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판 적폐 청산 시도는 왜 실패했나?

[유라시아 견문] '스레츠코 호밧' 인터뷰 (上)

1. '오다리기 조르바'

올리버 스톤 감독은 그를 가리켜 '크로아티아의 카리스마 넘치는 철학자'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치 못한 진술이다. 팔색조 매력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출신지가 크로아티아인 것은 맞다. 그런데 태어났을 무렵에는 유고연방이었다. 1983년생이다. 티토가 사망한 지 3년 후였다. 크로아티아는 유고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예 유고를 등진다. 독일, 당시의 서독으로 망명했다. 유년기를 뮌헨에서 보낸다. 흥미로운 점은 유고에서 독립한 1991년에 크로아티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통일된 독일을 떠나서 분열하는 발칸으로 귀환한 셈이다. 통일독일은 유럽통합의 엔진이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고, 서유럽은 동유럽을 통합해갔다. 발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유고의 노동자 관리형 사회주의 모델이 해체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단행되었다. 당시 사회과학에서는 '이행'(transition)이라고 표현했다. 자유주의-자본주의로의 '정상화' 과정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이행학'도 유행했다. 그 '이행'의 과정을 10대와 20대에 걸쳐 목도한 것이다. 그리고 번민하고 회의했다. '역사의 종언'에 이의를 걸기 시작한다. 20대 중반부터 저항과 전복의 선봉장이 되었다. 거리에서, 매체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인다. 독일에서 출간한 저서의 제목도 <'역사의 종언' 이후>(2013)이다. 1917년의 (구)좌파와 1968년의 신좌파와 일선을 긋는 21세기의 개신(改新)좌파가 등장한 것이다. 다뉴브 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새 물결을 일으키는 마중물이다.


다뉴브는 독일 평야에서 흑해까지 흐른다. 그의 활동 반경 또한 크로아티아에 한정되지 않는다. 발칸을 남북으로 누빈다. 유럽을 동서로 횡단한다. 바다 건너 아메리카까지 넘나든다. 코스모폴리탄이다. 유랑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발칸의 최남단에 자리한 나라가 그리스이다. 조르바는 희랍인이자 발칸인이었다. 세계주의 감수성이 물씬한 자유인이다. 그 책에서 인용하는 스콜라 철학자의 문장이 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낯설게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참 근사한 말이라고 여겼다. 한철 미니홈피의 문구로 삼아 허세를 부렸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시간-공간-인간이 튼튼하게 결합하여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재고향화를 지향한다. 이 문구가 새삼 떠오른 것은 이 친구가 사는 꼴이 딱 그러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고향처럼 주유한다. 동에 번쩍, 서에 반짝, 유목민이다.


만나기 전부터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가디언과 알자지라 등에 실리는 칼럼부터 단행본 서적까지 두루 읽어왔다. 처음에는 이메일로 필담을 주고받았고, 내가 베오그라드에 정착하면서는 텔레그램으로 문자도 즐겼다. 온라인 문답으로만 연재를 구성해도 충분할 만큼 텍스트는 쌓였다. 녹취를 푸는 수고를 덜어도 되고, 녹음을 풀면서 발음도 엉성하고 문법도 엉망인 나의 외국어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기특한 녀석이다. 철학자라는데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쪽이 아니다. 분주하게 행사를 만들고 새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팔방으로 날아다닌다. 그를 통하여 슬라보예 지젝과 노암 촘스키와 올리버 스톤과 줄리안 어산지와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대가들 앞에서도 쫄지 않는다. 호연지기가 차고 넘친다. 계급장 떼고 논쟁한다. 자기 검열 없이 소신껏 주장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사회자였고, 발칸 축제의 연출가였으며, 범유럽 차원의 대안적 정당을 표방하는 정치운동의 청년 기수이기도 하다. 기획력이 탁월하다. 네트워킹의 허브이다. 촉매자이자 코디네이터이다. 피처링에 뛰어나고 콜라주도 발군이다. 육성을 듣고 싶었다. 몸짓을 보고 싶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것은 두 번이다. 처음은 자그레브였고, 다음은 아테네였다. 두 번 모두 오밤중이었다. 장소는 클럽이었다. 밤 문화를 사랑하는 클러버이기도 했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 기운이 팔팔한 모양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10시면 침대에 등을 붙이는 바른생활만 하다가 발칸을 떠났을 것이다. 나이트 라이트를 즐기지 않는다. 시끄러운 음악은 질색이고, 새벽의 고요함을 편애한다. 노래방, 비디오방부터 클럽까지 밀폐된 공간도 싫어한다. 확 트인, 뻥 뚫린 곳을 사랑한다. 그런데 두 번 모두 밤 10시에 클럽으로 호출하는 것이다. 티토 시대의 밤 문화를 보여주겠다는 꼬득임이 없었다면 망설였을 것이다. 과연 스타일도 근사하다. 세련되었다. 미끈하고 새끈하다. 훤칠한 키에 팔다리도 쭉쭉 뻗었다. 자연스럽게 기른 턱수염에 헐렁한 티셔츠를 걸치고 회색 스키니진 위에는 빈티지 워커를 신었다. 다리를 꼬면 살짝 드러나는 체크무늬 빨간 양말도 범상치 않다. 재킷은 팔꿈치 언저리까지 걷어 올린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딱 어울리는 옷맵시다. 스타일리스트, 패셔니스타다. 눈빛도 그윽하여 언뜻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를 연상시켰다. 조르바와 오다기리, 나는 그를 '오다기리 조르바'라고 부른다. 발칸 출신으로 지젝 이후 가장 잘 나가는 좌파 지식인, 스레츠코 호밧(Srećko Horvat)이다.

