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덩어리 '씨앗'이 사라졌다

[함께 사는 길] 20세기는 '종자 소실의 세기'

광합성이야말로 음식을 세상에 가능하게 하는 활동 중 핵심이 되는 활동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광합성이 아니라면,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도, 된장찌개도 먹을 수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광합성은 한 식물 개체가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동안에만 수행하는 활동입니다. 벼, 밀, 옥수수와 같은 풀은 한해살이풀이어서, 1년이 지나면 생명을 다해 광합성도 그치고 맙니다. 올해의 작물 광합성과 다음 해의 작물 광합성을 이어주는 교각. 만일 이것이 없다면, 광합성이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굶주림이라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예요.

그 교각을, 우리는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씨앗이란 어떤 물질이던가요?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씨앗은 응결체, 매듭, 메신저입니다. 즉, 어떤 한 식물 생명체의 유전 정보가 함축된 정보 응결체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자손을 잇는 매듭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속한 식물 종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진화의 메신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어느 낱 식물에게 씨앗은 자신의 전부입니다. 씨앗만을 위해서 살아간다고는 할 수는 없어도, 다른 개체와 경쟁하며, 비바람과 동물들에 시달리며, 시난고난하게 살아왔던 시간의 최종적 결실인 겁니다.

씨앗이야말로 인간의 협력자

흥미롭게도 싯다르타 부처는 이런 식물의 처지를 이해했는지, 음식을 받을 때 씨앗에 민감했다고 합니다. 과일을 먹을 때는 씨가 없거나 제거된 상태에서만 먹으라고 규율로 정해놓았다고 합니다. 배(胚)는 (대다수 동물과 식물인) 다세포 이배체 진핵 생물에게 공통된 것으로, 식물의 경우엔 씨앗 안에 들어 있는 식물원 형태, 동물의 경우엔 자궁이나 알 안에 착상된 동물원 형태입니다. 즉, 이것은 어느 한 생명이 시작될 때, 그 최초 단계의 생명 물질입니다. 식물의 씨앗이란 그러니까 파충류, 조류의 알과 비슷한 것이에요. 생명의 보존을 중시했던 싯다르타는 이 '식물의 알'에 최소한의 해악을 끼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응결체, 매듭, 메신저이자 최종 결실이기에, 식물은 씨앗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고 또 이것을 널리 퍼뜨리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동물이 씹기에 부드럽고 촉촉하며 맛과 향이 달콤하며 영양분이 풍부한 물질을 씨앗 외곽에 만들어서 동물을 유혹하고, 이들로 하여금 먼 곳에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게 하는 유인책을 수립했죠. 우리가 '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 물질입니다.

모든 것을 응결했기에, 영양이 고도로 집적된 '영양 덩어리'가 바로 씨앗입니다. 인류가 쌀, 밀, 콩, 팥, 수수, 기장, 조, 깨, 옥수수 따위의 각종 씨앗을 우선적으로 중시한 이유입니다. 만일 영양 만점의 식단을 차린다면, 우리는 곡물과 견과류, 채소, 과일만으로도 필수영양소를 거의 모두 섭취하며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예컨대 9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옥수수와 콩을 함께 섭취하면 모두 섭취 가능한데, 그건 옥수수와 콩이 씨앗이기 때문이죠) 이것들은 모두 씨앗이거나 씨앗이 아니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이들 4인방(곡물, 견과류, 채소, 과일) 중 으뜸 음식은 씨앗 그 자체인 곡물(그리고 견과류의 일부)이고요. 씨앗과 인간의 생명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씨앗이야말로 인간의 협력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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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 소실과 식문화의 위축


약 1만 년 전부터 농사를 시작했던 선인(先人)들은, 우리와는 달리, 농사를 경험하며, 여러 고난을 겪으며, 씨앗이 자신과 부족공동체의 생존에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씨앗을 골라 받는 채종, 좋은 땅에 적절한 간격으로 씨를 뿌리고 심는 파종, 더 나은 신품종을 얻기 위해 좋은 씨앗을 교배하는 육종에 관한 지식과 기술은 보존해야 할 최고의 '생존 지식기술'로서 세대를 넘어 계속 전수되었습니다. 당연히 육종으로 나온 작물 종의 품종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전 세계 쌀의 품종은 무려 4만 종이고, 사과 품종은 7500종에 이릅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재배하고 있는 고구마 품종만 5000종에 이르고요.

요컨대, 농작물의 씨앗은 이중 진화의 구현체입니다. 수억 년 동안 진행된 식물의 진화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진행된 씨앗 관리법의 진화 말이에요. 이런 이유로, 종자·농업 운동가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는 씨앗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대자연의 지능, 그리고 농업 공동체의 지능을 나타내는 증류된 표현물." 씨앗은 생명의 토대이자, 자연지능의 유산이며, 동시에 문화(인간지능)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씨앗(종자다양성)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로 20세기는 '종자 소실의 세기'여서, 20세기 들어 사과, 배추, 콩, 토마토, 옥수수 품종 중 80~90% 이상이 소실되고 맙니다. 꼭 그만큼 우리는 풍요로운 식사와 문화의 기회를 박탈당했고요. 인류를 먹여 살려온 건 7000종이 넘는 생물들이지만, 현재 단 30종의 작물이 인류의 식단 중 90%의 칼로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위축된 식문화인 건가요.
무엇이 원인이었던가요? 문제의 뿌리에서 우리는 화학물 집약적인 단종재배를 고집해온 산업농을 발견합니다.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가 소품종 대량생산 체계로 이동해가면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농기업들 중 일부는 씨앗의 유전정보를 독점하는 데 힘을 써오기도 했지요. 분기점은 1970년입니다. 이 해에 미국에서 식물품종보호법(PVPA)이 제정되고 그 뒤로 여러 종자법과 지적재산권 관련법이 세계 곳곳에서 제정되면서, 초국적 농기업들은 씨앗에 대한 소유권과 특허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농작물 유전자 독점에 혈안이 된 5대 바이오테크 종자 기업(몬산토, 신젠타, 듀퐁, 베이어, 도우)대 농작물 유전자 보존 및 육종을 생업으로 해 온 농부들이라는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고 만 것이지요.

화학물 집약적 단종재배, 씨앗 독점에 그치지 않고 이들은 본래의 식물 유전자와는 다른 유전자를 씨앗에 주입해 식물 유전자를 변형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지요. GMO가 바로 그것입니다. GMO는 인체에 미치는 영향도 알 수가 없지만, 자연의 지능에 반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GM 작물들을 제조했던 취지는 해충을 죽이는 독성(능력)을 이 작물들이 갖게 함이었지요. 하지만 이 작물들은 해충 외에 익충들도 무수히 죽이고 말았습니다. 해충 역시 처음에는 백전백패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GM 작물에 저항력을 갖춘 슈퍼버그가 되어 귀환했습니다. 바이오테크 기업들은 자체 제조한 제초제에 저항력을 갖도록 GM 작물들을 만들었지만(GM작물-제초제의 승리를 믿으며) 이 제초제에 저항력을 갖는 슈퍼잡초들을 만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지요.

자연지능을 무시 말라

오늘날 우리의 귀에 떠들썩하게 들리는 한 화두는 인공지능이지만,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고 있는 인간의 지능은 실은, 자연이 만들어낸 자연의 지능입니다. 인간 두뇌라는 자연지능과 다른 생물들의 자연지능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걸까요? 농생태계 생물의 자연지능에 대한 무지와 무시야말로 산업농과 바이오테크 농기업들이 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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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길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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