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할 권리는 누가 쥐어주는 게 아닙니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20세기 이어 21세기에도 노조 할 권리 외치다 ②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이 해소되고 UN이 설립되면서 ILO는 1946년 UN 산하 16개 전문기구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ILO는 UN 산하기구 중 올해 98세로 최고령을 자랑하고 있다.

1991년 한국의 ILO 가입

한국의 ILO 가입은 그로부터도 45년이 지난 1991년에야 이뤄지게 된다. 본래 UN에 가입하면 간단한 국회 동의 절차만 거쳐도 ILO 자동가입이 가능한 상태였으나, 한국은 당시까지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태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서유럽을 축으로 한 제1세계(자본주의 진영)와 소련·동유럽 등 제2세계(구 사회주의권) 사이에 냉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냉전과 남북 분단상태에서 한국 정부의 UN 단독 가입 시도는 제2세계의 반대를 넘기 어려웠다. 북한 역시 제1세계의 반대로 UN 단독 가입이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UN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ILO 총회에서 2/3 이상의 찬성만 얻으면 가입이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당시까지 ILO를 제외한 UN 소속의 모든 기구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ILO 가입만 막혀있었을까? 제2세계의 반대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군사독재를 계승한 노태우 정권이 엄청난 노동탄압을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동유럽 국가들은 한국 정부의 ILO 가입 추진에 굳이 '이념 논리'를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1989년 전교조 결성과 대량 해고 사태, 1990년 결성된 전노협을 향한 살인적인 공안탄압, 노동자 집회에 쏟아지는 잔인한 경찰 폭력 사진만 인쇄해서 ILO 회원국에 뿌리면 되었다. 게다가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여소야대 국회가 의결한 일부 노동법 개정조차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조차 부정하는 한국 정부를 어떻게 ILO에 발을 들이게 한단 말인가?"

반대로 노태우 정권은 절실했다. 군사독재 정권, 노동탄압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노동기본권을 국제 기준에 맞게 보장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노력하겠다" 수준에서 뭉개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는 사이 노태우 정권에 기회가 왔다. 그동안 남북 정부 모두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자신이라 주장하며 UN 단독가입을 추진해 왔는데, 북한이 남북 동시가입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1991년 9월 18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남북 동시가입을 승인한다.

UN 가입이 이뤄졌으니 ILO 가입은 쉬운 절차였다. 그해 12월, 노태우 정권은 국회 동의를 거쳐 ILO 헌장을 비준한 후 ILO 사무총장에게 헌장 수락서를 보내면서 한국의 ILO 가입이 승인되었다. 현재 187개 회원국 중 한국은 152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ILO는 국제 노사정 기구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정부와 자본가들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기구라는 뜻이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군사독재, 노동탄압 후진국이라는 나쁜 국제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ILO 가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싶어했다.

사실 자본가단체인 경총도 마찬가지였다. UN과 ILO 가입이 되지 않은 상황은, 당시 국제무역에서 한국 자본가들이 불이익을 받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자본가들 역시 UN과 ILO 가입이 불가피하다는 인식 하에, 이를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놓고 한창 로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만일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다면, 1990년에 전노협이 결성되지 않았다면, ILO 가입은 노태우 정권의 정치적 목적대로 활용되고 선전되었을지도 모른다. 1987년 이후 도도하게 전개된 민주노조운동의 진출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UN 가입 직후인 1991년 10월, 전노협·업종회의·전국노운협·전국노련 등이 함께 ‘ILO 공대위’를 결성하고 ILO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 투쟁에 돌입한다. 복수노조금지·제3자개입금지·정치활동금지조항을 폐지하고, 교사·공무원 단결권 및 집회·결사·파업의 자유 보장이 핵심 요구였다.

그해 11월,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ILO 공대위는 6만 규모의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으며, 한국의 ILO 가입 직후인 1992년 2월에는 한국 정부를 ILO에 제소하기에 이른다. 다음해인 1993년 3월, 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ILO 공대위 제소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권고를 채택하게 된다. 한국 정부가 불법으로 낙인찍은 전노협의 정당성이 국제기구에서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여세를 몰아 1993년에 전노협·업종회의·대노협·현총련이 모여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구성했으며, 명실상부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단결을 이루게 된다. 민주노조운동의 적극적인 진출은 자칫 정부와 자본가들의 도구로만 활용될 수도 있었던 ILO 문제를, 노동계급이 활용할 수 있는 무기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 1993년 11우러 30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권영길 공동대표(오른쪽) 등이 여의도 민주당 서울시지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쌀 수입 개방과 근로자 파견법 도입저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삼 정권의 '신(新)노사관계 구상'과 ILO

ILO 공대위를 통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민주노조의 전국적 단결은 1995년에 민주노총 결성으로 조직적 결실을 맺게 된다.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전두환·노태우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정권도 김영삼 문민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관계법은 1988년에 일부 개정만 있었을 뿐, ILO 가입 이후에도 전혀 변화된 것이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인 1993~1996년 사이에만 ILO는 한국 정부에 3차례에 걸쳐 노동법 개정을 권고하게 된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선언에 이어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노동법 문제였다. 정부 입장에서 어떻게든 노동관계법 손질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1996년 4월 23일, OECD 사무총장 내정자인 도널도 존스톤이 김영삼 대통령 면담 뒤 기자회견을 갖고 "노동 문제는 OECD 가입에 있어 중요한 문제"라며 "대통령이 한국의 노동제도에 관한 중대발표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날인 4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신(新)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하겠다고 밝히게 된다.

