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따라 바뀌는 상생 상극 작용
동아시아 전통 의학을 대표하는 의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를 일컬어 '의학사경'이라고 부릅니다. <내경>, <난경>, <상한>, <신농본초>가 그것입니다. 이중 <난경>이라는 저작에는 사계절과 건강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을 사계절과 몸의 부조화로 인해 몸에 무언가 굳어져 쌓아지는 다섯 가지가 생긴다는 뜻으로 '오적(五積)'이라 부릅니다.
<난경>에서 설명하는 '오적'에 대한 이론을 단순화해보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봄에는 화, 즉 스트레스를 조심해서 심기(心氣)를 상해서는 안 되고 여름에는 섭생(攝生)에 주의해서 비위가 나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환절기인 장하(長夏)에는 상한(傷寒), 즉 감기 같은 것을 조심해 폐가 나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가을에는 잠을 잘 자서 신장이 나빠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겨울에는 과로를 피해서 간 기운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난경>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리 몸에 있는 간, 심, 비, 폐, 신이라는 다섯 가지 내장(內贓), 즉 오장(五臟)의 관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 전통 의학에서는 우리 몸속에 있는 오장들이 서로 한편으로는 도움을 주고 한편으로는 서로를 견제하는데, 이를 상생(相生) 상극(相剋)이라 부릅니다. 이 생극(生剋)의 이론은 오행을 몸에 적용한 것인데, 이중 서로를 견제하는 상극관계에서는 간은 비장을, 심장을 폐를, 비장은 신장을, 폐는 간을, 신장은 심장을 극합니다.
그런데 <난경> '오적' 이론에 따르면 이런 상극 작용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작용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이 부여하는 조건으로 인해 다른 장(贓)들에 비해서 우월한 위치에서는 특정 장(贓)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봄에는 간, 여름에는 심장, 환절기인 장하에는 비장, 가을에는 폐, 겨울에는 신장이 계절의 도움으로 다른 장부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계절의 도움으로 우월한 지위에 서게 되는 특정 장(贓)에게는 상극 작용이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오적' 이론에 따르면, 봄에는 폐가 간을 극할 수 없고 여름에는 신장이 심장을 극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장하에는 간이 비장을 극할 수 없고 가을에는 심장이 폐를 극할 수 없으며 겨울에는 비장이 신장을 극할 수가 없습니다.
여름에 가장 조심해야할 비위 손상
이런 이론에 입각해서 여름을 살펴보면, 여름은 오행으로 화(火)로 분류되는 심장이 계절의 왕이 되는 계절입니다. 여름에 심장은 계절의 왕이 됩니다. 그래서 여름에 왕이 된 심장은 원래 심장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관계에 있는 신장의 상극 작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심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장의 견제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여름에 차가운 음식을 많이 먹어 비위가 손상되면 신장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계절을 고려하지 않고 보면 신장은 비장으로부터는 극(剋)을 당하고 심장에게는 극을 하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극이라는 작용은 한편으로는 견제의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부린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도록 강제한다는 의미를 극이라는 작용은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 관계에 놓인 장들 간에는 자신이 어려워지면 자신이 극할 수 있는 장을 통해서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전가하는 속성이 생깁니다.
여름에 차가운 음식으로 인해 비위가 손상되면, 비위는 자신에게 생긴 어려움을 신장에게 전가합니다. 그런데 신장은 여름이라는 계절적 특성으로 인해 비장으로부터 전가된 어려움을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심장에게 보낼 수가 없게 됩니다. 이유는 심장이 계절의 왕이라서 여름에는 신장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에 비위가 손상되면 비위에서 발생한 사기가 신장에 집중됩니다. 사기가 신장에 집중되면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쳐지고 기가 위로 치솟아 몸이 불안정해지는 역기(逆氣)가 생깁니다. <난경>에서는 이를 신적(腎積)이라 부릅니다. 이 신적은 상당한 기간 동안 쌓아진 뒤에 나타나기 때문에 잘 낮지 않는 고질(痼疾)이 됩니다. 그래서 <난경>에 따르면 여름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비위 손상입니다.
여름철 건강법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탕을 선호해왔습니다. 지금은 삼계탕과 보신탕이 주류를 이루지만, 기름지고 큰 생선인 민어탕이나 황기를 같이 넣고 끊인 소등뼈탕 등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름 음식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재료들이 들어가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모두 오랜 시간 재료를 가마솥에 넣고 고아낸 뜨거운 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여름철에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않고 뜨거운 음식을 먹었던 이유는 비위 손상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많이 먹는 냉면 같은 것은 사실 기생들이 술을 먹은 이후 늦은 저녁에 먹었던 음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냉면을 기생들이 주로 늦은 저녁에 먹었던 이유는 술과 접대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잠을 청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어쩔 수 없이 술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이 만든 나름의 궁여지책이 지금 우리들의 여름 음식을 대표하고 있는 냉면이었습니다. 평양, 함흥, 진주 등 냉면이 유명한 곳 모두가 조선조에 큰 관청이 있고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기생 문화가 번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냉면은 차가운 성질을 이용해서 급성열을 끄는 해열제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해열제들에는 반드시 하나의 금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장복을 금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해열제들은 모두 단기적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이유는 장복하면 차가운 성질로 인해 비위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비위가 손상되면 우리 몸에서는 아주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 몸에서 기운이 오르고 내리는 승강(乘降)의 순환 구조가 손상된다는 점입니다.
승강의 순환 구조가 손상되면 소화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두통, 어깨 결림, 이명, 시력 저하, 치아 손상 등 수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전통 의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비위를 건강하게 해서 승강의 순환 구조가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전통 의학에서 발생한 논쟁이 나이로부터 등장하는 처방의 8할 이상이 비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수승화강의 조화를 돕는 탕국
우리 선조들이 선호했던 탕은 비위를 따뜻하게 보양해서 비위가 가진 승강 조절 능력을 키우는데 방점을 두는 방식입니다. 기운이 올라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인삼이나 황기 같은 것이고 기운이 고루 퍼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옻 같은 것입니다. 이런 약재들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비장의 기운을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약재들을 탕이라는 방식으로 양가가 풍부한 식재료들과 뜨겁게 중탕시켜 먹는 것은 위장을 고려한 조치입니다. 올라가서 퍼진 기운은 하강해야 하는데, 하강하지 못하면 이것이 번열(煩熱)로 바뀌어서 우리 몸에 해를 주게 됩니다. 비장의 기능과 위장의 기능을 동시에 고려하지 못하면 승과 강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없게 됩니다. 승강이 조화롭지 못하면 몸을 위해서 가미한 값비싼 약재들이 오히려 몸에 해를 입히는 번열이 될 수 있습니다. 탕은 이런 것을 고려해서 만들어낸 오래된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위를 중시하고 승강을 생각하는 지혜에서 나온 것이 지금은 우리들이 여름철에 복날 이벤트로 먹고 있는 여러 가지 탕들입니다. 반대로 거의 매일 입에 달고 살고 있는 여러 가지 차가운 음식들은 강요된 삶을 버티기 위한 궁여지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이 승강을 고려한 오래된 지혜를 누르고 대세가 되어 버린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런 시류는 고쳐나가야 할 일입니다. 올여름 주변 분들에게 여건이 되시면 자주 제대로 만든 뜨거운 탕국 한 그릇 대접하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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