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일부 환경단체의 프로퍼갠더 수준에 머물던 탈핵이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글깨나 쓴다는 사람, 말깨나 한다는 사람, 지식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앞 다퉈 신문과 방송에서 왜 탈핵해야 하는지, 왜 탈핵해서는 안 되는지를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먹이며 부르대고 있다.
이 주제에 잘 모르는 사람은 탈핵주의자 말을 들으면 그것이 맞는 것 같고 찬핵주의자 말을 들으면 이번에는 그것도 맞는 것 같아 머리가 혼란스럽다. 언론도, 학계도, 정치권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탈핵 논란 한복판에 뛰어들고 있다.
핵 발전을 포함해 원자력산업과 연구, 핵의학과 같은 의료 이용 등과 관련해 취재하고 글을 써온 지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핵발전소도 영광과 고리 등 몇 군데를 견학하기도 했다. 20여 년 전 한 신문사에서 차장 기자로 재직할 때 과학기술처를 맡아 일선에서 취재보도를 할 때는 쉬쉬하던 핵발전소 사고정지를 특종보도해 회사에서 특종상까지 받은 적도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찬핵과 탈핵의 중간쯤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미국의 드리마일섬과 소련(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는 대규모 핵발전소 재난이 일어났다. 그런 재난을 접하고도 탈핵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지는 못했다. 신재생에너지 전환이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성이 낮아 나에겐 그리 살갑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참사, 한국에서 탈핵 열차를 달리게 만들어
20~30년 전에는 그랬던 나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참사 이후 확 바뀌었다. 독일이 탈핵선언을 한 것도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주변 지인 가운데 찬핵, 그 가운데에도 열혈 찬핵주의자들이 제법 많이 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찬핵주의자들(핵공학 등을 전공한 전문가와 전·현직 핵발전소 근무자, 일부 언론인과 정치인, 핵발전소 지역 일부 주민, 핵발전소 설계와 건설 참여 회사)의 논리는 대한민국에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고 핵에너지는 깨끗하며 전기 생산 단가가 싸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빼놓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 핵발전소 운영 실력은 세계 최고여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대형 사고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는 주장이다. 지진 안전지대라는 사실도 늘 덤으로 얹었다. 물론 이제는 이런 덤이 더는 작동하지 않지만 말이다.
여기에다 교과서와 한전(지금은 한국수력원자력)의 찬핵 일색의 홍보선전도 국민이 핵 발전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만드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특히 고유가 시대와 석유값 파동을 몇 차례 겪으면서 우리 국민 대다수는 탈핵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탈핵을 주장하는 이들은 빨갱이라는 말을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1980년대나 1990년대 시절의 찬핵 논리와 선전은 점점 빛을 바래갔다. 결정적 계기는 역시 2011년 터져 나온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참사였다. 그리고 유럽 선진국들이 발 빠르게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급속도로 높여가는데 성공한 것에 자극받은 바도 크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배출하는 미세먼지와 탄소화합물 등을 핵발전소가 아무리 적게 배출한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그리고 10만년 후의 미래세대에게까지 엄청난 부담과 안전 위험으로 작용하는 사용후 핵연료 폐기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핵 발전은 결코 우리가 한사코 감싸야 할 에너지는 아니다. 최근 이런 사실을 깨달아가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로 그때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고 문재인 정부는 탈핵 공약을 내세워 대한민국 에너지 전환을 외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 여부를 가름할 잣대 가운데 하나로 일자리와 함께 탈핵·에너지전환이 떠오르고 있다.
