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 누구도 '노동'을 말하지 않는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경제민주화, 재벌개혁을 넘어 노동으로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을 빈 재벌개혁 논의가 한창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도지는 바람이랄까 병이랄까 그런 것. 그런데 경제민주화 논의에 ‘노동’이 빠져있다. 그렇다면 뭐가 경제민주화이고 누구를 위한 경제민주화인지, 그리고 누가 경제민주화의 주체인지를 물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경제적 의사결정과정에 이해당사자가 참가하는 것이라면 노동은 핵심적인 이해당사자다. 노동의 참가를 통해 경제민주화는 비로소 개념을 획득하고 이를 목적 및 수단과 통합시킨다.

경제민주화의 과정에서 재벌개혁은 우회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지만 경제민주화가 거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노동의 참가를 말할 때 노동은 ‘조직된 노동’으로서 산별노조를 의미한다. 산별노조를 발판으로 성립하는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그리고 경영참가(노동이사제)가 참가의 중요한 통로를 이룬다. 최근 공감대를 넓혀가는 소득주도성장론도 노동시장에서 연대임금('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추진되지 않으면 연료 없는 자동차가 되고 만다. 결국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이나 소득주도성장론까지 포괄한다면 이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결합될 때 추진동력을 얻는다.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는 그야말로 형용모순이다. (필자)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 논의

나는 '재벌개혁 = 경제민주화'라는 시각이 불편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논리적 설명도 없이 그렇게 알아들어라는 듯이 우격다짐으로 강요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인 것은 맞지만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에 갇히지는 않는다. 개는 동물이지만 동물이 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의 일부분이고 경제민주화가 거기에 멈춰서도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경제민주화의 주체이자 대상인 노동이 빠져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실질적인 의미와 절차적인 의미 모두를 포괄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대가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조건만이라도 갖춘 절차적 민주주의를 심화·발전시키는데 있다. 달(Robert Dahl)에 따르면 절차적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모든 사회성원이 그들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표출할 수 있도록 '동등하고 효과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지렛대다. 노동자들은 의사결정과정이라는 절차적 측면에서 배제됨으로써 경제성장의 과실로부터도 배제되어 왔다.

그간 경제력을 독점한 재벌대기업이 경제적 의사결정권까지 독점했다면 이제 그 권한을 해방시켜 노동자에게도 나눠줘야 한다. 기업이나 산업차원에서는 물론 거시적인 정책결정차원에서도 노동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 경제민주화 논의가 재벌개혁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노동에 가닿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노동의 관점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맥락에서 경제민주화는 어떤 모습을 띨까. 경제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노동이 주체로 서야 한다면 그 구체적인 수단은 뭐며 노동은 그럴 준비나 능력은 갖추고 있을까. 이 과정에서 재벌개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시론적 대답이다.

ⓒ정기훈

산별체제가 경제민주화와 신성장전략의 주체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이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은 소득주도성장(income-led growth) 전략이나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이해하는 요지는 이렇다. 소득(임금)을 늘려 내수를 키우고 그것을 성장의 엔진으로 삼자는 것이다. 고용이 상품이나 서비스 생산의 파생수요라면 이는 일자리를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소득(유효수요)을 늘리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이는 방법이 있고 임금격차를 줄이는 방법(흔히 연대임금이라고 한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바탕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포함하여 복지지출을 늘리는 방법이 그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연대임금이다. 연대임금은 노동소득 분배율의 제고를 포함하며 연대임금(1차 분배)이 이뤄져야 복지사회(2차 분배)도 제자리를 잡는다.

문제는 이런 성장전략을 밀고 가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고속도로가 뚫리듯 소득주도성장전략도 뻗어나갈 것인가. 위로부터의 개혁이 충분조건까지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지지되고 동원되어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가 혁명을 필요로 했다면 정치적 민주주의의 시대에 진행되는 경제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언제든 철회될 수도, 내용이 왜곡될 수도 있다(노무현 정권의 좌절을 보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해소하고 연대임금을 실현하는 핵심이 단체교섭이라면 그것은 정부출입금지구역이다.

노동을 새로운 성장패러다임을 지원하는 주체로 세운다면 그것은 조직된 노동, 즉 노동조합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 게 바로 산별체제다. 산별체제는 기업을 뛰어넘어 산업별 차원에서 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시스템이다. 참가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는 거시(및 산업)차원의 사회적 대화체제와 산업차원의 교섭체제, 그리고 기업차원의 경영참가(공동결정제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산별체제라고 부른다.

