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형제복지원 거쳐 해외입양된 아동 실제 있었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⑦

※이 기사는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등 해외 입양기관이 형제복지원과 '공생관계'였음을 입증하는 명단을 입수했다. <프레시안>은 앞선 기사에서 이같은 의혹을 뒷받침하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과 형제복지원, 입양기관, 미국의 사회복지재단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부랑아·인 시설인 형제복지원에 있다가 입양기관이 인수해 해외로 입양된 아동은 11명이라고 보건복지부가 밝혔다.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1964년~1987년 형제육아원, 형제복지원, 형제정신요양원에서 인수받은 아동의 해외 입양 현황'은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실을 통해 질의한 내용에 대한 답변(2017년 1월)이다.

형제복지원은 부산 사상구(당시 북구) 주례동에 있던 1970-80년대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다.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환경미화'라는 명분으로 부랑인을 잡아다 시설에 가뒀는데, 형제복지원에서는 불법 감금, 강제노역 뿐 아니라 구타, 살해, 암매장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75년부터 1987년 외부로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공식 사망자만 551명에 달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걸쳐 일어난 대표적인 국가폭력범죄 중 하나로 '한국판 아우슈비츠 사건'으로 불린다.

형제복지원에서 입양기관으로 인수된 아동 일부의 기록이 드러난 것은 1970-80년대 입양기관들이 어떤 식으로 입양 대상 아동을 확보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1970-80년대 해외입양이 한해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많이 발생했던 시기에 입양기관들은 입양대상 아동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그 과정에서 입양기관들이 복지시설과 병원 등 의료기관에 양육비, 사례금 명목으로 돈을 줬다는 사실은 당시 보건사회부 감사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고아원이 아니라 부랑아·인 시설인 형제복지원도 입양대상 아동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입양기관의 이런 활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일어났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또 기아 발생시 경찰서 등 공적기관과 사회복지시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경찰은 부모를 찾으려는 별다른 노력 없이 형제복지원 등 시설로 아이를 넘겼고, 아이들은 다시 입양기관으로 보내졌다. 이런 이동 과정은 또 공적인 서류나 정확한 기록 없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직접 쓴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됐다>는 공식운영기록에 영유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은 경찰서나 구청에서 별도의 인수기록 없이 아동을 넘겨받았고, 입양기관이 다시 이 아동을 양육비를 주고 인수한 뒤 해외입양을 보낼 때 비로소 이 아동에 대한 출생신고 등 공적 기록이 발생했다고 보여진다. 입양 대상 아동은 입양이 결정되고 나서 '기아호적(단독호적)'을 만들어 출생신고를 하는 일은 2012년 입양특례법 개정 전까지 일종의 관행이었다.

복지부가 해외입양기관들에 문의해 취합한 명단을 보면, 홀트아동복지회는 2명, 대한사회복지회는 4명, 동방사회복지회는 5명을 형제복지원으로부터 인수해 해외입양 보냈다.

▲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형제복지원 등으로부터 인수한 아동의 해외입양 현황 ⓒ프레시안

홀트아동복지회는 1982년 만 1세의 아동 2명을 각각 노르웨이와 프랑스로 입양 보냈고, 대한사회복지회는 1983년에 만 1세 아동 3명, 0세 아동 1명을 모두 미국으로 입양 보냈다. 동방사회복지회는 1979년 미국과 호주로 0세부터 5세 아동 5명을 입양 보냈다.

하지만 이 11명이 형제복지원을 통해 인수되어 해외입양된 아동의 전부라고 보기는 힘들다.

형제복지원에 있을 당시 중대장 소지(심부름을 하는 사람)를 하면서 유아소대 관련 업무를 하기도 했던 박정식(가명) 씨 증언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영유아의 숫자는 이 정도로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박정식 씨에 따르면, 유아소대는 한방에 40-50명으로 총 100명 정도 규모였다. 담당 보육교사가 따로 있었고, 아동 입양이나 후원 관련된 일은 형제복지원에 있던 목사가 총괄했을 것이라고 한다. 형제복지원의 여자 원생들이 이 아이들을 돌봤다. 그는 100명 정도 있었던 영유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또 다시 아이들이 채워지는 일이 반복됐다고 증언했다. (☞ 관련기사 : 형제복지원도 입양기관과 공생관계였다)

따라서 보건복지부가 밝힌 명단보다는 훨씬 많은 수의 아동이 해외입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 과정에서 해외입양 문제에 대해서도 그 실체가 좀 더 명확히 밝혀져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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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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