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이 행하는 네 가지 원칙은 널리 알려졌다. 무경운, 무제초, 무비료, 무농약이 그것이다. 그런데 농부마다 생각하는 농법이 다르고,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원리가 '자연농'이라는 한 이름 아래 병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몹시 궁금했다.
자연농 원치과 원리
- 자연농 원칙을 말할 때 사람마다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농사 기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기본 원리와 철학에서도 차이를 느낄 때가 있다
'4무(無) 원칙'을 일반화시키기에 앞서 대단히 정교하게 짜인 자연생태시스템, 미시적으로 작물이 자라는 '그 자리의 서식환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이다. 즉 작물의 성질, 토지, 기후대가 매년 변화하는 조건 그리고 농부와의 관계까지 아우르는 일로서 자연농을 바라봐야 한다. '자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는 농사'라는 말이 오해를 낳기 쉽다. '무엇을 안 하는 것(4무)'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이 더 어렵고 섬세하며 중요한 일이다.
'원칙'을 적용하기에 앞서 '원리'부터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었다.
- 경운과 제초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자연상태에서 땅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지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경운을 하지 않는다. 경운의 주목적은 풀을 잡는 데 있는데, 풀을 죽이면 안 된다.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건 풀밖에 없다. 풀이 쌓여서 부엽토가 되는 것이므로 풀이 많아야 한다. 풀 사이에서 작물이 자라는 상태가 가장 자연스럽다. 그래서 가능한 한 뽑지 않고 밑동 부위 5~10센티를 살려두고 베어주는 정도만 하고 계속 생장시켜야 한다.
- 풀을 뽑아 말렸다가 멀칭하는(덮는) 방법을 널리 쓰는데, 어떻게 보나?
자연농 원리에서 보면 난센스다. 풀 개체가 작물보다 훨씬 많은 게 자연에 가까운 모습이다. 자연이라는 상호공생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멀칭을 하면 일이 편하지만 자연계 순환고리를 파괴한다. 이상한 벌레나 굼벵이가 생기는 부작용이 따른다. '제어'할 것은 풀이 아니라 우리 욕심이다.
- 그러면 작물을 거둘 때 뿌리는 어떻게 처리하나?
작물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전지가위로 지상부만 잘라내고 ‘뿌리부’는 땅속에 남긴다. 낫을 쓰다 보면 뿌리째 뽑히기 쉬워서 가위를 쓴다. 뿌리가 흙 속에 남아서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에 뿌리를 뽑으면 땅에는 손실이다.
풀에 대해 설명을 더하자면 이렇다. 풀은 자기들이 살 수 있는 최적지를 찾아 스스로 살아가며 대지를 보존하는 본성이 있다. 풀이 무성한 곳은 어디든 농사가 잘 되는 게 당연하다. 인간은 최적지 파악 능력이 한참 모자라기 때문에 비료와 퇴비를 빌어 그 갭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땅의 특성을 잘 알수록 갭이 줄어들어 자연적인 농사가 이루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옥도도 어느 정도 증가하겠지만 그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령 이곳 농장 토양을 분석해보면 NPK(질소, 인산, 칼륨) 필요량이 10분의 1 밖에 안 나온다. 결국은 NPK가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막에서도 자라는 식물이 있듯이 기후조건이 맞으면 어느 정도 농사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벌레와 병, 무투입 농법
- 자연농에서도 연작(連作) 피해가 발생하는가? 돌려짓기도 하나?
윤작(輪作)을 안 하는 것이 식물 본성에 맞는다. 토마토나 가지가 바람에 날려 다른 데 가서 열리겠나? 그 자리에서 열린다. 윤작하는 이유는 균과 벌레 때문인데 자연농에 벌레와 균은 없다. 내 경우 고추와 토마토를 제 자리에서 8년째 수확하고 있는데 별문제 없다. 사람들이 자연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병이나 벌레 문제를 연작에서 오는 피해로 보는 것이다.
- 자연농에는 균과 벌레가 없다니?
식물체가 건강하면 어느 정도 물리친다. 땅이 좋아지고 생태적 다양성도 뒷받침되면 잘 자라고 병도 벌레도 준다. 식물 스스로 쫓아내는 힘이 있다.제일 빌빌대는 개체에 벌레가 가장 많이 낀다. 벌레와 병의 원인(連作)은 기본적으로 토양에서 오는데, 생태환경이 좋으면 작물도 건강해지면서 병과 벌레를 견딘다. 풀이 벌레의 먹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퍼머컬처 그룹에서 양배추나 배추를 풀 사이에 숨겨 심으면 벌레 피해가 적다는 논리가 그렇다. 그러나 토양 조건을 무시하고 풀만 기른다고 해서 벌레가 덜 오지 않는다.
