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나도? 국정원 사상검증대 8500명 올라갔다

국정원 개혁위 "A, B, C '좌파 등급' 매겨서 '척결'"

국정원이 박근혜 정부 당시 이른바 문화계 좌파 인사를 등급 별로 나눠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의 기초안을 마련했음이 확인됐다. 국정원이 이들을 '척결' 대상으로 묘사하는 등 섬찟한 표현을 써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도 국정원 내부 조사 결과 확인됐다.

국정원은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문예진흥기금 지원 대상자 선정은 사실상 국정원이 주도했다. 청와대가 국정원에 '검증'을 의뢰하고 일선 부처에 '실행'하는 '3각 공조 시스템'의 패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이 이른바 '검증'한 인물은 8500여 명에 달했다.

30일 국정원 개혁위는 '적폐청산 TF의 주요사건 조사결과에 대한 자문·심의내용' 자료를 발표해 이 같은 사실을 전했다.

국정원 "좌성향 문예인 등급 관리"

자료 중 '블랙리스트 작성 관여 사건' 부문을 보면, 국정원은 2014년 3월 19일 '문예계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이라는 제목의 청와대 보고서에서 '문화예술계 좌성향 문제 단체' 15개, 인물 249명을 제시하며, 이들에 관해 "문예진흥기금 선정기관에 좌성향 인물 배제, 정부 보조금 지원중단을 통한 자금줄 차단 등 대응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국정원은 이른바 '좌성향 인물' 249명을 A급(24명), B급(79명), C급(146명)으로 분류한 후, 이들이 "각종 문화예술단체에 포진"해 "뿌리까지 척결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했다. 국민을 척결 대상으로 상정했다.

'좌성향 문제 단체'로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서울연극협회, 민족미술인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 피당 등을 꼽았다.

국정원은 문화예술계의 좌성향 세력 근절 미흡 원인으로 △문예계의 근본적 사회 비판성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사업으로 자금줄 마련 △보조금 확보 목적으로 단체명 변경 및 신규 단체 설립으로 좌 이미지 감추기 시도 △한예종 좌성향 교수들의 이념 편향적 교육 등을 꼽았다.

국정원은 이에 따라 문화예술계 좌성향 단체 및 인물 대응전략도 제시했다. 내용을 보면, 사실상 문체부의 블랙리스트 작성에 국정원도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확인 가능하다.

국정원은 "좌성향 인물 차단 조치"를 위해 문체부가 "예술위 등 문예진흥기금 지원기관을 포함한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 주요 보직에 좌성향 인물이 배치되지 않도록 인사검증을 실시"하고 "특히 예술위·영진위 등 자금지원 기관의 좌성향 실무진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문제 단체·인물에 관한 기사를 내 비리·부조리 관련 증거를 확보"해 "자발적 사임을 유도하고, 임기 만료 시 연임 차단"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한예종의 경우 "'전임교수 및 조교임용규정'에 연구실적 등이 부진한 교수에 관한 제재조항을 신설해, 이념 편향적 교수 퇴출방안을 확보"하라고 했다.

민간단체는 "철저히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해 고립·고사시키고, '중도성향 세력'은 적극 포용"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접근하라고 조언했다. 성향국정우상 보고서에서 적시한 '중도성향 세력'은 친정권적 어용 문화예술 단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 국정원은 "좌성향 문예계에 대항할 수 있는 '건전문예단체'를 중심으로 각종 자금을 배정"하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문화예술계 전반의 우파 전향을 유도"하라고 보고서에 적시했다. '건전문예단체'가 어용 극우 단체임을 명확히 확인 가능한 대목이다.

아울러 국정원은 "언론·인터넷을 통한 좌성향 문예인들의 이념·정치적 활동에 관한 비판 여론"을 만들어 "국민적 거부감을 확산하고 '순수예술' 지향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정부의 직접적 손길이 닿지 않는 민간단체를 손보라고 밝혔다. 문화·예술의 사회비판 역할을 인위적으로 국내에서 배척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깊이 관여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처음부터 뿌리 깊게 한 발을 담근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는 청와대-문체부-산하 기관 라인만 선명하게 드러났으나, 실은 처음부터 국정원 역시 블랙리스트 작성의 한 축이었던 셈이다.

실제 개혁위 자료를 보면, 국정원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상 부임 직후인 2013년 8월 16일 '문화예술계 좌성향 세력 활동 실태'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려 "좌성향 문예계 인물들이 2014년 지방선거를 조직 재건의 호기로 보고 세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어 면밀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국정원 보고서가 올라온 다음 달인 같은 해 9월, 문체부에 '특정성향 예술 지원 실태 및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이어 곧바로 '문화예술정책 점검 TF'를 구성, 문예기금 보조사업에서 특정 문예인 지원을 배제하는 블랙리스트 작성을 추진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2일에는 국정원이 다시 '문예계내 좌성향 세력 재확산 시도 차단 건의' 보고서를 올려 "이명박 정부의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장 건전인사 보임·좌편향단체 보조금 지원 중단 등 '건전화 노력'에도 불구, 척결에 한계"가 있었다며 "이념 오염 온상이 되어온 문예계 정상화를 위해 민·관이 협력하여 좌성향 단체·인물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뿌리 뽑아 나갈 것"을 주문했다.