늘 존재해왔던 반개혁 세력 무너뜨릴 메시지와 논리가 중요
개혁이든, 혁명이든 늘 반개혁, 반혁명 세력이 존재해왔다. 동서고금의 역사, 단군 이래 우리 역사에서도 많이 경험한 일이다. 4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핵 발전이 그동안 우리 사회에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다. 여기에 생을 바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제 그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탈핵 반대 언행을 하는 것은 받아들이자.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렇더라도 찬반은 합리적 논리와 정확한 예측을 바탕으로 펼쳐야 한다. 허황된 논리와 잘못된 통계, 예측 등을 가지고 상대방이나 대중을 공박하거나 겁박하는 것은 온당치도 못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정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찬핵주의자들은 핵 발전이 깨끗하다는 논리보다는 가장 값싼 에너지라는 논리에 기대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왔다. 깨끗하다는 논리보다는 위험할 수 있다는 논리가 대중들에게 훨씬 더 소구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 주로 들먹이는 무기는 전기료 인상이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핵발전소가 모두 사라지면 지금보다 전기료를 3배 이상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이 모인 상아탑, 그 가운데에서도 서울대의 저명 교수가 한 조간신문 고정칼럼에서 편 논지이기도 하다. 종편에 출연한 한 중견 언론인 출신 패널은 여기에다 한술 더 떠 핵발전소를 없애면 핵 발전 관련 기술과 핵발전소 건설 사업을 외국에 수출하기 어려워져 우리 먹거리가 줄어든다며 반대 논리를 폈다.
대중은 잠재적 위험과 전기료 대폭 인상이라는 현실 가운데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할까? 정확한 것은 전 국민을 대표하는 집단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해보거나 다수를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을 해보아야 알 수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추가로 상당한 비용을 지속해서 내야 한다면 탈핵 찬성 대열에 끼지 않거나 적극 반대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찬핵주의자들이 전기료 3배 인상이라는 탈핵 반대 프로퍼갠더 메시지를 만들어 전파·확산하고 있다면 그런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1989년 통합의료보험 개혁에도 기득권 세력 저항 거세 잠시 주춤
탈핵과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과거에도 있었다.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시대를 맞아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의료보험(지금의 국민건강보험) 운영 방식을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지역과 직장마다 서로 다른 수백 개의 의료보험 조합으로 쪼개져 운영하는 당시의 조합방식을 확 뜯어고쳐 하나의 단일보험조직(지금의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만들자는 통합의료보험 주창자들과 조합 방식을 고수하려던 조합 주창자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나뉘어져 공방을 벌였다.
1차 전면전을 치른 뒤 1989년 여소야대 시절 통합의료보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 거셌다. 마침내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 관료들과 의료보험조합장들, 그리고 기성 보수 언론이 주축이 된 조합방식 주창자들은 대중매체에 통합의료보험방식이 되면 의료보험료를 3배 인상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을 대서특필하게 만드는 음모를 꾸몄다.
피보험자, 즉 국민을 겁박하는 이 음모론은 성공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통합의료보험법 거부권을 행사했다. 3배 인상은 근거가 사실상 없는, 요즘의 언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가짜뉴스였다. 통합 방식은 그 많은 조합들의 운영비와 인건비로 들어가는 것을 아낄 수 있어 외려 더 효율적인 것으로 증명됐다. 지금 우리 국민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통합의료보험법은 김영삼 정부 때 다시 입법화돼 오늘날 통합의료보험 시대가 열렸다. 반개혁은 개혁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었어도 결코 소멸하게끔 만들지는 못했다. 정의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통합방식 국민건강보험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의료보장제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탈핵 시대 전기료 대폭 인상은 허황된 메시지임을 알려야
탈핵에 맞선 찬핵주의자들이 공세를 펴는 전기료 대폭 인상이란 허황된 메시지가 잠시 대중의 눈귀를 가려 탈핵의 속도를 잠시 늦출 순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탈핵 열차의 기관실 엔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일을 필두로 한 유럽 선진국이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신재생에너지 관련 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어 머지않아 외려 신재생에너지가 핵에너지보다 값도 싸고 깨끗하며 안전하기까지 한 절대에너지로 군림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전문가들과 예측보고서가 잇달아 나오고 있지 않은가.
탈핵 열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종착역에 도착하기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하지만 그 열차 안에 정의가 넘치는 논리와 멋진 메시지를 담아 노련한 기관사가 잘 몰기만 하면 예정 시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탈핵열차 기차표를 끊어 탑승한 승객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창가를 내다보며 여행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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