- 무비료 원칙은 무투입과 통할 것 같다. 그런데 무투입 원칙을 따르면 자가 퇴비를 만들거나, 오줌똥을 순환시키는 데 소극적으로 되는 것 아닌가?
먹은 만큼 배설물을 돌려줘야 맞는다. 하지만 완전한 순환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우선 농작물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기 때문에 그들의 분뇨를 얻을 수 없다. 농사 결실 중 내가 빼가고 다시 돌려주지만 빼간 것보다 채워주는 양은 항상 모자란다. 게다가 내가 먹는 것 가운데 내 농작물만 아니라 외부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집안 음식물 쓰레기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순환 구조가 복합계이기 때문에 실제 논밭을 들고나는 에너지양을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 내 밭에서 대충 오분지사 이상 외부로 나간다고 추정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유출을 풀이 보완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퇴비에 대해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무비료 원칙에는 퇴비도 포함된다고 한다. 일반 농사에서 퇴비를 상당 기간 부엽도, 부산물, 건초, 분뇨 따위를 섞어서 별도로 숙성 과정을 거쳐서 만든 다음 토양 속에 묻어주거나 흙과 뒤섞어준다. 하지만 자연농 퇴비 개념은 없다. 풀은 바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작물 부산물은 정리해서 그냥 흩뿌린다. 음식물 찌꺼기와 오줌똥 경우 어느 정도 건조와 삭힘을 거친 다음 겉흙에나 뿌리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맞다. 숲에서 부엽토를 끌어 온다든지, 표토(表土) 밑으로 흙과 섞어 넣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표토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썩어서 흙으로 스며드는 자연계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자연 입장에서 보면 비료뿐만 아니라 부엽도, 퇴비(풀, 짚)멀칭도 오염 물질이다. 원래 시스템대로 돌아가도록 해야 오염이 아니라는 논리다.
- 벼농사로 들어가 보자. 사시사철 무논(물논) 상태를 유지하는 게 특이하다. 보통은 출수기를 지나고 알곡이 여물 때 물을 빼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
서식환경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모내기 때 물을 많이 빼서 3~4센티 유지한다. 올챙이가 헤엄쳐 다닐 수 있는 수위다. 모내기 직후에는 8센티로 하고 성장기 중에 최대 20센티까지 높여 출수 직전까지 유지하고 그 뒤 10센티 상태로 가다가, 벼 베고 나서는 5~10센티로 겨우내 유지한다. 실지렁이가 수면 위로 호흡할 수 있는 깊이다. 8월 중순 무렵 출수 이후에는 풀이 약화하는 대신 오리가 날아드는데, 헤엄치고 돌아다니지 못하게 수위를 20센티에서 10센티로 낮추는 것이다. 모내기 때 보통 기계모는 10센티, 손모는 20센티인데 여기서 8센티는 풀 발아를 억제하는 유효수위다.
-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자연농을 할 수 있는 적정 규모는 얼마나 될까?
2000평에서 더 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일 년에 딱 두 달 쉬고 열 달을 내리 일한다. 이 규모에 최적화된 상태인데도 늘 벅차다. 2000평 이상 짓는 자연농은 의심스럽다. 작물과 풀 한 포기 한 포기 다 만질 수 없다면 더 안 하는 게 낫다. 짐승 피해, 날씨 조건 등에 의해 3분의 1은 망하는데, 망하는 거 고려해서 2000평이면 족하다고 본다.
- 자연농에서 자가 채종이나 토종씨앗 보존은 어떤 의미가 있나?
볍씨는 자가채종이 기본이고 채소 씨앗은 모두 구입한다. 토종은 일부만 있다. 다국적 기업 종자 의존을 줄이고 종잣값을 아낀다든지 재배 연속성을 유지한다든지 하는 좋은 의미가 있지만 실제 재배 과정에서 차이를 못 느낀다. 자가 채종이 자기 경작지에 맞는 적응성을 선발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근거가 약하다.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지 않는 바에야 기대하지 않는다. 씨앗은 생명력이 강하고 대단한 능력이 있다. 씨앗 자체보다 발아 이후 재배환경, 서식환경 문제가 훨씬 민감하고 섬세하게 생장에 영향을 미친다.