표현만 봐도 21세기 민주 국가 정부 기관의 보고서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국정원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사실상 주도했음이 드러났다. ⓒ프레시안(서어리)

국정원-김기춘-문체부 '삼각 동맹' ?

국정원과 청와대, 문체부의 이른바 '척결 사업'은 이 같은 일련의 과정 뒤에도 이어졌다.

이 해(2013년) 12월 김 전 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과 미디어 부분에 좌파가 많다. 공직 내부에도 문제 인물이 있으니 잘 살펴봐야 한다"고 지난 국정원 보고서와 비슷한 내용의 언급을 하자 이듬해(2014년) 1월 27일 국정원은 '문예기금 운용기관의 보조금 지원기준 보완 필요 의견' 보고서와 2월 20일 '문화진흥기금 지원사업 심사체계 보완 필요 여론' 보고서를 연달아 청와대에 올렸다.

이들 보고서에서 국정원은 구체적 단체를 거론하며, 이들이 당시 어떤 지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등을 청와대에 건의했다.

'문화진흥기금 지원사업 심사체계 보완 필요 여론' 보고서에서 국정원은 △학술지 <민족미학> 발간 사업 △극단 혜화동1번지, 서울프린지 네트워크 △<작가회의> 소속 필진 등이 계속 문화진흥기금을 받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하고 그 이유로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공모선정 심의위에 좌파 성향 인물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국정원은 관련 대책으로 "문예위 공모심사 체계를 심의위 추천은 물론, 이사회 승인까지 거치는 2단계 체계로 전환해 이사회에 권한을 주고, 심의위원 임명 시에는 '이념편향 여부에 관한 철저한 검증'을 통해 '건전예술인사'를 위원회에 넣으라"고 했다.

노골적으로 문화예술에 관한 사상 검증을 청와대에 요청했음을 확인 가능한 대목이다.

국정원, 민간인 8500명 '검증'

국정원은 이 같은 보고를 바탕으로 블랙리스트 사업을 사실상 주도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국정원의 이 같은 보고를 받은 다음 날인 2014년 2월 21일, 문체부로부터 '2014년도 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지원대상'을 보고받은 후, 국정원 보고를 토대로 "좌성향 인물과 단체가 지원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문체부는 2월 22일 국정원에 이념 편향성 인물 검증을 요청했고, 이후에도 문체부의 검증 요청은 계속 이어졌다.

이와 관련, 국정원 개혁위는 "문체부 장관이 '전과는 경찰, 이적단체 가입 등 정체성 검증은 국정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인물 검증을 국정원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문예기금 지원 관련 검증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국정원의 문체부 담당 정보관(I/O)이 문체부에서 검증요청 명단을 문서나 이메일로 받는다. 초기에는 종이 문서를 받다가, 이후 이메일로 전환했다.

정보관이 건넨 해당 자료를 바탕으로 국정원은 대상자의 시국선언 참여,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 등을 확인해, '신원특이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은 정보관이 다시 구두로 문체부에 통보했다. 일부 단어만 바꾸면, 군부 독재 시절 국정원 전신의 모습이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은 구도다.

문체부는 2014년 8월 들어 청와대로부터 문예계 좌파 견제 강화 지시를 받고, 경찰·공정위와 협조해 자체 검증 시스템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체 시스템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이후 국정원에 협조를 계속 요청했다.

이 같은 청와대-국정원-문체부 인물 검증 시스템에 따라 국정원이 2014년 2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약 2년 5개월 간 문체부로부터 검증 요청을 받은 인물은 8500여 명에 달했다. 이 중 국정원은 민주당이나 통진당 등 당시 야당과 관련 있는 인물, 시국선언에 참여한 인물, 국보법 위반 전력자 등 348명을 '문제 인물'로 선별·통보했다.

2014년에는 1400명을 검증해 102명을 '문제 인물'로 통보했고, 2015년에는 3700명을 검증해 177명을 통보했다. 지난해에는 3400여 명을 검증해 69명을 통보했다.

국정원이 이른바 '검증'한 인물의 명단은 남아있지 않다. 국정원 개혁위는 "문체부 정보관이 외부 유출에 대비해 선별된 명단은 전화로 (문체부에) 불러주고, 별도로 문서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며 "선별·통보 대상자 실명이 모두 기재된 자료는 없다"고 밝혔다.

다만, 지휘부 보고 등을 목적으로 작성된 국정원 내 잔존 보고서와 문체부 블랙리스트 명단 등을 종합한 결과, 국정원 개혁위는 "348명의 문체부 통보 인원 중 181명의 실명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 181명은 특검이 문체부에서 압수해 공소 제기한 블랙리스트 명단과 대부분 일치한다고도 덧붙였다.

이 역시 국정원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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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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