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다 공존을 그리다

[함께 사는 길]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시라!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줍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그림책 읽기 속에는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과 문학으로서의 이야기가 있고, 그림이 있습니다. 책 읽어주는 부모의 목소리에는 음악의 시원이라 말할 수 있는 운율이 있고, 책 속 캐릭터로 변신한 부모의 연극적 낭송과 몸짓에는 타자를 이해하는 공감의 기술이 숨어 있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경험하는 최초의 예술이고 최초의 철학입니다.

어떤 그림책을 읽는가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의 세계가 직면한 기후파국의 위험성, 인간에 의한 생물 대멸종과 같은 우리별의 지속가능성 위기는 모두 오늘의 어른들이 자연을 정복하고 소유하고 지배하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아이들의 미래가 안녕하길 바라는 부모들은 마땅히 그들이 훼손한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려는 생각을 담은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 사람의 공존이 삶의 올바르고 오래된 지혜임을 알려주는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는 일은 생태적 감수성과 사유의 힘을 길러주는 일입니다.

"그래 그런 거야. 함께 사는 거야." 일러주는 목소리, 그림책을 읽습니다. 자연과의 평화 공존을 그립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시민·그림책을 만드는 시민들은 어떤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을까요? 그들이 추천한 '생태적 감수성과 사유'를 길러주는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고 보시라!' 권해 드립니다.

생명의 약속에 대하여 : 조영권 파주환경운동연합 의장 추천 <잠자리 연못의 비밀>

▲ <잠자리 연못의 비밀>(폭스 엘리스 지음, 마이클 S. 메이닥 그림, 원지인 옮김, 파브르북 펴냄) ⓒ파브르북
철마다 자연 속에서 환경캠프를 열어 많은 어린이들과 만나왔습니다. 캠프에 참가한 어린이들은 시멘트로 지은 집과 시멘트로 지은 학교와 석유 찌꺼기로 지은 도로를 벗어나 참나무와 소나무가 지은 숲과 부들과 갈대가 지은 호수, 강가로 나아갑니다. 더러 바닷가 모래사장일 때도 있지요. 거기서 많은 생명과 만나게 됩니다. 말로만 듣던 생물과 처음 듣고 보는 생물들까지요. 어린이들에게 그 생물들이 우리들과 맺은 오래된 생명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이 내 일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지구에는 3000만 종이 넘는 생물들이 살고 있는데, 사실은 그 10배 이상이 산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생명체들이 모두 생명의 약속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할까?' 그게 내 오랜 고민이었습니다.

브라이언 폭스 엘리스는 작가이기 전에 환경교육을 하는 분입니다. 그가 내 고민에 해답을 주었죠. 그의 책 <잠자리 연못의 비밀>(마이클 S. 메이닥 그림, 원지인 옮김, 파브르북 펴냄)에는 우럭 낚시를 하러 아빠와 연못에 나간 10살 소년 폭스(누군지 알겠죠!)가 나옵니다. 연못에서 부화한 모기들이 수없이 많았고 한 암컷 모기가 폭스의 피를 빨았습니다. 역시 연못에서 부화한 잠자리가 그 모기를 먹었고 그 잠자리를 황소개구리가 먹었고 황소개구리를 검정우럭이 큰 입을 벌려 삼켰습니다. 낚시를 드리우고 기다린 끝에 폭스는 검정우럭을 잡았습니다. 우럭은 폭스네 저녁 식탁에 올라가겠죠. 그 우럭의 뱃속에 황소개구리가, 황소개구리의 뱃속에 잠자리가, 잠자리 뱃속에 모기가 그리고 그 모기 뱃속에 폭스의 피 한 방울이 들어있을 겁니다.

▲ <잠자리 연못의 비밀> 중. ⓒ파브르북

살기 위해 먹는 일은 한편으로는 다른 생명의 생명을 빼앗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은 먹고 먹히는 운명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그 운명 밖에 있지 않습니다. 자연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같은 자격으로 그 생명의 그물 안에 있습니다. 교만하게 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자연 앞에 겸손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생명들이 맺은 관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폭스가 피 한 방울을 내주지 않았다면, 폭스의 저녁 밥상에 우럭이 올라올 수 없었을 겁니다. 생명의 약속은 서로의 존재가 그물 밖으로 벗어나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 지켜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그물을 찢어버리는 일은 주로 사람이 합니다. 어느 날 폭스의 연못을 흙과 돌로 메워 거기다 공장과 집을 짓거나 농지로 만드는 일 따윌 할 수도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게 평지의 땅을 사는 것보다 싸다면 말입니다. 그런 일은 현실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죠. 그리고 나면 이제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매일 벌어지는 생명의 무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함께 살자면 인간은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생명의 그물에 대한 존중심을 지금보다 더, 더, 더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길 바랍니다.