산별노조의 정신을 이루는 것이 연대다. 그것이 조합 내부로는 연대임금으로 나타난다면 외부적으로는 사회개혁으로 나타난다(보건의료노조의 의료공공성이나 언론노조의 언론민주화투쟁이 그것이다). 유럽의 경우를 보더라도 산별노조를 만드는 목적은 임금의 극대화가 아니라 임금의 평준화다. 이를 통해 노조는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는 단결의 물적인 토대를 마련해 왔다.

노동의 동원 없이 재벌개혁이 가능한가

산별체제만 형성되면 연대임금이, 그리고 복지사회가 구축되고 새로운 성장패러다임이 작동하는가. 이 과정에서 재벌개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먼저 오늘날 노동이 부딪히는 문제의 중심에서 재벌을 뺄 수는 없다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임금격차의 이면에는 체급이 다른 기업 간의 불공정거래나 수직계열화, 나아가 문어발 경영에다 골목상권까지 파고드는 재벌의 탐욕이 존재한다. 고용유연화가 진행되면서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임금격차도 확대되고 있다(여기서 재벌소속 노동자의 이야기를 일반화시킬 필요는 없다). 중소기업이 몰락하고 위축되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청년실업이다. 재벌은 자동화·외주화·모듈화에 더해 해외생산을 통해 스스로의 일자리를 줄이는데다 중소기업마저 위기로 몰면서 경제의 고용창출능력을 갉아먹는다.

노사관계에 미치는 재벌의 영향도 간과하긴 어렵다. 재벌이 주도한 수출 중심의 성장에는 노조탄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요소비용을 줄여 경쟁력을 높이기엔 만만한 게 노동이었다. 임금인상률을 낮추고 비정규직을 늘리고 자기의 고용은 줄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노조는 파업과 임금인상으로 국민경제를 갉아먹고 온통 제 앞가림에만 급급한 집단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노조로서는 '뺏기고 욕먹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 재벌의 탐욕 앞에서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소비자, 심지어 정부까지 하나같이 빨대꽂이였다. 한 마디로 "재벌? 깡패나 다름없죠"였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경제정책은 물론 산업이나 기업차원에서 각종 의사결정권을 재벌이 독점함으로써 노동조합은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재벌은 집중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경유착과 시장지배, 그리고 황제경영을 실현했다. 그렇다면 재벌에게 독점된 의사결정권을 제한하지 않고서는 노동이 참여할 공간은 열리지 않는다. 정경유착과 시장지배, 그리고 황제경영의 자리에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참가(노동이사제 및 사업장협의회)를 배치해야 한다. 재벌의 의사결정권을 노동이 견제하고 상쇄해나가는 구조다. 노동이 재벌체제에서 임금격차와 실업이라는 멍에를 짊어졌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은 산별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참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의 관점에서도, 재벌개혁의 관점에서도 경제민주화가 노동의 참가를 외면하기란 어렵다.

경제민주화에 이르는 길목의 곳곳에 재벌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재벌을 개혁하는 권력자원에 노동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재벌개혁의 수단으로서는 흔히 재벌개혁법의 제개정과 공정거래위원회나 사법부의 엄정한 법집행을 꼽는다. 이런 의지와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묻지 않는다. 몰라서 못 바꾼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 바꾸지 못했다. 재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윗분’들에게 재벌개혁을 맡긴다는 건 재벌개혁을 포기하는 거나 진배없다. 아래로부터의 권력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면 조직된 노동, 즉 노동조합이 중시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재벌개혁은 노동조합은 아래로부터 정부를 독려하면서 정부와 함께 주체로 서야 한다.

정부의 선도적인 개혁이 노정동맹의 고리를 형성한다

다음 질문은 산별체제는 어떻게 하면 형성할 수 있는가다. 정부가 과연 노동을 필요로 하고 노동과 함께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며 노조 또한 연대를 내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기가 십상이다’이다.
새 정부가 노동'개혁'을 실현할 의지나 밀어붙일 힘이 있을 지부터가 의문이다. 핵심은 노동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다. 이제는 상식으로 굳어버린 '노동배제의 정치'(politics of labor exclusion)를 '노동포용의 정치'(politics of labor inclusion)로 바꾸는 게 말과 같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안팎으로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에 포섭된 관료나 정치가들의 저항도 만만찮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산별체제를 수용하고 노동을 재벌개혁, 나아가 경제민주화의 파트너로 삼을 지는 솔직히 말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간 개혁을 표방한 정치가 예외 없이 노동과의 거리를 정치공학적으로 계산해 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면 새 정권이 노동을 전면적으로 껴안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개혁의지나 능력이 모자랄 수 있다는 문제의 맞은편에는 "그럼 노조는 연대를 내면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가령 임금격차의 핵심은 기업규모 간 임금격차고 고용형태별 임금격차다. 그렇다면 대기업노동자가 하청기업 노동자를 '같은 산별노조의 조합원'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국가나 기업으로부터는 배제되는 비정규직을 노조는 '자기 살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자리만 해도 그렇다. '적게 일하면서 모두가 일하는' 방법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길이다. 그럼 임금이 깎이더라도 노조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수용할까. 이는 요컨대 노동조합이 연대의 가치를 내면화시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정착시키고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개혁적인 정부와 연대를 내면화시킬 수 있는 노동조합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 이 둘의 조합을 기대한다는 건 잔디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새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동개혁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가 재벌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노동개혁 입법은 장관의 책상이나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길을 읽고 정부와 노동 사이에는 때 이른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노동은 개혁 없는 개혁정부를 비판하고 정부는 노조의 제몫 챙기기 파업을 법을 내세워 탄압한다(노동계는 개혁을 큰 틀 속에서 바라보면서 단기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갈등을 제어할 리더십이 없다). 이 꼬라지 보려고 우리가 개혁정부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노동계에 퍼져가며 강경파가 힘을 얻는다. 데자뷰처럼 익숙한 풍경이다.

