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또 하나의 심각한 갈등이 있다. 친핵과 반핵 세력 간의 반목이다. 친핵, 즉 원자력 옹호자들은 에너지 자원 빈곤 국가인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에너지원은 원자력이라고 오랫동안 외쳐왔다. 반면 반핵, 곧 탈핵 옹호자들은 핵은 인류를, 대한민국을 재난으로 이끌 판도라의 상자라고 주장했다. 지난 40년간 친핵 세력이 쌓고 지켜온 철옹성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과 경주 지진으로 서서히 금이 가고 있다. 탈핵 세력의 공세가 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해 가을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거의 모든 의제를 점령했다. 그 절정은 3월10일이었다. 그 날은 친박들의 백색테러 등으로 같은 편을 숨지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벌어져 수십 명의 사상자까지 났다. 다음날인 11일에는 탄핵 찬성 쪽에서는 승리의 축제를 벌였고 친박 쪽에서는 탄핵 불복 시위를 벌였다.
그날은 이런 날로만 기억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 적어도 탈핵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말이다. 3월11일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 벌어진 지 6년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핵발전소 사고 가운데 역사적 사건으로는 전 세계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미국 드리마일섬 핵 누출 사고,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참사, 그리고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후쿠시마는 그 규모와 우리와 가까운 지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수산물 수입 등 시민들이 매우 민감하게 여기는 식품 방사능 문제까지 겹쳐 우리가 잊으려 해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11일을 전후해 탈핵단체와 환경단체, 시민단체들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탈핵 관련 프로그램과 행사, 퍼포먼스를 펼쳤다. 하지만 탈핵은 탄핵에 묻혀 언론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 날은 이미 지나갔지만 며칠 늦게나마 성찰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5월 대선 후보들의 핵 발전과 에너지 전환 정책 백가쟁명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탈핵은 탄핵 정국에 이은 조기대선을 맞아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대선주자들은 제 나름대로의 탈핵, 에너지 전환 정책을 내놓고 있다. 2040년까지 모든 핵발전소 가동을 멈춘다는 가장 강한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 정의당에서부터 재생에너지 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핵발전소를 병행할 수밖에 없다는 자유한국당에 이르기까지 핵 발전 정책은 넒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문재인 등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은 현실적 탈핵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 수명 연장 반대와 폐로, 건설에 들어가지 않은 핵발전소 허가 취소, 그리고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 전환 가속화 등이다.
각 정당과 대선예비후보들이 앞 다퉈 핵 발전 관련 공약이나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에너지 정책이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시민의 안전과 생명과도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성장과 개발이 모든 가치에 앞섰다. 심지어는 헌법적 가치인 생명보다 앞섰다. 그것은 박정희 시절 때 만들어진, 일그러진 가치였다.
박정희가 만든 핵발전 안전 신화, 딸의 몰락과 함께 순장의 길로
이제 그 딸 박근혜의 몰락과 함께 박정희 신화와 향수도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박정희가 만든, 독재에 기반을 둔 성장과 개발은 새로운 시대에서는 계속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는 인식이 시민들 사이에서 점차 퍼지고 있다. 친핵 또한 박정희가 만든 우상이다. 그 우상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경주 지진, 박정희 신화와 박근혜 몰락이라는 삼박자가 2017년 대한민국에서 잘 맞아 들어가면서 이제 우리는 탈핵의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독일 등 대다수 유럽국가와 미국 등은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완전 탈핵 또는 탈핵 속도를 높여가고 있다.
당사국인 일본은 사고 직후 탈핵의 소리가 높더니만 아베 정권 이후 다시 반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탄핵촛불시민 세력과 박근혜 호위 친박 태극기 집회 세력 간 대결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이라는 대규모 지진으로 일단 큰 획을 그었다. 물론 여진은 박근혜 전 대통령 삼성동 집 안팎에서 계속되고 있다.
친핵이냐, 탈핵이냐는 한편으로는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이견 또는 견해 차이로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먹고사는 것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과 달리 소수의 친박 세력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박근혜를 둘러싸고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기 때문에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나온 본능적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정권 쟁취를 둘러싼 무한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돼왔던 것이다.
핵발전 에너지 정책도 정치와 마찬가지다. 핵발전소 건설과 운영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았다. 대학에서도 관련 인력을 많이 배출했다. 적어도 수십만의 인력이 이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핵심을 뭉뚱그려 '원자력마피아' 또는 '핵마피아'라고 한다.
원전마피아의 민낯 우리 사회에서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탈핵을 외치는 사람들은 틈나는 대로 원전마피아란 말을 입에 오르내리지만 이들의 실상이 우리 사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은 거의 없다. 이들의 결속력이 워낙 단단한데다 모든 것이 은밀하게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원전 부품과 관련한 부패비리가 일부 드러난 정도로 그들의 속살 일부를 '새 발의 피'만큼 보았을 뿐이다.
원전마피아는 우리나라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핵발전소를 건설·운영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늘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일본에서도 우리의 원전마피아에 해당하는 '원자력족' 내지 '원자력촌(村, 무라)'이 핵발전소의 시발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참사를 계기로 이들의 민낯이 재조명됐다.
일본 원자력족의 민낯을 보노라면 마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민낯을 볼 때만큼이나 소름끼친다. 일본의 신문 <아카하타>가 펴낸 <일본 원전 대해부>(당대 펴냄)를 보면 후쿠시마와 같은 엄청난 대재앙을 겪었으면 당연히 서둘러 탈핵 국가로 탈바꿈하려 할 텐데 왜 재가동을 하려고 기를 쓰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신문은 심층취재를 통해 일본 원자력족들이 후쿠시마 이후 핵 발전 회사가 시민들의 재가동 찬성 의견을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여론을 조작했는지를 폭로했다. 원자력족은 "전력이 부족하면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여름철 열사병 등 온열질환이 우려된다.", "재생 가능 에너지는 대체 전력원이 되기 도저히 무리다." 따위의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널리 퍼트렸다. 우리나라에서 '원전마피아'가 그동안 퍼트렸던 논리와 판박이다.
핵 재앙의 뿌리 뽑는 탈핵,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정의
이 책을 보면 일본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탈핵 운동이 힘을 못 쓰고 친핵 운동이 대세를 이룬 이유를 알 수 있다. 핵발전소 운영으로 나온 막대한 자금의 일부는 유력 정치인들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를 보면서 우리 원전마피아도 언론과 정치인과 관료들을 상대로 이와 비슷한 일들을 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후쿠시마는 일본에서 일어난 핵 발전 참사이다. 하지만 일본 못지않게 우리나라에도 탈핵의 길을 선택하도록 큰 영향을 끼쳤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최근 개봉된 탈핵 영화 <판도라>도 그 가운데 하나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과 함께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최근 전국 19세 이상 휴대전화 가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한 결과 77.2%가 이 영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최악의 노심용융 핵발전소 사고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핵발전소 재앙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 조사에서 나이가 젊을수록 핵발전소 폭발을 우려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이는 탈핵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전망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와 정의란 가치를 실현하려고 힘쓰는 시민들의 거대한 물결을 친박 세력들이 거스를 수 없었다. 핵 재앙의 원천을 뿌리 뽑기 위한 탈핵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의 의지 또한 원전마피아들이 결코 꺾을 수 없다. 이번 역사적 대선에서 어떤 지도자를 뽑느냐에 따라 탈핵이라는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릴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