▲ 스레츠코 호밧. ⓒ스레츠코 호밧

2. 전복

이병한 : 2008년부터 시작해 볼까요? 자그레브에서 '전복하라!(Subversive Festival)'를 기획합니다. 신국제주의, 신세계주의를 표방하는 축제이죠. 발칸에서 사회주의가 퇴락한 이후, 다시 말해 유고가 해체된 이후 진보 정치의 귀환을 알리는 행사였습니다. 돌아보면 시점이 절묘합니다. 마침 뉴욕발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난 해였습니다.

스레츠코 : 애초의 취지는 68혁명 40주년을 기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월에 개최한 것이고요. 처음에는 영화제로만 구상했어요. 고다르를 비롯해 누벨바그 회고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념강연을 부탁하기 위해 지젝, 라클라우, 상탈 무페 등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판이 커지게 되었죠. 영화 이외 다른 분야의 비중이 점점 커지게 되면서 2011년부터는 영화제라는 꼬리표를 떼어냈습니다.

이병한 : 그동안 참가자 면면이 실로 화려합니다. 데이비드 하비, 지그문트 바우만, 사스키아 사센, 타리크 알리가 초빙되었습니다. 올리버 스톤과 알렉시스 치프라스, 알레이다 게바라(체 게바라의 딸)까지 참여했고요. 그리스 재정부 장관이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과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도 함께 했죠. 굉장한 기획력과 섭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2008년 겨우 25살이었잖아요? 어떻게 이런 거물들을 한자리에 모을 생각을 했는지 신통하더군요.

스레츠코 : 객기 아닐까요? 치기? 일단 질러보자. 남는 게 시간이었어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이메일을 보냈죠. 수신했는지 살펴보고, 확인했는데도 답장이 없으면 다시 보내고, 또 다시 보내고. 그게 전부입니다. 방구석에서 노트북 하나 들고 계속 메일을 돌렸어요. 아무래도 "1968"을 환기시킨 게 주효했지 싶어요. 대부분 68세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니까요. 본인들의 뜨거웠던 청춘에 대한 회감과 68 이후 유럽과 미국의 현재에 대한 비감(悲感)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같습니다.

이병한 : 2008년 축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연례행사로 정착을 하게 됩니다. 발칸의 5월을 대표하는 문화이벤트가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축제를 성공시킴으로써 '스레츠코'라는 신예가 혜성처럼 등장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급이 달라졌다고 할까?

스레츠코 : 시운이 좋았습니다.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면서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비판적 환기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2009년은 또 중화인민공화국 60주년이 되던 해더군요. 그래서 중국혁명을 테마로 삼았죠. 2010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20세기의 사회주의를 주제로 했고요. 1960~70년대 유고 및 동유럽, 중국과 제3세계 영화들을 다시 보는 회고전도 크게 인기를 모았습니다. 크로아티아는 분리 독립 이후 유고 지우기에 급급했죠. 이 축제를 기폭제로 유고 추억하기가 유행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0년부터 자그레브 클럽에서도 유고시절 음악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어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원조입니다. 2011년에는 '아랍의 봄'을 주제로, 2012년에는 '유럽의 미래'를 주제로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이병한 : 학생운동도 활발해졌죠? 이 클럽이 학생 운동가들의 메카라고도 하고.

스레츠코 : 2009년입니다. 대학의 기업화, 학문의 상업화, 고등교육의 시장화에 맞서 학생들의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그레브 대학 철학과는 한 달이 넘도록 학생들이 학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죠. 가을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다시 2주가 넘도록 점령했고요. 그러자 크로아티아 전국 대학 20여 곳에서 동시에 점거 운동에 돌입합니다. 학생이 대학 운영의 주체가 되는 실험이 시작된 것이죠. 여기에 고무되어서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에서도 대학 점거 운동이 일어났어요. 범발칸적 사회운동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대학 당국에 대한 저항에서 국가 정책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심화되었지요. 저도 동참했었습니다.

