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려고 독립했나…'세계화의 덫'에 걸린 코소보"

[유라시아 견문] 코소보 : 신생과 환생

1. 험로

가는 길이 험했다. 이르지 못할 뻔했다. 단숨에 국경을 넘지 못했다. 아니 '국경'이라는 합의조차 없었다. 코소보는 2008년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르비아 공화국 내 자치주라고 주장한다. 국제적으로도 편이 갈린다. 110여 개 국가는 코소보 공화국을 승인했다. 90여 개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베오그라드에서 프리스티나로 가려던 나의 여정에도 차질이 생겼다. 세르비아를 나갈 수는 있으나, 코소보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베오그라드를 진지로 삼은 지 50여 일이 흐른 뒤였다. 그곳에서 뭐하느냐는 날선 질문이 날아온다. 코소보는 왜 오려는 것이냐고 따지듯 추궁한다. 퉁명스런 말투부터 불길하던 차, 입국 불가 판정을 내린다. 황망했다. 유럽의 도시와 도시 가운데 이동하기 가장 불편한 곳이었다. 불편함을 넘어 불안감도 일었다. 버스 창가 너머로 내전의 상처가 여전하다. 곳곳에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폐허를 이룬다. 무릅쓰고 장장 7시간을 달려온 곳이다. 다시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돌아갈 생각에 까마득해졌다.


궁하면 통한다. 궁리하면 터득한다. 현지 사부로 모시는 베오그라드대학 역사학과 교수에게 급히 사정을 전했다. 아직도 발칸서는 유고망(Yugo-network)이 작동한다. 특히 유고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는 발칸 각지의 지식인들이 집결하는 곳이었다. 제각기 독립국가로 분화하면서 직장도 나라별로 갈라졌다. 하더라도 기왕의 친구들까지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더욱 애틋하고 각별한 우정이 흐른다. 발칸의 주요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그 인연의 덕을 톡톡히 입었다. 이번에도 현명한 조언을 주신다. 마케도니아로 우회해 보란다. 세르비아 국경에서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로, 스코페에서 북부의 국경도시로. 그곳에서 다시 코소보로. 국제버스와 국내버스를 연달아 갈아탔다. 과연 통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길은 이어졌다. 마케도니아에서 코소보로 진입하는 데는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북이냐 남이냐만 확인했다. 유고는 북조선과 돈독했다. 티토 박물관에는 김일성과 찍은 사진도 있다. 유고에서 가장 늦게 벗어난 코소보가 북조선을 달가워 할리 없을듯하다. 다행히 나는 남한 출신이다. 한국은 코소보 독립을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의 동맹국들부터 코소보를 인정했다고 한다. '굿 코리아!'라고 환대한다. 마침내 입국 도장이 찍혔다. 베오그라드에서 프리스티나까지 직선거리로는 250km이건만, 나흘이 걸렸다.

▲ 유고 시절 세워진 형제애와 통합 기념비(프리스티나). ⓒ이병한


에둘러서라도 기어코 코소보에 닿고 싶었던 것은 책 한 권이 결정적이다. 페터 한트케의 <공습 하의 유고슬라비아>를 탐독했다. 독일(어) 현대문학사에서, 유럽 문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빔 벤더스가 연출하여 칸에서 감독상까지 받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도 꽤 되고 <관객모독>이라는 연극도 유명하다. 그런데 작품과는 별개로 세기말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NATO의 유고 공습에 반대하는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반대만 한 것이 아니다. 독일과 유럽과 미국의 위선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유고는 유럽을 나치에서 구해내고, 소련에서 지켜낸 나라이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인류의 존엄을 지켜낸 나라이다. 그 유고를 산산이 박살내는데 서방이 앞장서고 있다고 성토했다. 주류 언론들의 선전선동에도 가열 찬 비판을 가했다. 밀로셰비치를 히틀러에 빗대고 '발칸의 도살자'라고 낙인찍는 이들은 펜을 분지르고 입을 다물라고 험한 말을 내뱉었다. 1999년 유고 붕괴에 일조하거나 방조했던 자들이, 2003년 이라크 전쟁에는 반대한다며 반전평화운동에 나서는 모순과 도착에도 힐난을 가했다. 밀로셰비치는 엄연히 세르비아 대선을 통해 선출된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지도자였다. 그런데도 독재자 사담 후세인만큼의 동정도 얻지 못했다. 일방적인 모함이었다. 한 놈만 팬 것이다. 한 사람을 악마로 만듦으로써 '일국에 대한 만국의 전쟁'을 허용하고 말았다고 했다.