OECD 가입을 앞둔 상황에서 ILO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있었기에,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숙원이었던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금지 철폐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도널드 존스톤도 "한국 정부와 제3자 개입금지, 복수노조 허용 문제를 많이 협의했다"고 밝힌 상태였다.

그러나 국제적 압력으로 노동기본권을 선진국 수준으로 바꾸겠다는 약속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삼 정권은 오히려 자본가들이 염원했던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등을 도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도 참여 결정을 내렸지만 노개위 논의는 순탄할 리 없었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해 노동법 개정은 미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12일, 국회 동의를 거쳐 OECD 가입절차를 완료한 직후 김영삼 정권은 마각을 드러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김영삼 대통령은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 새벽 6시,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을 몰래 동원해 날치기로 노동법 개악안을 통과시켜 버린다. 나쁜 짓을 하는 김에 안기부법 개악안까지 날치기에 끼워넣었다.

▲ 1997년 11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제2차 노사개혁방안 보고회의 주재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무터 현승종 노사관계개혁위 위원장, 김 대통령, 고건 총리, 뒤는 이기호 노동부장관. ⓒ연합뉴스

당시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은 민주노조운동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했다. 복수노조 허용은 5년 유예되었고, 제3자 개입은 노사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허용하기로 변형되었다.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제가 도입되었고,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무노동 무임금과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까지 입법에 포함되었다. 국제사회의 압력에 긴장하고 있었던 자본가들은 “만세!”를 불렀다.

바로 그때, 퇴행하는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려 세울 움직임이 시작된다. 탄생한 지 1년 남짓 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오전 8시 총파업 선언이 내려지자마자 14만5000여명이 파업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파업에 참여한 연인원은 100만 명에 달했다. 총파업은 다음해 1월18일까지 연인원 2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긴 했지만 김영삼 정권의 1996년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개위 논의를 통한 노동법 개악 시도는, 정부가 ILO 권고 등을 역으로 활용해 민주노조운동을 탄압하고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노동기준 수준으로 기본권을 높이는 척 하면서, 자본의 요구를 논의 테이블에 함께 올려 뒤집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노동법 재개정과 노사정위원회

1997년 1월까지 총파업이 이어지자 국제사회도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ILO 사무총장 미셸 양센은 1월 9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파업 지도부 연행과 노조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OECD는 새로 가입한 한국에 대한 첫 번째 조치로 노동관계법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국제노동기준 운운했던 김영삼 정권의 명분은 설 땅을 잃었다. 하지만 ILO나 OECD가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명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을 통과시킨 점"을 문제 삼았다. 누차 강조하지만 ILO는 국제 노사정 기구이며, 따라서 노사정 대화와 타협 여부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96~1997년을 규정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압력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총파업이었다.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이후 문민정부는 한보철강 비리, 김현철 사태 등을 겪으며 식물정권으로 전락해간다. 결국 그들은 날치기로 통과시킨 노동법에 대한 재개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을 하야 직전으로까지 몰고 갔던 총파업은 향후 노동법 개정을 여야 협상에 넘김으로써 역사를 다른 길로 인도한다. 김영삼·김대중 세력의 협상 결과는 △정리해고제 시행 2년 유예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 5년 유예였을 뿐이다. 노조의 정치활동이 허용되기는 했으나, 교원노조는 여전히 불허 대상으로 남았다.

▲ 민주노총 산하 노조원들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안기부법, 노동법 무효화' 촉구대회를 갖고, 국회 날치기 통과에 대한 범국민적인 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결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협상의 한 축이었던 김대중 세력은 그해(199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내지만, 대통령 취임도 하기 전에 IMF 구제금융이라는 외환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노사정위원회'였다. 김영삼 정권과의 협상에서 자신들이 주장해 2년간 유예시킨 정리해고제를, 김대중 세력은 당선 직후 즉각 실시하자고 밀어붙였다.

1998년 2월 6일, (대통령 자문기관도 아닌) 당선자 자문기구인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하게 된다. 불행히도 이 합의에는 1년 전에 총파업을 이끌었던 민주노총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불과 며칠 뒤에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 합의는 부정되었고, 합의를 주도한 지도부가 불신임되기는 했지만.

게다가 이 합의에는 정리해고제 즉각 실시와 함께 김영삼 정권조차 밀어붙이지 못했던 근로자파견제 실시도 포함되었다. 파견법이 제정되어 1998년 7월부터 발효되었으며,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한 후과로 파견법까지 도입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비정규직 규모는 정규직을 넘어설 정도로 확산되고 말았다.

ILO와 노사정위원회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ILO나 OECD가 뭔가 역할을 한 게 있을까? 아니다. 이들 기구는 모두 침묵했다. 김영삼 정권이 밀어붙인 노동법 개악과 대동소이한 내용이었지만, 노사정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들의 침묵을 정당화해 주었다. ILO라는 기구는 오직 투쟁을 선택할 때에만 노동계급이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한국의 노사정위원회가 ILO와는 다른 탄생배경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이라는 압력 속에 탄생한 ILO와 달리, 한국의 노사정위원회는 경제위기 비용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노사정위원회 논의가 바로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을 정당화시켜 주었던 2015년 9월의 야합 아니었던가. 노사정위원회의 이러한 본질은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동일했으며, 문재인 정권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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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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