온전한 전체로서 '서식환경'에 대한 이해를 거듭 강조한다. 그것도 '지금 바로 여기' 놓인 조건 말이다. 똑같은 방법도 그 결과는 여기 다르고 저기 다르다. 상당히 까다롭고 섬세한 농사임이 분명하다.
개체 하나하나와 교감하는 농사
- 작물 서식환경을 잘 보살펴서 재배하는 것 말고도 자연농만의 비법(?)이 있을 법하다
무엇보다 생명체와 교감을 할 수 있는 남다른 감수성이 필요하다. 오이가 노균병에 걸렸을 때, 이웃 농부가 일주일에 두 번 농약을 주라 하길래, '야 들었어? 농약 쳐야 한데. 난 농약 못 쳐! 그러니 힘 좀 내봐. 알아들었으면 잎 좀 흔들어봐!' 그랬더니, 잎을 마구 흔드는 거다! 일주일쯤 지나니 싱싱하게 기력을 회복했다. 이렇게 모든 작물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풀을 벤 때는 꼭 미안하다, 용서해달라고 부탁한다. 교감에서 기본은 어루만지는 것이다. 풀도 서로 비비며 자라고 모든 동물도 애정 표현으로 몸을 비빈다. 동식물 공통이다. 풀을 자르기 전에 만져주면서 말을 걸면 훨씬 협조적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베어질 때 느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래야 풀에게도 덜 미안하다. 정서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성과가 좋다. 오이는 특히 만져주는 정도에 따라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데, 오이가 손길이 필요한(또는 좋아하는) 작물이라는 증거다.
믿기 어렵다고? 농사란 수억 년에 걸쳐 식물에서 인간까지 이어온 지구 진화의 역사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소통을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반문한다. 작물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너무도 확연한 체험을 일상 속에서 반복했기에 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씨를 뿌리는 순간 나와 작물 간의 유일무이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 성장하는 것이다. 농부도 애정을 다하고 오이도 잘 자라려고 노력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알뜰하게 잘 먹어주면 관계는 실현(?)된다. 다시 관계는 끊임없이 순환하겠지만….
주도면밀하고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농사
- '자연농' 하면 떠오르는 여유롭고 느긋한 농사라는 선입관이 깨지는 느낌이다. 얼핏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이라는 자연농 원리와 어긋나 보인다
내 경우 자연농을 책으로 배워서 했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현장에서 검증해야 했다. 초기 삼사 년 동은 절망적이었다 할 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치열하게 실험하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농이 일이 절약되는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체 하나하나 상대하고 보살피는 일이라서 몇 배나 더 많은 에너지가 드는 농사다. 이 때문에 힘들게 일에 매달린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농사는 채취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연을 이용해서 수확물을 얻는 행위이다. 그중 자연농은 그 어떤 농법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실천을 동반한다.
밭에서 스마트폰을 열어 보여주는데 농장의 작물 배치 디자인, 작물별 종별 재배일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겨우내 두 달은 꼬박 앉아서 공부하고 개선점과 보완책을 찾아 늘 새로운 계획을 세운단다. 똑같이 반복되는 농사란 없다. 또 한 가지, 자족할 수 있는 장급농과 다른 사람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판매 수익을 얻어야 하는 전업농의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기에 농사일의 강도나 태도에도 차이가 크겠다.
- 자연농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도(修道)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적 충만감이 없다면 지속하기 힘든 농사가 아닌가? 결과 못지않게 과정에서 얻는 무형의 소득이 높을 것 같은데 어떤가?
자연과 상호 교감하면서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 자신이 자연주의 스타일 아니었음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다. 몇 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내가 아는 자연에 대한 지식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온전히 작물 편에 서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접으니 훨씬 더 시야가 넓어지고 만족감도 커졌다. 아낌없이 베푸는 자연의 품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고, 그런 자연과 나의 관계를 떠올리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농부는 자기 체험적 사실이 아닌 것은 표현을 삼가고 행여 그 너머를 말할까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그이 이야기 가운데 '원리'는 이해를 돕기 위한 기저였을 뿐이다. 줄곧 체화된 언어, 현장에서 상황에서 얻어진 언어로 말했다. 그럼에도 섬세하고 미묘한 자연농의 이야기 행간에 숨은 메시지를 글로 살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뷰어가 지닌 한계가 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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