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귀향도 좋고 여행도 좋은 마음의 축제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설날 단상

"설은 어디서 보내세요?"

"가긴 어딜 가. 내가 여기 있으니 자기들이 와야지. 요즘은 나가서 먹자고 음식도 하지마라고 하는데 명절인데 그럴 수는 없지. 장 봐서 한 끼 해 먹일 요량으로 시장에 좀 다녀왔더니 허리가 아파서 왔어."

설날을 앞두고 여기저기 아프다며 오시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동네다 보니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평소에는 혼자 지내시는데, 명절에 모이는 가족들 먹일 요량으로 음식 장만 하시다가 몸이 아파서 한의원을 찾으시지요. '본가에 계신 우리 어머니도 저리 애쓰시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이런 어르신들에게는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지금은 연휴라는 인식이 더 강하지만, 설부터 정월대보름까지는 일종의 축제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배를 다니면서 안부를 묻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달집을 만들어 태웁니다. 한 해의 액운은 연에 실어 멀리 날려 보내고, 쥐불놀이를 하면서 추위에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펴고 논두렁 마른 풀에 있는 병해충의 알을 태웁니다. 풀이 타고 난 재는 다시 논밭의 거름으로 유용하니 쥐불놀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설 즈음은 겨우 내 염장식품을 많이 먹어서 생긴 나트륨 과잉과 같은 영양의 불균형과 부실한 영양을 묵나물이나 명절 음식으로 조정하고 보충하는 기간이었지요. 보름의 축제기간을 거치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멀리 떨어진 가족의 얼굴도 매일 보면서 통화할 수 있습니다. 달집이나 쥐불놀이는 화재 위험 때문에 조심하게 됩니다. 시골에서도 더는 연을 날리는 아이를 보기 힘듭니다. 사시사철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시대이다 보니 명절음식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요. 과거와 비교하면 매일 매일이 설과 추석 같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지도, 사람 사이가 더 깊어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겉모양새는 잔뜩 크고 좋아진 것 같은데, 속은 도리어 헛헛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허기를 채우려고 어디론가 떠나거나 소셜 미디어에 열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명절의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명절이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았던 농경문화의 축제였다면, 지금은 얕고 부족한 사람의 관계와 경쟁사회의 압박에서 생존하느라 애쓴 시간에 관한 위로의 시간, 잃었던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온다며 제 몸이 아파도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바로 명절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가족의 품속에서 위로받고 치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꼭 귀향의 형태가 아니어도, 여행이어도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설'이란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설다', '낯설다'라는 말에서 기원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시간으로 넘어감에 관한 익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설, '사리다', '살'에서 유래해 마음이나 행동을 근신한다는 '愼日'의 의미를 지닌다는 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의 살이 설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들 통설이 공통적으로 시간의 변화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김을 알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설의 의미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한 뉴스의 앵커브리핑이 떠올랐습니다. 혼란한 시국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세를 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국 언론인이 동료들을 대표해 행정부에 보낸 서한의 일부 내용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중 제가 깊이 공감한 것은 다음의 문장이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에 관해 가장 근본적 의문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번 설 명절이 많은 분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길,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누구이며 내가 왜 여기에 살고 있는지에 관한 근본적 의문을 갖는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농협하나로클럽 양재점에서 어린이들이 설 차례상 차리기 체험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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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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