사치와 욕심이 지구를 삼키지 않기를 : 원선화 어린이책 편집자 추천 <레스토랑 Sal>

▲ <레스토랑 Sal>(소윤경 지음, 문학동네어린이 펴냄) ⓒ문학동네어린이
아메리카의 인디오가 인류에 포함되는지를 논했던 바야돌리드 논쟁. 과연 인디오를 '인간답게' 대우해 주어야 하는가. 터무니없고 황당하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런던에서는 사르키 바트만이라는 아프리카 여인이 그의 고향에서 끌려와 버젓이 전시되었으며 비(非) 백인종들이 동물원의 한 공간을 채웠다. 전통적 가부장제에서는 여성이 사회적 권리를 얻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퇴보로 여겨졌다. 그들이 존엄을 인정받기까지 치러야 했던 희생은 열등하다고 여긴(결코 사실이 아닌) 타자를 향한 빗장 지르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인간 배척의 연장선에 있다. 여전히 이 모든 착취와 폭력은 비인간에게는 유효하다.

한때 나는 인간이 우위라고 믿었다. 인간을 위한 비(非) 인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동조해왔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그들의 고통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고통은 누구도 우위일 수 없다. 희생은 강제될 수 없다. '열등'과 '약함'은 '인간답게' '생명답게'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과 소통할 언어가 없는 비인간은 인간 중심의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비명조차 제거된다. 화가 소윤경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들 중 하나다. 인간 탐욕과 착취의 집약체인 식탁을 그려낸 <레스토랑 Sal>(소윤경 지음, 문학동네어린이 펴냄)이 그렇다. 구제역 파동 당시 구상한 이 그림책은 식탁에 오른 음식의 재료의 이면을 보여준다. '행복한 재료'가 최상의 맛을 낸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최고의 요리사들이 최고급 요리를 내놓는 이곳, sal.

끊임없이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사람들은 먹음직스러운 소스의 빛깔과 가공된 향에 가려진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아이가 우연히 고양이를 쫓아 들어간 주방 너머의 공간, 화려한 외관에 숨겨진 그곳엔 ‘행복한 재료’들이 고통을 기다리고 있다. 새끼를 꼭 품어 안은 어미 원숭이, 친구의 비명을 들으며 자기 차례가 오는 것을 목격하는 눈동자, 철장 가장 안쪽으로 숨어 들어가 한없이 몸을 움츠린 개, 고정틀에 목이 끼인 채 속수무책으로 실험을 당해야 하는 토끼. 그들의 고통과 감정은 의도적으로 묵인된다.

▲ <레스토랑 Sal> 중. ⓒ문학동네어린이

우리는 무엇을 먹는가.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작가 소윤경은 그림책 <레스토랑 Sal>을 통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그늘진 자리를 한 번쯤 바라봐주기를 권한다. 우리가 함부로 한 것들은 그저 '재료'가 아니다. 삶이다. 어미와 새끼가 누려야 할 것이다. 죽음과 고통을 이윤화하며 쾌락과 발전만 좇는다면, 언젠가는 우리 역시 접시 위에 놓인 존재가 될 것이다. 위험은 가장 취약한 이들부터 찾아온다.

"접시 위의 음식들에 대한 미안함과 곤란함이 나를 이 기묘한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나 보다. 다만, 사람들의 사치와 욕심이 지구를 삼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레스토랑 Sal> 작가의 말)

자연과 만나다 부엉이를 기다리다 : 이지현 에코맘코리아 사무처장 추천 <부엉이와 보름달>

"아빠, 우리 동네에도 부엉이가 살고 있을까요?"