한트케는 헤이그에서 열린 전범재판에 참석하여 밀로셰비치의 법정 진술을 방청했을 뿐 아니라, 재판 도중 그가 사망하자 장례식에서 헌사까지 했다. '모든 피고인은 아름답다.' 했던 카프카를 인용하며 당대의 부조리를 까발렸다. 본디 정치적인 발언이 잦은 작가가 아니었다. 너도나도 혁명을 부르짖었던 68년에는 침묵을 고수하며 작품에 전념했다. 모두가 외면하거나 곡해하는 1998년에는 홀로 분투하며 목청을 높인 것이다. 탓에 본인 또한 험한 꼴을 면치 못한다. '세르비아의 대리인', '살인마의 주구'라는 딱지가 붙었다. 영국의 <가디언>과 독일의 <슈피겔>과 프랑스의 <르몽드>가 이구동성으로 그를 공격했다. 유고 폭격하듯 한케트를 향해 집중 포화를 쏟아냈다. 친구였던 권터 그라스도 빔 밴더스도 수잔 손택도 등을 들렸다. 그간의 작품에 대한 평가마저 훼손당했다.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는 피히테 상을 반납했다. 유력하게 점쳐지던 노벨문학상 또한 감감무소식이 되었다. 고립무원, 베를린의 천사처럼 고독했다. 그러나 고고하고 꼿꼿했다. 꿋꿋한 자세를 거두지 않았다.


요 몇 년 헤이그 재판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기소되었던 밀로셰비치 측근들이 무혐의 처분을 받고 있다. 그들이 코소보에서 자행된 세르비아인의 알바니아인 학살을 지시했거나 공모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뉴스가 되지 않고 있다. 검색되는 것은 대저 왕년의 '가짜 뉴스'들이다. 1999년의 대서특필에 견주자면, 정정 보도는 한 줌에 그친다. 당시 밀로셰비치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재판은 냉전에서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을 일방적으로 단죄하는 부당한 폭거이다. 나는 발칸의 평화를 제창했을 뿐이다. 유고를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발칸의 평화 책이기 때문이다. 이 법정 전체가 발칸의 비극을 세르비아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는 서방의 날조된 기획물이다. NATO 공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쇼이다."

하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더 중요하다. 주홍글씨가 박힌 메신저의 발언은 수신자에게 가닿지 못했다.


헷갈렸다. 궁금증이 솟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흑백으로 가름하기는 힘들 것이다. 양쪽 공히 100%의 진실이 아니라면 흑과 백의 비율이 관건적이다. 얼마만큼의 농담이라야 회색 진실에 근접할 것인가. 기필코 현장을 밟고 싶었다. '유고 공습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함으로써 탈냉전이 지구 내전(Global Civil War)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유럽 지성의 책임이다.'라고 일갈했던 한트게의 발언 또한 검증해 보고 싶었다. 15년 전, 사람들은 그가 틀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도 옳았고, 지금은 더더욱 옮다.

2. 유고 지우기

예술가의 직관을 뒷받침하는 문헌 자료가 나왔다. 위키리크스를 통해서이다. 유고 공습을 전후로 한 문건들이 대량 공개된 것이다. 1999년 공습이 단행된 것은 3월이다. 78일에 걸쳐 일방적인 폭격이 가해졌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이미 해체된 이후였다. 미국 일극체제가 확립된 직후였다. G2였던 소련은 G8을 구걸하는 러시아로 강등되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옐친 아래 서방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다. NATO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신유고, '제3의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초토화되었다.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화학무기도 대량 투하되었다. 독성 물질이 완전히 제거되는데 10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민족정화'를 중지시키기 위한 '인도적 개입'이라고 했다. 불가피한 선택,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했다.


