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비밀 금고, 그리고 박근혜의 금고 정치

[기자의 눈] 독재 정권 '비자금 금고' 정치를 21세기에 목격할 줄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족'이었던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최근 검찰 조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받아 총무비서관실 비밀금고에 보관했다"고 했다.

박근혜와 금고. 옛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전 새누리당 의원)은 2012년 11월 21일 대통령의 금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박근혜 캠프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이었던 그는 "내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모시고 집권해 청와대에 가보니까 거짓말 안 보태고 이 방(당시 새누리당 당사 2층 강당)의 40% 정도 되는, 은행지점보다 더 큰 스테인리스 금고가 있었다…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현금을 쌓아놓으려고 그 금고를 만든 것이었다…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걸 보고 '나쁜 놈', '도둑놈'이라며 '당장 처리하라'고 해서 8t 트럭 5대 분량이 실려 나갔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들의 '부정 부패' 사례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박근혜를 대통령에 당선시켜 "권력형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취지로 연설을 했다.

과거 청와대에는 비밀금고가 존재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금고가 두개였다. 대통령 집무실에 하나,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실에 하나.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스테일리스 금고'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금고에는 '비자금'이 담겨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주로 기업체들로부터 '상납'을 받았다. 지금이야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일상이었다.

▲ 중앙일보 91년 5월 31일자 보도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 전 실장의 회고록 <아, 박정희>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정치 성금 대상 기업을 엄선하고 그 기업주를 청와대 신관에서 만나 기업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판공비와 기밀비 중 일부를 민주주의의 필요악적 비용인 정치 자금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면서 일체 반대 급부는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성금은 최고 1억 원, 최하 1000만 원 범위 내에서 각 기업의 사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부탁한 스물 대여섯 기업주들은 모두 기꺼이 승락하고 협조를 확약해 주었다."

박정희는 이런 방식으로 받은 돈을 집무실 금고와 비서실장 금고에 넣었다고 한다. 금고에는 늘 1~2억 원의 잔액이 유지됐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수십 억 원의 돈이 거기(금고)에 들어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이 억측이라고만 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금고 속 현금다발은 '쌈짓돈'이었다. 이 돈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용됐는지 밝혀지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 '독재 정권 유지'에 은밀히 사용된 돈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청와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청와대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권력은 유지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 금고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1989년 1월 30일 검찰은 5공 비리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10.26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금고에서 발견된 현금 등 6억 1000만 원은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이 박근혜에게 전달하고 2억 원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5000만 원은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교부하여 각국에서 이를 사용했으며 나머지 1억 원은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총장의 승인을 받아 합수부 수사비로 사용됐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이 금고 속 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전두환도 금고 속 돈으로 '통치' 행위를 한 것이다. 전임 대통령의 딸,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 금고 속 돈을 선심 쓰듯 줌으로써 '후환'을 방지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2017년,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으로부터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았다는 증언이, 박 전 대통령의 오랜 보좌진으로부터 나왔다. 그 돈을 금고에 두고 썼다.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자 상납을 중지시켰다. 그 돈과 금고는 어디로 갔을까.

청와대에 '비자금 금고'를 두는 것은 박 전 대통령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다. 그의 '정치적 스승'이 그랬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부정한 돈'을 이용한 검은 '금고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박근혜와 금고, 이번에 밝혀진, 앞으로 밝혀질 이것이 한국 정치의 마지막 추악함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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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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