▲ <부엉이와 보름달>(제인 욜런 지음, 존 쉰헤르 그림, 박향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시공주니어
아이가 다섯 살 무렵으로 기억된다. 한 번 엄마와 <부엉이와 보름달>(제인 욜런 지음, 존 쉰헤르 그림, 박향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을 읽은 뒤 아이는 꼭 아빠에게 이 책을 읽어 달라 졸랐고, 책을 읽은 뒤 아빠와 오래도록 부엉이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빠가 잠든 뒤에도 아이는 책 속의 부엉이를 바라보다 또 어디 아득한 먼 곳을 바라보다 했다. 부엉이가 우리 동네에도 살고 있을까? 집 가까이 있는 산에 버스를 타고 가면 부엉이를 만날 수 있을까? 밤에 부엉이를 만나면 무서울 텐데. 부엉이를 만나면 뭘 해야 하지? 밤의 숲은 많이 깜깜할까? 아이는 오래도록 그렇게 물었다. 드디어 부엉이를 만나러 갈 기회를 얻었다. 11월 말 할아버지 제사를 위해 큰아버지 댁에 가게 된 것이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 마을의 깜깜한 밤, 뒷산에는 부엉이가 살 거라 아이는 믿었다. 실망하지 않을까? 괜한 우려로 내가 아이 아빠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큰아버지 댁에 간 날 밤, 아이는 모자와 장갑과 목도리를 먼저 챙겨 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어둡기를 기다렸다. 겨울밤은 일찍 찾아왔다. 아빠와 산길로 드는 그 밤, 아이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한다. 그래 부엉이를 만나려면 조용히 해야 하니까! 그리고 숲에 들어 마침내 아이는 부엉이를 불렀다. "부우우우~~엉", "부우우우~~엉" 부엉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산길을 걸어 숲을 나온 아이는 산기슭에서 숲을 향해 외쳤다. "저녁은 먹었니?" "오늘 숲에는 별일 없니?" 부엉이를 만나지 못하고 깜깜한 밤길을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실망했을까 두려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왜냐면 부엉이를 만난 날도 있었고, 만나지 못한 날도 있다고 했으니까!" 실망은커녕, 아이는 추워서 빨개진 볼만큼 마음은 들뜨고 상기되어 있었다.

도시화율이 95퍼센트가 넘어선 도시들의 연합국가, 그게 오늘날의 우리 사회다. 그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도시 밖의 자연은 검은 어둠일 뿐이다. 그 어둠 속에 어떤 생명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할까? 그림책 한 권이 아이에게 생명에 대한 궁금증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심어준 걸 목격한 엄마로서, 나는 환경교육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지 알게 됐다.

▲ <부엉이와 보름달> 중. ⓒ시공주니어

사람들은 경이로운 자연을 만날 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지게 된다. 그 경험과 기억의 힘은 자연에 대한 삶의 태도를 친화적으로 바꾼다. 보름달 뜬 밤의 부엉이를 찾아가는 그 얘기를 직접 따라 해 본 아이는 자연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품게 됐다. 그의 인생에서 자연은 부엉이라는 보석을 품은 귀한 공간이다. 그는 평생 부엉이와의 만남을 즐거이 기다리는 자로 성장할 것이다. 그는 숲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생태적 인격을 갖춘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내 믿음을 매일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확인받는다. 책을 권하는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란 걸 새로이 깨닫는다.

■ 하나, 둘, 셋생명에 공감하다 : 장미정 환경교육센터 센터장 추천 <나를 세어 봐!>

▲ <나를 세어 봐!>(케이티 코튼 지음, 스티븐 월턴 그림, 조은수 옮김, 한울림어린이 펴냄) ⓒ한울림어린이
책장을 넘긴다. 위기에 처했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동물들을 만난다. 개체를 넘어 종 자체의 소멸 위기를 맞은 동물들의 숫자를 세어 나간다. 어쩌면 그 생명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세어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생명을 이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을 부르는 아이들의 마음에 그들의 이름이 각인될 테니까.

얼마 전 마르고 지쳐 보이는 북극곰 사진 한 장이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동물이 아프면 사람도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온난화의 시련 앞에 선 북극곰의 굶주림 끝에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를 잃는 저위도 섬나라들의 아픔이 연결된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단지 그런 현실을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우리가 내 일로 여지지 못할 뿐이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북극곰의 사연은 사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들이 겪는 현실이다. 이미 생물 대멸종이 시작됐다. 지구가 열린 이래 6번째 일어나는 일이다. 앞서 5차례는 자연이 일으켰고 다시 회복시킨 것이지만 오늘의 그것은 인간이 벌인 일이란 점이 다르다. 그 사라지는 생명의 목록 속에 사람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는 만용으로 인한 착각일 뿐이다.

