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주말농장이 근처에 있다면, 도시 사람에게 농사를 시작하기 손쉬운 곳이다. 농사에 한 지식이 거의 없어도 주변 사람들을 따라 하거나 주말농장에서 파는 씨앗이나 모종을 구입해서 심을 수도 있고 비용을 내면 밭을 갈아주는 경우도 있다. 어린이집과 같은 기관은 평소 관리까지 해주는 도심에서 멀지 않은 농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 또한 가까운 주말농장에서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운이 좋았던 건 시민단체에서 공동 분양을 받아 회원과 주민이 어우러져 함께 텃밭 모임을 하는 곳을 만난 것이다. 친환경으로 여러 해 농사를 경험해 오고 있는 모임이었다. 배추 농사를 지었는데 벌레를 잡아주지 못해 '파리채' 같은 배춧잎이 되었다고도 했다. 공동으로 김장을 하고 일부는 어려운 단체에 기부하기도 한단다. 신입 텃밭 회원에 대한 배려와 응원, 농사와 삶에 대한 마음으로 조언도 얻을 수 있었다. 텃밭 소식을 온라인 카페를 통해 나눌 수 있었고, 봄가을로 열리는 텃밭 파티도 참여할 수 있었다. 농사만이 아니라, 사람과 소통하고 삶을 나누는 텃밭이었다.
도시 텃밭의 다양한 풍경
다양한 쌈 채소를 입안 가득 넣고 우적우적 먹으며 봄여름을 보내고, 가을 배추 농사를 시작할 무렵 주말농장에는 배추 모종 판매 공지와 함께 '배추는 농약을 쳐야 농사가 됩니다. 약 뿌려드립니다. 신청하세요'라고 하는 문구가 텃밭 이곳저곳에 붙어있었다. 밤마다 텃밭 농사 열공을 하며 파워블로거, 인터넷 텃밭 고수들에게 열심히 정보를 얻고 있었고, 이웃 텃밭도 벌레랑 나눠 먹는 분위기라 '약 광고(?)'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쪽 밭은 약 치는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열공 중이던 파워블로거의 '저독성, 겉잎은 나중에 먹을 부분이 아니다' 등의 포스팅을 보고 며칠 안 된 시점에, 어린 배추모종 살펴보러 갔던 날, 딱하고 마주친 것이다. 그 블로거가 언급한 '저독성 분홍색 가루약'을 '스타킹'에 넣어 톡톡 뿌려 주는 다른 텃밭농부를 말이다. "어린 배춧잎 벌레가 다 먹어버리면 하나도 못 커요. 내가 살짝만 뿌려 줄게" 하며, 내 배추밭으로 다가 왔다. 딱 부러지게 거부하지 못하고, 못이기는 척, 조금은 솔깃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10년 가까이 되는 나의 텃밭 농사 역사에 딱 한 번 이렇게 화학농약을 치는 오점을 남기고 만 것이다(아직 아무에게도 말 못한 비밀을 이렇게 털어놓게 될 줄이야).
이로부터 가을 텃밭에서는 종종 약통을 짊어진 주말농장 관리인의 작업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웃 밭의 한 아주머니는 시골에서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배추 농사를 짓는 것 보고 그 다음부턴 배추 안 사먹는다 하시며 열심히 벌레를 잡으시는 모습은 내 마음 한편을 찔리게 했다. 이런 '찔림'을 딛고 텃밭 보급원이 되고 도시농업 전문가가 되어 친환경 방제에 대해 교육한다.
텃밭 보급원으로 교육을 진행하다 보면 여러 경우를 접하게 된다. 한 번은 주말농장 몇 구좌를 분양받은 어린이집을 1년 동안 담당하여 교육을 맡았었다. 원장님도 시골 출신에 버스 기사님들의 농사 경력이 꽤 되어 보였다. 이런 경우 교육은 텃밭 강사가 관리는 원에서 관리하기 마련이다. 아이들도 즐거워하고 수확도 괜찮아서 제법 잘 되는 교육과 관리지만, 가을이 되어서는 그 철학과 실천의 차이를 드러낸다. 아이들에게 오줌으로 거름주기를 약속하고 아이들은 마음의 준비도 되었다. 벌레 잡느라 신이 난 아이들이 텃밭을 누빈다. 벌레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아쉬워한다. 그러나 다음 교육에 가서 수업 준비를 하느라 밭을 보면 하얀 알갱이들이 배추 주변 흙 위에 적잖이 보인다. 아이들이 벌레를 많이 잡았다 하더라도 보여야 할 벌레 먹은 흔적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수업을 마치며 넌지시 확인하니, "친환경도 좋지만 아이들이 크는 것도 보고 수확의 기쁨도 느끼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한다.
그 순간 참 허탈하고 맥이 풀린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 이전에 꼭 지켜줘야 할 것, 수확보다 텃밭에서 아이들이 느끼고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 어른들에게 반드시 주지시키고 교육에 들어간다. 화학농약, 화학비료 안 주고도 이렇게 잘 자란다며 나의 배추 사진을 보여준다. 농부학교에서는 첫 밭 만들기 하는 날, 농주와 함께 나의 배추김치 맛을 보여드리곤 한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실 수 있어요. 믿어보세요' 하는 것이다.
