체, 더 나아가 동아시아 냉전 구조의 해체를 맞이할 수 있는 기대의 문이 열리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구조는 1945년 8월 일본 제국주의 패망 이후 중국 대륙에서 승기를 잡아가던 중국공산당에 맞서 만들어졌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뒤, 동아시아에는 냉전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형성되면서 냉전 구조는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참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하나의 중국을 바탕으로 하는 '상하이 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면서 냉전 구조의 한 축이 무너졌다. 그 뒤 1972년 9월 중·일 국교 정상화(중·일 공동성명)가 이루어지고, 1979년 1월 미·중이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 냉전 구조는 깨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해체된 이후에도 요지부동으로 남았다. 오히려 북한의 핵 개발로 냉전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과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으로 10월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되어 한반도 냉전 구조가 해체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화해 분위기는 일순간에 사라지고 또다시 냉전의 바람이 몰아쳤다. 그 뒤 노무현 정부에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 구조의 해체를 시도했지만, 이미 임기 말에 접어든 터라 성과를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또다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의 기회가 왔다. 우리의 주도력이 바탕이 되고 주변국들의 지지와 협조적 분위기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잇따라 개최될 예정이다. 앞으로 보름 후 먼저 열리게 될 남북 정상회담의 핵심의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관계 개선의 세 가지로 좁혀져 있다. 이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은 한 달 뒤에 열릴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와도 맞닿아 있다. 남북 간의 교류·협력이나 인도적 사업 등은 남북관계 개선의 큰 틀 속에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시간표와 트럼프의 시간표

북한은 2012년 헌법 전문에 '핵보유국'임을 명시했고, 지난 10년 동안 비핵화를 의제로 하는 어떠한 대화도 거부해 왔다. 그러던 북한이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조건부나마 핵 포기 회담에 나올 용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3월 5일 우리 측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군사위협의 해소와 체제안전의 보장'을 조건으로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약속했고, 북·중 정상회담에서도 이를 확인하였다.

▲ 지난 5일 정의용(오른쪽) 수석 특사가 문재인 대통령의 편지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전달한 뒤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하지만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를 두려워해 북한이 비핵화를 서두를 것 같지는 않다. 3월 9일 개최된 북한 당 정치국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자력갱생'을 재차 강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미국의 이란 핵 합의 파기 예고와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 등 중동지역에서 커다란 전선이 만들어지고 있어 대북 군사행동의 위험부담도 덜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시간표는 길게 잡혀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급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11월 미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지만, 각종 스캔들로 시달리고 있어 오는 11월 미 중간선거의 결과가 그의 재선 가도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통상전쟁, 중동질서 재편을 준비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서 조기성과(early harvest)를 바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의 시간표는 2년에 맞춰져 있다.

임기의 1년을 마치게 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은 4년이다. 4년은 길지도 않지만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다. 이제 한반도 문제의 운전대를 잡은 한국이 우선해야 할 일은 트럼프의 시간표와 김정은의 시간표를 조정하여 양자 모두 동의하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명운이 걸려있는 역사적인 남북 및 북·미 연쇄 정상회담을 앞두고 리비아방식, 이란방식, 우크라이나 방식 등 여러 가지 북핵 문제의 해법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의 시간표를 짜기 위해서는 외국의 비핵화 모델을 참고하되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지난 5년 반에 걸쳐 진행됐던 6자회담이라는 비핵화 협상의 경험이 있다. 다만 당시와 지금은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 6자회담 경험에 기초하면서도 새롭고 창의적인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6자회담의 실패가 주는 교훈

6자회담은 2003년 8월에 제1차 회의가 시작되어 25개월만인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야 포괄적 합의인 「9.19 공동성명」에 도달하였다. 여기에는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 포기, NPT 및 IAEA 복귀, 소극적 안전보장, 경수로 제공,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경제협력, 평화체제 등이 하나의 바구니에 다 담겨 있었다.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지만, 미 재무부가 북한이 위조달러를 제조했다며 「애국법」 위반을 걸고 나오는 이른바 'BDA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단계적 목표를 정하는 협상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17개월 만에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2.13합의)를 타결 짓고 그 4개월 후인 2007년 6월에 이행을 완료하였다.

