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정치권이 비례대표제 전환을 핵심으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2018년 지방선거 전에 스스로 합의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자유한국당의 완강한 반대, 국회선진화법, 정치관계법을 다수결이 아닌 합의 처리해온 국회 관례라는 3가지 상수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촛불항쟁을 경과하며 변화된 정치 지형에서 전국적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정부여당에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의사 일정을 사무적으로 밟아나가는 것 이상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올바른 선거제도 개혁을 추동하는 동력을 시민사회에 구해야 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최근 정치개혁공동행동, 비례민주주의연대 등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활동이 어느 시기보다 활발하다. 노동당·녹색당·민중당 3개 진보정당도 올해 초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제정당 연석회의)를 구성해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비례대표 도입을 위한 개헌 등 목소리를 높여 왔다. 지난 11월 11일에는 정치개혁공동행동과 국민주도 헌법개정 전국네트워크가 공동 주최한 '민주주의 UP, 2017 정치페스티벌'에 참여해 '5대 분야 23개 개혁과제'를 발표했다.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 중심의 현행 선거제도에서 비례대표제로의 전환이 진보적 시민사회의 합치된 의견인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제정당 연석회의는 비례대표제 설계의 핵심 요소와 관련한 발화에서 진보 시민사회와 온도 차이가 있다. 제정당 연석회의는 정부여당의 사실상 공식 입장인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반대하며, 특히 정치개혁공동행동의 주장처럼 비례의석 비율을 지역구 의석의 50% '이상'으로 하자는 모호한 주장이 아니라 지역구와 비례의석의 비율을 정확히 1:1로 하는 안을 지지한다. '민심 그대로' 선거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핵심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불평등선거 '권역별' 비례대표제
비례대표제 전환의 의미가 유권자의 절반에 가까운 표를 사표로 만드는 현행 불평등 선거제도의 시정에 있다면, 현재 제도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불평등 선거의 연장일 뿐이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권역별로 후보자 명부를 작성하더라도 정당의 전체 의석수는 정당의 전국득표율에 일치시킨다. 이 때문에 독일식을 '권역별' 비례대표제라 말하기 어렵다.
반면 중앙선관위가 낸 의견서와 정부여당안으로 보이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은 권역별 정당득표율에 따라 권역별로 의석을 배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어떤 선거구는 30%대의 득표율로 당선 되고 다른 선거구에서는 40%대의 득표율로 낙선하는 1표 가치의 불평등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통해 일정하게 완화될 뿐 시정되지는 않는다. 즉 순수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개념 자체가 불평등 선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지역구 제도가 없이 모든 의원을 전국 정당명부를 통해 선출하는 전면 비례대표제나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비교해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정당화 논리가 제대로 제시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2015년 2월 중앙선관위가 제출한 '정치관계법 개정의견' 문서를 보면,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지역주의 완화와 유권자 의사의 충실한 반영을 위한'이라는 제목 아래 편재돼 있을 뿐, 다른 어떤 설명도 없다. 그런데 전면 비례대표제나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야말로 권역별 비례대표와 비교해 지역주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이다.
박주민 의원안에서도 현행 선거제도의 표심 왜곡만을 지적할 뿐 그 대안이 왜 권역별 비례대표제여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화 논리는 없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지난 9월말 국회에 제출한 선거법 입법청원안을 보면 "전국 단일 선거구가 보다 바람직"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곧바로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도입될 경우 비례의석은 100석 이상으로 함"이라고 함으로써 평등선거제도의 왜곡된 형태로서 순수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은 생략하고 있다.
국토가 좁고 연방국가도 아니며 지역의 독립적 성격도 없는 한국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선거제도 개혁의 중심 의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현행 선거제도 아래서 누리던 기득권을 바뀐 선거제도에서도 최대한 연장하려는 거대 정당들의 욕심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안에서도 제도 설계에 따라 평등선거의 수준은 현저히 달라지는데, 지역구와 비례의석의 비율을 1:1이 아닌 2:1로 하자는 것이 대표적이다.
평등선거에서 멀어진 비례대표제 논의
한국갤럽의 최근 정당지지율 조사 결과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의 정당지지율은 46%를 달리고 있다. 만약 지역구 40석, 비례의석 20석으로 구성된 의원정수 60석의 권역 선거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더불어민주당에게 60석의 46%(정당지지율)에 해당하는 28석을 할당하는 것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다. 그런데 정당지지율 46%를 지역구 선거에 적용할 경우 40석 중에서 35석 안팎을 싹쓸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정당지지율을 초과하여 당선되는 의석이 7석 안팎이라는 얘기다. 만약 지역구와 비례의석을 각각 30석으로 한다면,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에서 28석까지 석권하더라도 정당지지율을 초과하는 의석은 발생하지 않는다.
거대 정당들의 선거제도 개혁 관련 토론회에는 심지어 지역구와 비례의석 비율을 3:1, 4:1로 하더라도 사표 발생률이 높지 않다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시뮬레이션은 반세기가 넘는 현행 선거제도 아래 사표 심리가 켜켜이 누적되어 나타난 투표값을 바뀐 선거제도에 그대로 대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수학을 들러리 세운 기만의 정치학이다.
한국의 정치선거제도는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과 성장을 체계적으로 봉쇄하는 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유례를 찾을 없는 높은 선거기탁금제도, 거대 정당에게만 특권적으로 배분되어 정당들의 재산증식 수단으로까지 변질된 국고보조금제도, 선거연합정당과 지역당의 불허, 자유로운 정당 활동과 시민의 정치 참여를 막는 온갖 규제들이 모두 그렇다.
그리고 정당득표율 3%라는 현행 비례의석 배분 기준, 소위 말하는 봉쇄장치는 소수정당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이 기준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특별히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수정당에 대한 체계적 배제가 이뤄지는 정치 환경을 고려했을 때 현행 기준은 너무 높다. 비례대표제 아래의 새로운 봉쇄기준은 '1/의석수%'로 주장하는 것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그런데 현재 논의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아래서는 사실상의 봉쇄 기준이 현행보다 더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소수 진보정당의 외로운 주장으로 묻힐 뿐이다.
보이콧으로 일관하는 자유한국당은 논외로 치더라도, 진보 시민사회는 선거제도 개혁이 한국 사회의 중심 의제로 부상한 시기에 비례대표제의 구체적 설계에 관해 원칙 있고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정부여당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 거대 정당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현실로서 인정하는 전제에서는 제대로 된 선거개혁안이 도출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에 마치 권역별 비례대표제라도 하기만 하면 선이고, 비례의석을 조금이라도 확대하면 진보의 우군인 것 같은 메시지가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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