<나를 세어 봐!>(케이티 코튼 지음, 스티븐 월턴 그림, 조은수 옮김, 한울림어린이 펴냄)에는 사자와 호랑이, 기린 등 야생의 동물들이 생명의 위엄을 뽐내며 등장한다. 그들을 하나, 둘, 셋 아이와 함께 세다 보면 그들의 생태에 대한 자잘한 여러 설명들을 줄줄이 해주는 것보다 더 크고 진한 공명이 책 속의 동물들과 아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역사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 교수가 방한했다. 그는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미래에 학교는 사라질 것이고, 지금 학교에서 하는 교육의 80~90퍼센트는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적 발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미래에 필요한 교육을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기술과 지식을 넘어설 때 인간의 삶을 넘어선 지구의 지속가능성은 무엇이 결정하게 될 것인가? 하나, 둘, 셋! 생명의 숫자를 세며 생명의 존재에 공감하는 감수성, 나는 그것을 키워주는 교육만이 미래 교육의 핵심이 되리라 생각한다. 생명에 공감하는 교육만이 다른 생명과 함께 존재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를 세어 봐!> 중. ⓒ한울림어린이

책 속의 동물들은 당당하거나 서글프다. 살아 있는 생명의 위엄을 보여줄 때 그들은 당당하고, 줄어드는 종족의 운명을 바라보며 그들은 서글프다. 그들의 숫자를 세는 일은 생명의 청지기로서 인류가 가진 책임을 일깨우는 행동이다. 아이와 그들의 숫자를 세면서 생태적 윤리와 책임감에 대해 가르쳐 주는 일은 아이가 살아 만들어갈 세계에 대해 가르치는 일이다.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인간만이 남아 식재료와 산업의 원료로만 구성된 세계에서 고독할 것인가, 함께 공존하는 생명들과 평화로울 것인가? 우리는 지금 아이에게 무엇을 읽힐지 결정하면서 사실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

■ 고래들의 노래를 듣다 : 임정자 <내 동생 싸게 팔아요> 작가 추천 <고래들의 노래>

▲ <고래들의 노래>(다이안 셀든 지음, 개리 블라이드 그림, 고진하 옮김, 비룡소 펴냄) ⓒ비룡소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왜 고래를 좋아하느냐고. 나는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 거리다 '글쎄요' '그냥요'라며 얼버무린다. 왜 좋아하느냐는 물음에는 늘 쩔쩔매지만,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20년 전이다. 그러니까 1996년 어느 봄날이다. 우연히 신촌을 지나다 KBBY에서 주최하는 행사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행사장에는 여러 그림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고래들의 노래>(다이안 셀든 지음, 개리 블라이드 그림, 고진하 옮김, 비룡소 펴냄)가 있었다. 그림책은 몹시 아름다웠고, 나는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고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릴리에게 고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오랜 옛날이었단다. 바다에는 고래들이 가득했지. 고래들은 작은 산들만큼 크고, 밤하늘에 떠오른 둥근 달처럼 평화로워 보였단다. 고래들은 네가 마음에 그려 볼 수 있는 동물들 중에 가장 멋지고 놀라운 동물일 거야."

할머니는 릴리에게 얘기를 들려줬지만 할머니 말대로 된 사람은 서른 넘은 나였다. 고래는 그 날 이후 내 마음에서 그려보는 동물 가운데 가장 멋지고 놀라운 동물이 되었으니까.

프레드릭 할아버지는 '고래들이 중요한 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뼈, 그리고 살에서 나오는 기름이 있다'는 거라며 릴리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래들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주면 고래들도 멋진 선물을 한다고. 릴리는 이튿날 바닷가로 나가 노란 꽃을 선물하고 그날 밤 고래들은 릴리를 부르며 달빛 가득한 바다에서 뛰어오른다. 고래들이 답을 한 것이다.

이 장면을 읽는 순간 마법이 열린 것 같았다. 영롱한 소녀의 눈동자와 달빛에 몸을 드러낸 고래들의 춤은 그림책이 보여주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구나! 인간의 울타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와 그 안의 생명체들, 그들의 위대한 공명의 세계. 그것은 인간 세계의 법칙을 떠나 있었다.

어쩌면 그림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더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듣기로 이 책의 그림은 사진을 인화한 뒤에 모자이크 기법으로 색을 입혀 완성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이 사진처럼 사실적인데도 먼데 세상인 양 환상적이다.

▲ <고래들의 노래> 중. ⓒ비룡소

어쨌든 이 그림책 이후로 나는 고래에 빠졌고, 고래 그림책 하나 만드는 게 소원인 동화작가가 되었다. 실력은 늘지 않는데 지금도 여전히 나는 고래를 그린다.

그러나 고래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자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육당하는 고래들, 좁은 수족관에서 자살을 꿈꾸는 돌고래들. 인간에게 인간 외의 종은 늘 자원이고, 돈벌이 대상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만나는 아이들도 릴리처럼 고래에게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다. 고래들이 좋아하는 걸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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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길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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