복선이 있었다. 1월부터 평화 교섭이 진행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이 합의하여 조인만 남겨둔 상태였다. 최종 국면에서 돌발 변수가 일어난다. 미국이 제출한 부속 문서가 세르비아를 혼란에 빠뜨린다. 내용인즉, NATO군이 유고 전역에서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가하라는 것이었다. 군대 주둔과 치외법권도 요구했다. 밀로셰비치는 거부했다. 사실상 유고의 속국화를 의미하는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습이 개시된 것이다. 무차별 폭격으로 세르비아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코소보를 방기한다. 혹은 헌납한다.


NATO군이 무력으로 떼어낸 코소보는 UN이 관할하는 신탁통치에 들어갔다. 2008년까지 코소보는 UN과 EU, NATO가 지배하는 땅이었다. 이 작은 나라를 네 개 권역으로 나누었다. 중앙부에는 영국군이, 북동부에는 프랑스군이, 서남부에는 독일군이, 동부에는 미군이 머물렀다. 티토가 동서 양 진영 모두에 허락하지 않았던 외국군대가 일시에 발칸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로써 유고는 완벽한 해체 단계에 이른다. 유고연방을 구성하던 6개 공화국은 물론 자치주까지 독립국으로 쪼개져나간 것이다. 20세기 100년을 통으로 볼 필요도 있겠다. 발칸의 오스만제국을 해체시키고자 했던 줄기찬 시도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이스탄불과 모스크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발칸 또한 비로소 서방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발칸의 문명화, 서구화, 민주화를 일단락 지은 것이다.


NATO 치하 코소보에서는 또 다른 '민족 정화'가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NATO의 보호 아래 코소보로 복귀한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을 윽박질렀다. 기세가 등등해진 이들에게 용서란 없었다.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복수를 택했다. 당한만큼 되갚아주고, 당한 이상으로 되돌려 주었다. 베오그라드에는 지금도 "1300인회"라고 하는 단체가 있다. 1999년 정전 이후 코소보에서 실종된 세르비아인 가족들이 만든 모임이다. 그만큼 폭행과 납치, 강간과 학살 등으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이 숱하다. 마케도니아에서 코소보로 넘어왔던 국경마을에서도 역 민족차별의 흔적을 목도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인 난민촌이었다. 그들 역시도 알바니아인의 등살에 못 이겨 평생을 살아왔던 코소보를 등졌다고 한다. NATO군 주둔 아래 세르비아인들의 삶은 형무소의 수인 같았다고 한다. 마을의 공공장소를 알바니아인들이 독점한 것이다. 시장을 보러가거나 학교와 직장에 오고가다가 억류당하고 얻어맞기 일쑤였다. 최대한 외출을 삼가면서 집에 갇혀 살아야 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억한 심정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서 국경을 넘은 것이다. 본디 자유롭게 왕래하던 곳이다. 마케도니아도 유고연방의 일부였다. 10년 새 이웃도시가 타국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도 이방인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케도니아어에 능하지 못하여 주변인으로 소수자로 살아간다. 코소보 종전 이후 벌어진 이 역차별의 실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뉴스가 뉴스를 덮는다. 뉴스로 뉴스를 가린다.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발칸은 미디어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온통 뉴욕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보도되지 않는 사실은, 검색되지 않은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TV 화면으로 포착되는 않은 세르비아인의 고통은 더욱 신산스러운 것이었다.