도시 사람이 쉽게 농사를 시작하는 주말농장이 가까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밭 만들기 전 토양소독제를 꼭 넣으라 하고, 과하게 퇴비를 권하고, '화학농약, 화학비료 권하는' 곳이라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주말농장 관리인 입장에선 우리 같은 무리를 곱게 보진 않는다. 퇴비도 만들어 쓴다고 한쪽에 통 갖다 놓고 퇴비 더미 만들고, 씨앗이나 모종은 어쩌다 가끔 살까 말까 하니 몇 년째 눈총을 준다. 그래도 이제는 이 사람들은 권하는 걸 안 쓰고 다르게 농사짓는 일당들로 인식하고 있다. 급기야 주변에서 우리를 두고 뭐라고 하면 내버려 두라고 다르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변을 하기도 한다. 뭐, 우리로 인해 진행되는 어린이집 교육들이 제법 늘어나고 있어서 고객관리 차원일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작은 텃밭에서 얻는 큰 깨달음
도시농업 활동을 하면서 매년 빼놓지 않는 교육은 도시농부학교이다. 3개월간의 생태 농사 이론과 실습 과정에 참여하는 수강생들은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동기로 도시농부학교를 찾아온다. 물론 이전의 삶과 농사 경험 또한 다양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철 농사 동안 이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겠으나, 경작 보고와 수료 소감을 들어보면 적잖은 자신의 변화를 전해주고 있다. 수료 후에도 생태 공동체 농사에 대한 욕구를 이어가고 계속 키워 가는 경우도 많으며, 농사를 이어가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데 있어 생태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생활로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스스로 이야기한다.
머리 허연 어르신이지만 도시에서만 살아와서 한 번도 농사라는 것을 지어 본 적이 없다는 분도 계셨다. 상추 씨앗을 처음 뿌려 보고, 흙을 뚫고 떡잎이 나오고 자라는 것을 넋이 빠지게 바라보시며 신기해하고 감동하신다. 평생을 책상 앞에 앉아 일하다 퇴직하신 분은 생명이라는 게 참 신기하고 오묘하다 시며, 자꾸만 밭으로 이끌리는 자신을 두고 세상을 다시 사는 기분이라고도 고백하셨다. 이전에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는 밭에 차를 가지고 오는 게 마음에 걸려 버스 타고 물어물어 먼 길을 오다가 길을 잃은 분도 계신다. 막 공부를 마치고 사회 참여를 시작한 20대 도시청년 또한 농사를 통한 철학적 가치관을 새롭게 듣게 되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소중한 강의를 듣고 있다고 말한다. 상추 하나 못 키우던 내가 유기농 배추를 키웠다고 딸아이에게 자랑하기도 하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든 강의를 듣고서는, 이듬해에도 같은 과정 전체를 한 번 더 듣는다. 그러고는 약 안 치고 작물을 키울 수 있느냐는 후배 기수들의 물음에 "내가 바로 증인"이라며 뿌듯해한다. 비록 감자밭에 나온 나팔꽃 떡잎 사진을 보내고는 "혹시 이게 감자잎인가요?"라고 묻기도 하지만, 자급하는 삶을 꿈꾸며 개망초, 명아주를 뜯어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도시농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를 도시농부학교에서 매년 확인하고 감동하고 있다.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도시농부학교에서 이 같은 경험을 하는 도시인들이 많을수록 우리 땅과 우리 삶은 힘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텃밭으로 재생하는 생태 공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이어지는 변화가 있으리라 믿으며 '우리동네텃밭'이 자체 농장과 '은평도시농부학교'를 운영하며 도시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벌레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예뻐해 주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퇴비 조금만 넣으라고 돈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물도 주지 않고 키우는 게 좋다며 하늘만 바라보란다. 그 꼬임에 넘어온 도시인 70여 명이 봄 농사를 시작했고,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열심히 씨를 뿌리고 있다. '농사지을 땅! 땅!'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또 다른 땅이 우리를 부른다. 그것도 서울시 안에 있는 땅이다. 토양 소독제 넣으라고 권하는 주말농장으로 5년을 운영하다 2년째 문 닫고 있는 북한산 인근 텃밭 4000평에 대한 제안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온통 설레고 탐나는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의상봉과 원효봉이 품어 주고 웅덩이가 군데군데 살아있어 봄 가뭄에도 물이 고이고 장마철엔 맹꽁이 소리 우렁차게 나는 곳. 도롱뇽 알 낳는 습지로 이어지는 이 아름다운 곳. 사실 이 땅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그냥 두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땅이 사람의 소유가 되고부터는 그러하기가 참 어려운 일이 되었고, 그렇다면 우리가 해보려 마음먹고 80여 명의 도시인을 또 꼬드겼다. 2년간 묵혔던 땅이라 온갖 풀로 덮여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또 꼬여 냈다. 힘닿는 만큼 개간하고 토종 모종을 심기로 하니, 주말 휴일을 마다치 않고 달려와 풀밭을 텃밭으로 만드는 성취감을 맛보고 이름표를 달고 간다. 차가 다닐 길도 막혀있는 맹지라는 갈등 요인을 품은 채 올해 가을까지 일궈보기로 한다. 밭을 일구는 건 도시인 80여 명, 우리는 그 도시인들의 마음을 일구려 한다. 나아가 도시인들이 살고 있는 이 공간이 자연생태와 사람의 생태 텃밭이 공생으로 연결되고 순환하며 지켜지는 그림을 그려 본다. 이 그림이 완성되면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도 조금씩 이 공간을 닮아가리라는 기대를 함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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