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헌법 팽개치고 삼성동서 '참호전' 준비

초유의 '사저 대변인' 출현…박근혜·친박의 장기 투쟁 서막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

삼성동 사저에 도착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 같은 말 한마디는 여러 의미를 품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근거는 "진실이 아니다"란 게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다. 이후의 법정 싸움을 예고한 것은 물론, 그 이후의 조기 대선 등 정치적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비록 순순히 청와대에서 퇴거하긴 했지만, 그간 몸을 낮추는 듯 보였던 박 전 대통령과 친박계는 마치 퇴거를 '기회'로 삼는 듯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비치고 지치층을 겨냥한 불복 메시지를 내보냈다. 삼성동 사저를 '진지'로 한 박 전 대통령과 친박계의 장기 투쟁 서막이 올랐다.

초유의 '사저 대변인' 출연박근혜, 삼성동 '참호전' 시동

박 전 대통령은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모두 안고 가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말을 민경욱 의원을 통해 밝혔다. 민 의원은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인사다.

이 발언은 청와대 참모들이 앞서 전달한 여러 초안을 뒤로하고,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이 즐겨 쓰는 '대국민 메시지로 포장한 지지층 겨냥 메시지'의 전형이다. 유명한 '배신의 정치' 발언이나 지난해 11월 4일 한 3차 대국민담화에서 "가족 간에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는 등 불운한 개인사를 강조했던 것과 닮았다.

박 전 대통령이 이처럼 꿋꿋하고 결연한 장기 항전의 모습을 보일 때, 친박계 의원들은 짜 맞춘 듯 박 전 대통령의 '슬프고 연약한'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언론에 흘렸다.

사상 최초로 '사저 대변인'을 자처한 민경욱 의원은 "얼굴을 뵈니 볼 화장이 (눈물로) 지워져 있었다"고 했고, 조원진 의원은 13일 사저 "거실이 너무 추워서 (박 전 대통령이) 많이 힘드신 것 같다"고 했다. 지지층의 동정론을 키워 정치적 결집을 유도하는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드라마틱하게 펼쳐진 이런 '사저 복귀' 모습을 두고 "미리 만들어진 그림"이 아니냐는 추측도 분분하다. 언론도 직전에야 파악한 대통령의 사저 이동 시간에 앞서 박사모 등 지지자들은 일찌감치 사저 앞에 태극기를 들고 모여 있었다.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 등 친박계 핵심 의원들은 순식간에 사저 앞으로 집결해 박 전 대통령을 맞았다.

청와대 초대 공직기강비서관이었던 조응천 의원은 이날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한 인터뷰에서 "지지자들이 언론도 모르는 연락을 받고 거기서 대기를 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했다.

실제로 탄기국(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은 당일 오후 4시 30분께 "VIP님, 오늘 오후 사저로 오실 듯합니다. 가까운 곳에 계신 분께서는 청와대나 삼성동 자택으로"라는 공지 문자를 소속 회원들에게 보냈다. 청와대가 박 전 대통령의 퇴거를 공식 발표하기 전이다.

이런 까닭에 박 전 대통령이 순순히 청와대에서 퇴거는 할지라도, 퇴거와 사저 복귀라는 전에 없던 특수한 상황을 활용해 지지층에게 자신의 '장기 항전' 메시지를 보내고 향후 싸움의 동력을 확보하려 했다는 해석이 자연스레 나온다. 조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사저 골목 발언을 "삼성동을 진지 삼아 계속 이게 진실이다라고 메시지를 던지겠다는 것으로 저는 읽었다"고 말했다.

법정 투쟁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지지층을 중심으로 진지전을 펴며 내년 지방선거, 3년 뒤의 총선을 겨냥해 장기적인 친박 정치의 부활을 도모하는 시나리오다.

폐위된 '주군'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폐족 위기에 처한 친박 정치인들도 박근혜를 중심으로 정치적 재기 발판을 만들려 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적 영향력을 꾸준히 행사하며 움직이는 한 친박계의 생존력도 일정 부분 보장된다.

그들은 김무성·유승민 등 과거 새누리당 내 비주류의 당권 접수, 친박계의 공천 전횡에 따른 4.13 총선 참패, '주군'인 박 전 대통령이 핵심이 된 국정 농단 사건, 이후 벌어진 당내 친박 청산 흐름 속에서도 박 전 대통령과 지지층을 등에 업고 흡사 '좀비'처럼 강한 생존력을 발휘하며 살아남았다.

실제로 서청원 최경환 등 사저 영접을 나온 친박 핵심 의원들은 당일 한 식당에서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날 오전 10시께에도 조원진 윤상현 등 의원들이 사저에 들어가 박 전 대통령과 만나 1시간 20분가량 회동을 했다.

세비를 받는 현직 의원들이 헌법재판소로부터 파면 결정을 받은 자연인 박근혜를 보좌하기 위해 정무·법률·수행 등 역할을 분배해 "외롭지 않게 도와드리는 도리"를 지키려 한다고도 한다.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수석대변인은 이를 "박 전 대통령의 사저 라인업은 향후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대국민 투쟁 선언이면서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에 절대 승복할 수 없다는 강력한 불복 표명"라고 지적했다.

이런 골수 친박계와 거리를 두는 듯해 보이는 당 지도부도 실제로는 '친박계의 재기 발판'의 하나로 지목되는 황교안 국무총리 권한대행의 출마 활로를 열어주는 당내 대선 후보 경선룰을 결정해 발표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했던 김문수·이인제 후보마저 예비 경선에 참가하지 않은 인물이 본선에 직행할 수 있도록 한 특례 규정을 담은 경선 규칙은 "새치기 경선"이라며 인명진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공식 요구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황 권한대행이 부담을 무릅쓰고 출마할 경우 박 전 대통령의 직·간접적 후원을 받아 단숨에 보수 진영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고, 이로써 친박계가 자유한국당과 황 대행을 '숙주' 삼아 당의 중심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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