UN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나 코소보가 독립한 것은 2008년 2월 17일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정은 독립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소국이다. 자생력이 극히 미약하다. EU, NATO, 세계은행, IMF, 미국 대사관, 각종 인권단체 들이 전후 복구 사업의 주역들이었다. 미군 부대는 끝내 알 박기에 성공했다. 군사적 종속 아래 정치적 주권 발현은 힘들었다. 경제 구조 또한 취약하기 그지없다. 민간 경제는 기지에 의존한다. 나라 살림은 외국 원조에 의지한다. 설상가상으로 독립 원년에 세계금융위기까지 일어났다. 가뜩이나 발칸에서 가장 가난하던 코소보는 지금까지 타격이 심대하다. 실업률이 40~50%를 오르내린다. 세계화의 덫, 지구화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2008년의 환호와 열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치하는 놈들은 죄다 사기꾼이고 매국노라는 원성이 자자하다. 이 꼴을 보자고 독립했던 것인가, 자괴감이 만연하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를 겹쳐 보아야 한다. 실제로 세르비아의 탄압이 가혹했다. 유고 시절 티토가 허가해주었던 코소보의 자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해 가면서 세르비아의 억압이 드세진 것이다. 소제국의 포용성과 유연성이 사라졌다.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웃나라 알바니아와 결합하는 악몽의 시나리오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바니아인들이 셋 이상 무리지어 걷는 것조차 금지시켰다고 한다. 명백한 인종차별, 발칸의 아파르트헤이트였다.


그리하여 본디 코소보에서 전개된 알바니아인들의 투쟁은 민족 간 평등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유고연방에서 누렸던 합당한 대우를 복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독립을 요구하거나, 알바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오히려 유고다운 유고, 연방다운 연방, 나라다운 나라를 요구했다. 티토가 건설했던 유고를 지속하라는 편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티토야말로 대세르비아주의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티토가 빨치산 투쟁하듯 해방과 평등과 자유와 존엄의 이름으로 세르비아 패권주의에 저항한 것이다. 일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유고만으로도 모자란다고 했다. 이참에 발칸 전체를 연방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티토의 못다 이룬 꿈을 완성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이 코소보 밖에서는 곡해되고 굴절되었다. 이른바 서방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제 입맛대로, 제 눈의 안경으로 가공하고 변형했다. 자유주의 근본주의, 교조적 민주주의, 인권 만능주의의 시각에서 코소보를 접근한 것이다. 그리하여 NATO의 유고 공습마저 승인하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유고다운 유고의 요청에 유고의 해체로 응답한 꼴이다. 악의가 있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선의였을 것이다. 다만 어설픈 얼치기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바람잡이 노릇을 하고 말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은 도둑맞은 해방으로 귀결되었다.

▲ 코소보-알바니아-미국-EU-NATO 깃발. ⓒ이병한


3. "NEW BORN"

먼 길을 에둘러 왔건만, 정작 볼품이 없는 도시였다. 새파란 신도시이다. 볼거리가 드물다. 볼만하다는 곳도 좀체 주변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름다움의 비결은 조화로움에 있건만 생뚱맞은 장소에 휑-하고 들어선 신축 건물들이 많다.

▲ 코소보 국립 도서관. ⓒ이병한

독특한 외관의 국립 도서관에서 구경한 코소보 역사 전시실은 더욱 생경했다. 코소보가 세르비아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싹둑 잘라내었다. 오스만제국의 영광도 대폭 축소하였다. 유고연방 시절은 색깔론으로 덧칠되었다. 엉성하게 세워낸 국사가 앙상하다 못해 초라하다. 발칸이라는 장소성이 거세된 무중력 도시 같았다.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코소보의 제2 도시 프리즈렌에 견주자면 도통 정이 가지 않았다.

▲ 'NEW BORN' 기념비. ⓒ이병한

더욱 뜨악해지고 만 것은 산책길에 마주한 빌 클린턴 동상이다. 옆으로 클린턴 거리도 조성되어 있었다. "NEW BORN"이라고 알파벳으로 들어선 기념비의 뒷면은 코소보를 승인한 100여개 국가의 국기들로 빼곡했다. 근방에는 '호텔 빅토리'도 있었다. 독립 이후 들어선 10년이 채 안 되는 신식 호텔이다. 옥상에다가 자유의 여신상을 세워두었다. 기발하기보다는 기가 막혔다. 베오그라드의 100년 묵은 '호텔 모스크바'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건물이다. 겨우 250km이건만, 전혀 딴 세상이다. 말 그대로 새로이 태어난 신세계이다.