이병한 : 참여만 한 게 아니지 않나요? 주모자셨던데?

스레츠코 : 점거 운동은 후발주자였고요. 제가 주도했던 것은 평의회(Plenem)을 연 것입니다. 거의 매일 열었죠. Plenem 또한 유고 시대의 용어에요. 사업장 단위마다, 주거지 단위마다 토론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당이 명령하면 국민들은 지시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과 기층 사이의 상시적인 협의체가 가동되었죠. 이 유고의 실험을 되살려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평의회는 단지 학생회의만이 아니었어요. 각 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 시민들도 참여시켰죠. 고등교육기관과 주민자치를 결합시키고 싶었습니다. 저녁마다 자그레브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1000명 가까이 참석하며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대학의 미래, 도시의 미래, 국가의 미래를 논의하는 광장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병한 : 학생들이 민중을 의식화시키는 20세기형 '노학연대'가 아니라, 학생들과 주민들이 협력하는 일종의 '시민의회'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대의제 민주주의, 정당정치 이후의 '새 정치'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한국서도 작년 겨울부터 촛불혁명이 타오르면서 잠시 시민의회 담론이 솟았다가 금방 사그라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지점이에요. 시민의회를 만들어 개헌을 논의하는 숙의 민주주의 실험이 제도화되었으면 참 흥미로웠을 텐데, 결국 정권교체만으로 마감되고 말았죠. 그 어마어마했던 사회적 동력이 아무런 제도적 결실 없이 낙착되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구세력은 척결했으나 구체제는 여전한 찜찜함이 남아요.


각별한 것은 크로아티아에서의 실험이 발칸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죠. 발칸에서 아메리카로 수출됩니다. 그게 바로 2011년 점령하라!(Occupy) 운동이죠. 전복에서 점령으로, 99% 운동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뉴욕의 주코티 공원에서 펼쳐졌던 총회(General Assembly)의 원조가 자그레브의 평의회였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주동자셨고요. 자그레브 대학을 점거했던 '듣보잡' 학생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러 대서양을 건넌 것입니다. 발칸의 청년 지식인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죠. 동부에서 맹활약하고 계셨을 때, 저는 서부에 있었어요. L.A.에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 본부를 점거하는 시위에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스레츠코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습니다. 이 사람 '물건이다'고 느낀 것은 본인이 주도했던 월가점령운동을 일방으로 낭만화하지 않는 점이었어요. 도리어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이렇게 어린 친구인지 몰랐습니다만.

스레츠코 : 규모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그레브에서는 직접 민주주의가 제법 그럴듯하게 작동했어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죠. 그런데 주코티 공원에서 제가 경험한 것은 직접 민주의 강점이 직접 민주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이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주제의 토론회들이 매일 같이 열렸죠. 저도 사회자로 발표자로 토론자로 참가한 모임이 여럿입니다. 그런데 의미 없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무수한 토론회들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만인이 만사를 토론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회합이 없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경제문제를 토론할 만큼 실력을 갖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법률에 관해 토의할 만큼 공부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요. 중구난방과 횡성수설이 오고가다가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허무하게 끝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점령 이후의 출로도 만들어내지 못했죠. 뉴욕 시민들의 짜증은 점점 치솟고 있었고, 뉴욕시 경찰들의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져 오는데도 평등한 참여라는 대원칙을 고수하며 공회전만 하다가 지리멸렬하게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병한 : 월가 운동을 전폭 지지했던 스피박과 완전히 의견이 갈라진 지점이었죠? 스피박은 대가 중의 대가로 대접받는 분인데, 한 마디도 밀리지 않고 대꾸하더군요. 그 패기에 반했습니다.

스레츠코 : 스피박은 총회 고유의 수평성을 고수하고 그 성격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보스턴에 계시다가 가끔 구경하러 오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외부자라서 당사자의 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에도 굉장히 비판적이셨죠. 월가 운동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반면에 경제학자 리차드 울프(Richard Wolff)는 정반대로 주장했어요. 현실 정치에 진입하지 않으면 월가 운동은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저는 울프 쪽 의견에 기울어졌습니다. 미국의 법률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월가 개혁이 될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스피박은 오합지졸의 날 현실을 거듭 외면했어요. 결국 월가 운동은 2012년 미국 대선 국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오바마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비판적 지지를 할 것이냐? 지지한다면 어떤 조건을 내세울 것인가? 아니면 아예 새로운 대안 정당을 건설할 것이냐? 제대로 논의도 못하고 내부 분열로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단숨에 타올랐던 열기만큼이나 순식간에 꺼져버렸죠. 허무하더군요.