그 뒤 곧바로 협상에 들어가 3개월 뒤에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10.3합의)를 통해 핵시설의 불능화를 목표로 하는 방안을 타결지었다. 하지만 일본이 의제 밖의 납치문제를 거론하며 자국의 분담 몫인 중유 20만 톤의 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불능화는 80%에 머문 채 중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12월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에서 미국측과 북한측이 불능화에 대한 검증문제에 합의를 보지 못해 협상이 결렬되면서 이행은 완료되지 못하였다.

6자회담은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타결 및 이행(가동중단·봉인, 불능화)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개시부터 합의에 이르기까지 장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북한의 살라미 회담 전술 탓도 있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버텀업(Bottom-up)' 방식이었기 때문에 의사결정에도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당시 수석대표의 급도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차관급인 데 비해, 미국은 차관보, 일본은 국장급이었다. 그 외에도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로 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6자회담이 실패로 끝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이었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북한이 기존의 핵무기 협상-보유 양면전술에서 벗어나 확고하게 핵무기 보유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 뒤 북한은 일관되게 비핵화를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대화에도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몇 차례의 북·미간 탐색 대화가 있었을 뿐 제대로 된 협상은 진행되지 않았다.

새롭고 창의적인 한반도식 해법의 모색

그렇다면 이번에 개최되는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최대 의제인 비핵화에 초점을 두고 볼 때, 두 개의 연속 정상회담과 향후 개최될 비핵화 다자회담 간에는 포괄적 합의, 일괄적 타결, 단계적 이행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

먼저,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모든 핵시설들과 핵무기 폐기, 대북 군사위협 해소 및 체제 안전 보장 방안들, 대북 제재 해제와 경제협력 방안들을 하나의 바구니에 담는 포괄적 합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듯 짧은 시간 안에 포괄적 합의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우려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9.19공동성명」의 작성을 위해 남북한과 미, 중, 일, 러 등 6개국이 참가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한·미의 사전협의와 북한의 동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3월 8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정의용(왼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

다음, 뒤이은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합의사항들을 3개의 패키지(현재·미래핵, 과거핵, ICBM)로 나누어 일괄적으로 타결할 필요가 있다. 현재·미래핵이란 북한의 핵 시설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영변원자로와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원심분리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과거 핵은 북한이 이미 생산해 보관하고 있는 핵물질을 가리킨다. 대륙간탄도미사일도 폐기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에 상응하여 한·미 군사연습의 조정이나 연락사무소 설치, 제재완화와 같은 군사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 그리고 경제지원 등의 보상조치를 한국과 미국이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어서, 후속의 비핵화 다자회담에서는 단계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과 검증을 완료하도록 한다. 과거 6자회담에서처럼 가동중단·봉인, 불능화, 폐기의 3단계를 거치는 방법도 있지만, 문재인 시간표에 따른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서 제시한 3개 패키지의 특성에 따라 당장 위협이 되는 과거 핵은 즉각 폐기하고, 현재·미래핵과 ICBM은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제재해제나 한반도 평화협정, 미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 개설 등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북한이 2년 내 핵 폐기 시간표에 맞추어 적극 협조한다면 미국도 초기 단계부터 다양하고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통 크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성패는 한국이 자체 시간표를 갖고 미국과 북한의 시간표를 조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남북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이 기다리고 있지만, 미국과 북한이 서로 자신들의 시간표를 고집한다면 비핵화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가 새롭고 창의적인 해법을 갖고 미국과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외교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울러 중국, 러시아, 일본 등도 협조와 성원을 보내고 타협의 공간을 넓히는 긍정적 역할을 하도록 좀 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냉전 구조 해체라는 세계사적 전환은 역내 모든 나라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명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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