▲ 호텔 빅토리. ⓒ이병한

클린턴은 1999년 당시 유고 공습을 결정한 장본인이다. 코소보에 독립 국가를 하사해주신 주인공이다. 유고에서 격절된, 발칸에서 탈구된 코소보의 신생(new born)을 허여한 조물주이다. 그래서 무슬림이 9할을 넘는 나라인데도 유독 미국과 EU와 돈독한 예외적인 국가를 주조해내었다. 냉전기의 적폐인 NATO를 청산하기는커녕 동방확대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냉전적 세계관을 더욱 팽창시킨 원조이기도 하다.

▲ 빌 클린턴 동상. ⓒ이병한

그가 발칸에서 발판을 닦음으로써 후임자 부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발칸에서 클린턴과 합작했던 토니 블레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도 부시와 협조했다.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는 훗날 국무장관이 되어 시리아와 리비아까지 폭격했다. 밀로셰비치의 황천길을 사담 후세인과 카다피가 따라갔던 것이다. 발칸의 최남단 코소보의 위치가 절묘하다. 북아프리카로, 중동으로, 중앙아시아로 NATO군이 출항하는 전초기지 역할에 최적이다. 하여 냉전은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후기 냉전으로 이행했던 것이다. 유고연방을 지우고, 소비에트연방을 지우면서 자유주의-자본주의로 지구를 석권하는 냉전적 세계관을 지속했던 것이다.

▲ 빌 클린턴 거리. ⓒ이병한


그러나 코소보 또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고뇌한다. 코소보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거개가 실은 1999년 이후 '인도주의적 개입'의 산물이다. 20008년 독립 이래, 민주화 이후 코소보 사회는 질적으로 더 나빠졌다. 외삽된 민주주의가 내발적 민주화를 꺽어버렸다. 발칸의 발칙한 지성 슬라보에 지젝의 발랄한 수사를 흉내 내어 말하자면 '디카페인 독립 선언'이었던 셈이다.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허울뿐인 독립이었다. 자생력이 전혀 없는 속국을 심어두어 요긴하게 활용하는 꼴이다. 하여 여야 간 정권이 교체된 들 '차이 없는 반복'을 변주할 뿐, 권력은 시민들에게 있지 않다. 워싱턴과 브뤼셀에서 코소보의 운명을 원격 조정한다.


'유고 공습'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애초 질문에 답이 담겨 있었다. 세르비아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밀로셰비치는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목적은 '유고'에 있었다. 서구식 자본주의도 아니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실험을 추진했던 유고를 지워버리려고 했다. 서구에도 동구에도 기울지 않는 비동맹노선을 추구했던 유고의 유산을 묻어버리려고 했다. '다른 근대화'의 맹아를 뽑아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다른 백년'의 불씨를 밟아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한케트가 읊조리던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옛 유고를 사랑한다.'고 했다. 다문명세계 발칸에 어울리는 정치적 형식으로 근대화를 도모했던 유고와 작별하지 않은 것이다.


2017년. 그 꺼진 불이 되살아나고 있다. 죽은 불씨를 되살려내고 있다. 탈유고화 30년, 1989년 체제의 험로를 거슬러 재유고화의 바람이 분다. 신생을 대체하는 재생과 환생(還生)의 물결이 도저하다. 각별한 것은 티토가 사망한 이후 1980년대에 태어난 팔팔한 신세대들이 주역이라는 점이다. 그 중 한 명을 만났다. 지난 3년 주로 대가들을 찾아 다녔다. 나보다 어린 지식인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미 발칸에서, 유럽에서 셀럽으로 통하는 친구이다. '유고의 샛별', 신성(Re-Born)이다. 두 달여, 발칸에서 가장 뇌가 섹시한 남자와 나누었던 온/오프라인 대화를 소개한다.

▲ 프리즈렌 풍경. 세르비아 제국의 수도이자 오스만제국기 코소보의 문화 중심지였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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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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