▲ 스레츠코 호밧. ⓒ스레츠코 호밧

이병한 : 월가 점령 운동은 일종의 미국판 적폐 청산 시도였던 것 같아요. 1945년 이후의 미국. 그리고 그 미국이 만든 세계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실질적인 제도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채 대선 국면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저도 미국에서 2012년 대선을 지켜보았는데, 과연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인지 민주주의의 무덤인지 헷갈리더군요. 2011년의 그 엄청난 열기가 2012년 대선에 들어가면서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오로지 기득권 양당의 경선과 본선을 향한 경마장식 중계보도만 나오죠. 그리고 경선과 본선 모두 저는 '쇼'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스포츠경기 보듯, 예능 토크쇼 보듯 대선 토론회를 시청합니다. 결국 카메라 앞에서의 연출에 더 빼어난 오바마의 '극장 정치'가 재가동되었고요. 그 반동으로 4년 후에는 트럼프라는 더 뛰어난 연극적 인물이 백악관에 입성하죠. 일찍이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우려했던 정치문화의 수준 저하를 확인한 셈입니다. 월가 점령운동 실패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서는 훨씬 더 현실정치에 가깝게 다가간 것 같던데요?

스레츠코 : 수평성과 수직성의 결합을 궁리했습니다. 평의회와 총회와는 별개의 실무 그룹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문가들로 구성된 모임이죠. 그들이 먼저 문제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걸러진 안을 가지고 전체회의에서 토론에 붙입니다. 이는 전문가 독재와는 별개의 기제입니다. 저마다 전문 분야가 다르니까요. 사안에 따라 전문가 모임의 구성원이 달라지기 때문에 위계적이지도 않죠. 입체적인 평등이며, 유기적인 조직이고, 유연하게 운영합니다.

이병한 : 실제로 적용해본 사례가 있습니까?

스레츠코 : 2013년부터 '전복하라!'에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그리스의 대안 정당인 시리자를 초청했고 지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죠. 시리자를 그리스의 집권당으로 만들고 유럽을 변혁시켜가는 실험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축제의 테마 또한 '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로 뽑았고요. 유럽 전체가 이미 금융위기의 직격탄으로 붕괴되고 있던 시점이었어요. 대안적 민주주의를 숙고하는 장으로 삼으려고 했죠.

이병한 : 성공하지 못한 것 같던데요?

스레츠코 :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어요. 문화축제의 본래 모습을 고수하자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특히 특정 정당과 당수를 섭외한 것에 반발이 매우 컸어요. 결국 제가 떠나야 했습니다. 2013년을 끝으로 기획과 연출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이병한 : 그래도 족적은 남기고 떠나셨더군요. 영화제에 경쟁부문을 도입했습니다. 이름도 재밌던데요. "Wild Dreamer"상? 첫 수상자가 올리버 스톤이었습니다.

스레츠코 : 수상작은 10시간짜리 대작 였습니다. 월가점령운동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해요. 그러나 올리버 스톤의 평생의 노력에 헌정하는 공로상에 더 가까웠죠.

이병한 : 그 후 올리버 스톤은 연달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노든>에 이어 <푸틴>까지 작업했죠. 요즘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 러시아의 개입 탓인 마냥 몰아가는 보도가 홍수를 이루는데요. 두 작품을 보고나면 누가 정보를 조작하고 여론을 호도하며 타국의 선거에 개입해왔는지 ‘대안적 진실’에 근접할 수 있죠. 본인과도 관련이 있습니까?

스레츠코 : 제가 다큐 작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요. 하지만 의견 교환은 수시로 하죠. 섭외를 도와준 경우도 있고요.

이병한 : '전복!'에서 떠나면서 TV 교양 프로그램을 맡기로 했었죠?

스레츠코 : 범발칸주의를 표방하는 방송이었습니다. 이 역시 '전복!'의 한 섹션으로 2012년에 도입한 '발칸 포럼'을 호의적으로 지켜본 방송 관계자의 제안에서 출발했어요. 발칸의 구사회주의 10개국,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그리고 헝가리까지. 1989년 이후 이들 국가들이 개별적으로 경험했던 ‘이행’을 총체적으로 회고하고 성찰하며 미래를 개척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여기에 그리스의 시리자까지 참여시켰던 거라서, 한때 티토가 꿈꾸었던 '발칸연방'(Balkan Federation)의 전원이 자그레브에 집결한 셈이었어요. 이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는지 기획 당시에는 저에게 사회자 자격과 섭외 권한까지 부여한다고 했죠. 그런데 결국 프로그램 자체가 불발되고 말았어요. 범발칸주의가 신유고주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크로아티아에서 '유고'는 공산주의 부활로 연상되기도 하니까요. 반공 정서를 자극한 것입니다. 정부의 입김이 미쳤다고 생각해요. 당시 크로아티아 정부는 EU 가입에 전력투구했으니까요. EU 진입(2013년 7월 1일)을 목전에 둔 마당에 유고를 환기시키는 TV 프로그램의 등장이 탐탁지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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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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