농담이 아니다. 정권교체를 예견(희망)하면서도 새 정권의 성공을 예견(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 실패는 누구의 탓일까. 노동을 전면적으로 껴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혁적이지 못했던 개혁정부의 탓일까 아니면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절제할 수 없었던 노조의 탓일까. 정부의 개혁과 노조의 연대가 공명하지 않는다면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할까.

만일 예견된 실패가 현실화된다면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가 져야 한다. 둘 가운데 한쪽이 먼저 변화될 필요가 있다면 그 역시 정부다. 힘이 있는 쪽이 큰 책임을 져야하고 먼저 변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배신을 당하더라도 힘 있는 쪽은 그 상처가 크지 않을 뿐더러 여차하면 되로 받은 걸 말로 갚을 수도 있다. 노동이 바뀌지 않은 것을 핑계로 개혁을 거부한다면 그야말로 그건 핑계이거나 좀스런 짓일 뿐이다. 개혁적인 정권이라면 개혁을 하면서 노동으로부터 배신당할 각오도 해야 한다. 노동의 변화는 동학적으로 봐야한다. 지금의 노조가 정태적으로 연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개혁에 노동이 신뢰를 보낼 수 있다면 노동도 변화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더딜 수는 있어도 노동조합의 바탕이 연대인 한 그것은 봄이 오듯이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정부의 노력에는 최저임금의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보호와 같은 의제 이외에도 산별체제를 세우겠다는 노력도 포함된다.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대화나 산별교섭체제, 그리고 경영참가를 담대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조직률을 높이려는 노조의 노력을 정부가 지원하고 판을 까는 일이다. 노조의 힘은 조직률에서 나온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고 정부가 공공부문에서 모범사용자로 행세하고 노동교육을 강화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노조를 필요로 하는 정부를 필요로 한다. "노조가 힘이 없으면 개혁은커녕 어용노릇도 못한다".

물론 노조도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우리 사회가 제기하는 질문, 저성장과 양극화에 대해 책임 있게 답변해야 한다. 노조가 언제까지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코스프레하면서 ‘해 달라’고 요구만 할 것인가도 의문이다. 이제 노조의 언어와 문법도 바뀌어야 한다. 스스로의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면서 ‘하겠다’고 책임 있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새 부대만 필요한 게 아니라 새 술도 필요하다.

다시 '노동있는 경제민주화'를 향해

경제민주화를 말하려면 “무엇이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구를 위한 경제민주화인가", "누구에 의한 경제민주화인가"도 물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을 넘어 노동에 가닿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질문에 담겨있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적인 이해당사자가 의사결정과정에서는 물론 그 성과의 배분과정에서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을 우회할 수 없다면 직접적인 피해자인 노동이 그 개혁의 권력자원이 되어야 한다.

이때의 노동은 산별노조를 가리킨다.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그리고 경영참가를 배열한 것을 산별체제라고 불렀다. 그것을 이끄는 이념적 노선은 연대다(거창하게 말하면 사회운동 노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연대는 일자리의 창출은 물론 비정규직 문제 등 임금격차의 해소, 나아가 복지국가 발전 과정에서 관건이 된다. 소득주도성장론이라는 게, 그리고 경제민주화가 이 정도라고 나는 그렇게 편협하게 이해한다.

노동개혁, 소득주도성장,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재벌개혁 논의와 맞닥뜨린다. 바꾸어 말해 새로운 성장담론은 재벌의 자리에 노동을 놓는 것, 국가-재벌의 유착(담합)을 국가-노동의 동맹으로 바꿔놓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을 넘어 노동에 가닿는다. 노동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을 요구한다. 촛불 이전의 논의가 촛불 이후의 논의와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노동개혁이나 경제민주화에서도 담대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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